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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5.09.19 사춘思春
  6. 2015.09.19 그 시선의 끝에
  7. 2015.09.09 꿈의 거처
  8. 2015.08.25 석류石榴
  9. 2015.08.13 낙원은 가시덤불에서 01
  10. 2015.08.12 [은찬백건] 찬란

찬건

카테고리 없음 2015. 11. 21. 18:51



1.


 주은찬 스테파노 보좌신부를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운 건 때 아닌 빗소리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 너머를 바라보았다. 하늘과 땅이 경계없이 칙칙한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때아닌 찬바람이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공기또한 스산해서, 빗방울이 곤두박질치며 터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은찬은 이따금씩 그것이 어린 나뭇가지에 부딪칠때면  금방이라도 부러질듯 흔들리는 것을 보며 인상을 썼다. 어제지만 해도 햇살이 반짝이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분 나쁜 날씨였다.



2.


-스테파노 신부님?


 은찬이 여유롭게 준비를 마치고 사제관을 나섰을 때 현관 앞에는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과 텅 빈 시선이 무언가 사연이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중년의 남자였다. 무슨 일이시죠? 은찬은 친절하게 물었으나 남자는 빨간머리 신부를 미심쩍게 바라보며 한참동안 눈치를 살폈고, 이윽고 땅에 고개를 처박고는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이따금씩 깊은 한숨을 내뱉는 것이었다. 은찬은 조용히 남자를 향해 우산을 기울이며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괜찮으니 뭐든지 말씀하세요, 형제님. 아니면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 할까요? 


남자는 은찬의 말에 슬며시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때 은찬은 남자가 이상할 정도로 겁에 질려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황망히 비어있는 시선에 은찬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남자는 덥썩 그의 손목을 잡아왔다. 그러더니 그는 별안간 마차가 세워진 곳으로 우악스레 끌고 가는 것이었다.


 은찬은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던 끝에 몇차례 몸싸움을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흙탕물에 젖어 더러워진 수단 자락을 털어내며 은찬이 다소 격앙된 어조로 외치자 남자가 방금 전과 같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은찬을 돌아보았다. 은찬은 남자에게서 좀 더 제대로된 대답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남자로부터 들을 수 있던 것은 대답대신 헐떡이는 숨소리였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 갈듯 깔딱거리는 숨소리, 은찬은 그 사이로 이건 아주 급한 일이라는 것만을 겨우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이보세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

-....

-제대로 말씀 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갈 수 없습니다, 형제님.  

-천사.

-네?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3.


 천사.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남자는 은찬에게 마을에 나타난 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쉴새없이 늘어놓았다. 남자의 말에 따르면 천사는 한 달 전, 마을 부자의 집 정원에 떨어졌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이 신화에 나오는 천사와 같아 그들은 그것이 천사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천사는 땅에 떨어지며 날개를 다친 모양인지 커다란 깃을 펄럭이며 몇 번날아오르려는 시도를 하다가 결국엔 실패했다고. 마을사람들은  대화를 시도했지만 천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우선 그것이 달아나지 않게 그대로 짐승 우리에 가두어 놓기로 했지만 나중엔 천사를 함부로 대한 것에 벌을 받을까 두려워 여태껏 교단에 알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저는 용서받을 수 있겠지요?신부님께서 저를 도와주시겠지요?


 남자의 굳은 어깨를 토닥였다. 이윽고 그는 천사에 대한 몇 가지 추가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날개가 달렸는지. 사내인지 계집인지 등의 문제들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남자는 비교적 정확하게 성서에 알려진 천사의 모습을 그려냈다. 억새고 커다란 날개. 비단 같이 부드러운 깃털. 순결한 백색.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아름다움을 가진 그것은 분명 신의 대리자였다.


 그러나 남자의 거듭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은찬은 여전히 그것이 도무지 천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머릿속으로 몇 년 전 그가 신학교의 학생이었을 때 우연히 보았던 서커스 공연을 떠올리고 있었다. 학생시절 학교의 친구들과 함께 유랑 서커스단의 값싼 관람료에 현혹된 나머지 딱 한번 그것을 보러간 적이 있었고 거기서 박쥐 날개를 가진 여자를 만났다. 정확히는 가짜 날개를 붙이고 사람들을 속이던 사기꾼. 아마, 그 천사라는 작자도 그 비슷한 사기꾼일테다. 


천사라니 가당치도 않지. 그는 이제 막 사제서품을 받은 젊은 신부였고 그는 속세에 떠도는 마녀나 악령, 저주, 혹은 점성술 같은 미신을 단호하게 부정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믿는 것은 오직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성인들의 기적이나 예언, 그리고 성서가 전부였다. 남자가 초조한 얼굴로 말없이 가슴에 성호를 긋는다. 은찬은 그가 걱정하는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거짓으로 속삭이며 고개를 돌렸다.  마차가 숲길에 들어선 모양인지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작은 사각형의 유리창 너머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5.


 정오가 지나자 빗줄기는 더 이상 방울방울 떨어지지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하늘이 미치기라도 한 듯 비가 장맛비처럼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 은찬은 유리창의 물 벽 너머에 짙은 초록색 상이 맺히는 것을 보고 그들이 아직 숲길을 달리는 중임을 깨닫는다. 마을로 향하는 흙길이 진창이 되어 버린 탓에 마차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여정은 예상보다 길어질 것 같다. 튼튼한 쇠바퀴가 고랑을 치듯 진흙 속을 열심히 가로지르며 앞으로 나아갈 때 마다 차체가 튀어오르는 듯 덜컹거렸다. 이따금씩 하늘에선 번쩍이는 번개가 땅에 내리꽂혔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는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에 더욱 불안한 표정이 되어 무릎위에 주먹을 올린 자세로 경직되어 있었다. 그와 달리 은찬은 비교적 평온한 마음으로, 그러나 조금 무료함을 느끼며 두꺼운 교리 문답서를 무릎에 펼치고 있었다. 남자는 여전히 걺은 사제가 그의 불안을 해소해주길 바라며 은찬을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었으나 은찬은 몇 번의 위로 끝에 더 이상 그를 위로하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였다. 조용히, 그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솔직히, 이제 저놈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마냥 받아주는데 싫증이 난 것이다. 


-정직한 양심을 가진 당신을 신께서도 용서하실겁니다.


 그래서 남자가 신에 대한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호소할 때 마다 은찬은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가 분명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그것은 신이라기엔 차라리 미신에 가까운 두려움이었으므로,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그런 사람들에겐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 법이었고 그러니 그같은 말로 안심시키는 게 은찬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것이다. 피곤을 무릅쓰고 남자를 상대하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곧 있을 마을 사람들, 그리고 사기꾼 천사와의 대면을 위해 교리 문답서를 한 번 훑어보는 쪽이 더 이로웠다.


 어서 서둘러 그 말도 안 돼는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가자. 그리고 돌아가면 기도를 드려야지. 그리하여 오늘의 불쾌한 일은 없던 일이었던 것처럼 잊고 다시 맡겨진 그의 소명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도록.  짧은 기도문을 외며 은찬은 버릇처럼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6.


 그들이 마을에 도착한 것은 점심때가 한참 지나서였다. 마을 입구엔 마을 사람들 몇몇이 나와 있었는데, 그들 또한 남자와 같이 수심 가득한 잿빛 얼굴을 하고는 불안과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채 초조한 기색으로 은찬을 보자마자 피해 달아나는 것이었다.  정말 남자가 말한대로 천사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무슨 큰 잘못을 한것처럼. 설령, 정말 천사가 나타났다고 해도 무지한 신도들이 그것을 묶어두었다는 것이 큰 잘못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은찬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불어난 의문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며 그를 괴롭힌다. 대체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단지 천사일지도 모르는 사람의 존재를 교단에 알리는 것이 지금 이렇게 그들이 이토록 수심에 잠겨 있을 정도로 큰 죄란 말인가?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두려움은 단순히 무지에서 비롯된 막연한 것이라기엔 형체가 뚜렸했다.  분명 그가 모르는 비밀이 있다. 뭔가, 큰 잘못. 천사보다도 그들이 숨겨야만 하는. 


남자는 어색한 걸음걸이로 앞장 서 걸어가고 있었다.


-형제님.


천사. 마을 사람들. 그리고 겁에 질린 밀고자. 은찬은 모든 의문의 종점을 찍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최대한 사려 깊은 이해자 흉내를 내며 호기심과 의문을 뒤로한 채 남자의 떨리는 손을 마주잡는다.


-전부 다 말씀 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답니다.



7. 


 남자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는 끔찍했다. 남자는 그들이 그 천사를 가두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 신비한 존재를 욕심내어 부정하게 탐하는데 이르렀으며 그 과정에서 천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날개를 뽑고, 족쇄를 채우고, 순전히 호기심으로 신체를 훼손시키고 팔아먹고 강간하여 욕보이는 등의 숱한 학대를 자행했음을 탄식과 흐느낌과 무거운 날숨에 섞어 고백했다. 그러나 자신은 방관자였으며 마을 사람들의 행동조차 순수한 그들의 의지였던가 하면 분명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힘이 그들을 그렇게 이끌었노라고, 그 천사를 보면 누구든 그러할 것이라며 남자는 비겁한 양심을 고백하는 가운데 어떻게든 죄가 없음을 이해받고 용서받기 위한 변명을 눈물과 함께 끊임없이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럼 왜 이제 와서 그 사실을 알리시는 겁니까?

-...그저, 저는 그저 용서받지 못 할 것이 두려워서.


 하. 은찬은 참을 수 없을것 같은 경멸과 혐오를 목구멍 너머로 삼키며 한숨을 뱉었다. 남자가 이야기를 믿어달라는 듯 어느새 발 밑에 엎드린 채 그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어디 있습니까? 그 천사. 




8.


 그것은 닭장 구석에 처박힌 채 젖은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날개는 혹사당한 흔적이 역력했고 깃털이 듬성듬성 빠져있었다. 본래 하얀 색이었을 그것은 구정물이 묻어 잿빛에 가까웠고 사람 아닌 것들이 먹는 과일 껍질과 음식 찌꺼기가 묻어있어 고약한 악취가 났다. 웅크린 채로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은찬은 좀 더 가까이에서 그것을 살펴보기 위해 몸을 숙였고 그것이 사람과 흡사한, 아니. 거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뭐 이런. 이딴. 어떻게 이런 짓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그 때 웅크리고 있던 그가 파드득 몸을 떨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짐승이나 가지고 있을법한 샛노란 눈의 반질반질한 시선이 은찬에게 박혀 떠날줄을 몰랐다. 은찬은 그것에서 눈을 때지 않은 채 조심스레 라틴어로 인삿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탈출을 시도하지도, 무어라 말을 하지도 않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붙박혀 은찬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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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건

카테고리 없음 2015. 10. 13. 23:22

찬건

백건의 열여덟 관례는 분명 집안의 경사스러운 일이었으나 이때까지와 달리 그 집안 식솔들은 사뭇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조심스레 그것의 예를 치루어야했다. 그날. 전례대로라면 정해진 예법에 따라 왕이 그 집 사람에게 대대로 제수되는 관직을 내리는 것으로 끝이 났어야 할 형식적인 하례가 이례적으로 지나치게 화려했던 까닭이었다. 하례물품을 실은 수레는 총 아홉이었고, 그 뒤를 따르는 수행원이 추가되어 제법 오랫동안 궐에서 그 집 저택 쪽으로 기나긴 행렬이 이어졌다. 

그날 이후 왕실 여인의 친영에도 감히 견주기 힘들었던 행렬의 끝에, 사람들 앞에서 백건은 제 가문과 이름과 관직 대신에 '총애하시는 그 분' 으로 불렸다. 왕께서 총애하시는 그분. 그러나 곧 뒤에서는 왕의 남창으로 불리며. 그것은 백건 본인 이전에 왕에 대한 대단히 무엄하고 참담한 이야기였으나 사람들은 권세 없는 젊은 왕을 헐뜯길 마다하지 않았다. 백건이 어린 날 왕의 동궁시절 그의 놀이 동무였던 것과, 이후에도 왕의 밀행과 백건의 궐 안 출입이 잦았던 사소한 모든 것들이 왕의 남색 취향을 헐뜯는 근거가 되었다.

-내가 준 것들을 하고 오지 않았구나.

처음 신하로서 은찬을 대면하는 자리였다. 편전이 아닌 침전 내밀한 곳에 불려간 백건은 정좌를 허락받지 못한채 무릎을 굽혀 앉은 채로 고개를 조아렸다. 

-무엄하게도 다시 돌려보내기까지 했지.

은찬은 면포로 난의 줄기를 닦아내며 백건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채로 여상스럽게 말했다. 그것이 심히, 과하다고 생각되어. 심기의 불편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어조에 백건은 육중하게 어깨를 짓누르는 압박감을 느끼며 백건이 대답했다. 여름인 탓에 침전은 문을 열어두어, 바람이 옅에 불어왔고 뜰에 풀어놓은 구관조가 뜰에서 뻔뻔스럽게도 조잡한 목소리로 백건의 말을 따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백건은 꿇어 앉은 채로, 은찬의 붉은 옷 끝자락을 불안하게 응시했다.

실제로 그날 수레에 담긴 것은 신하에게 내리는 물건은 아니었기 때문에. 하사품을 전달하는 행렬이 집 담장을 넘자마자 예를 갖추어 어떤 교지를 전달했고, 수레에 쌓인 궤짝들에 있던 것은 여인의 것에 가까웠고 간소하긴 하였으나 백건의 눈대중으로도 궁중의 물품이 분명한 것들이었다. 정확히는, 비를 맞이하는 법도에 모자람 없는 물품들. 그러니까 대례복을 위한 비단과, 패물같은 것들이 잔뜩. 

물론 말도 안되는 소문을 믿고 은찬을 의심하고 경계해야하는 것이 스스로도 달갑지는 않았다. 그 모든 참담한 소문이 전부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하례품과 함께 전해진 교지를 중간에서 먼저 낚아챈 아비가 그대로 낯빛이 검게 물든 채 그것을 태워버렸던 것이 자꾸 떠올랐다. 어머니도 하사품을 마다하지는 않았으나 그것들 중 관과 조복을 위한 최소한의 것들을 빼놓고는 아랫것들을 시켜 곧장 창고로 향하게 하였고, 그것을 오늘 백건이 입궐하는 편에 함께 돌려보내지 않았던가. 말 없이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백건은 감히 말을 올리지 못했고 은찬은 말이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 대로 한식경 가량을 있다, 은찬이 하문 했다. 마음에, 마음에 들지! 구관조 녀석은 또 그 말을 방정맞게 따라했고, 백건은 한층 낮아진 대화의 격에 경계를 푼다.

-그럼 비단이랑 패옥 대신 차라리 잘빠진 말이나 한마리 보내지 그러셨소?
-다 내게 어울리는 것들로 고르고 골랐는데.
-빌어먹을. 차라리 내 누이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하지 그래.
-뭐든 안 어울리겠냐만, 그래도 빨간색이 역시 잘 어울리겠다 싶어서.
-그래서 계집애 혼례복에, 관에. 홍화 연지까지 보내 사람을 놀리냐?
-입술 연지 바르고 찾아왔으면 좋았을텐데. 그렇지?
-개뿔.

그 엉뚱한 구석이 있어도 헡으로 행동하는 바 없이 조심스러우니 백건은 은찬의 그같은 행동에 무슨 의중이 있을 지 모른다고 믿었다. 가령,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단지 사람들 눈을 속일 필요가 있었다던가 하는 그런 것이.

-너 세간에 도는 소문을 모르지는 않겠지.
-...
-대체 무슨 생각이야?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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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카테고리 없음 2015. 10. 11. 20:17


카르멘



 현우는 백건에게 총을 빼어들고 경고했다. 그것을 단순히 말뿐인 위협으로 여겼던 것은 백건이었다. 아직도 현우가 자신을 어쩌지 못하리라는 막연하고 근거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건은 현우를 뿌리치고 걸어갔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현우는 그를 쐈고, 건은 그대로 고꾸라져 층계를 굴렀다. 허무하리만치 손쉽고 아무렇지 않게 현우는 건을 쐈다. 자신을 등지고 걸어가는 백건이 어느 정도 거리까지 멀어졌을 때, 그래서 그에게 심각하진 않지만 발을 묶어둘만한 제약을 걸 수 있게 되었을 때 말뿐이던 경고가 정확히 백건의 오른쪽 다리를 명중시켰던 것이다. 


"너. 날 죽일 셈이지!"


 그대로 1층까지 굴러 떨어진 백건은 피가 흐르는 다리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고는 성난 얼굴로 재빨리 품 안의 권총을 꺼내 현우를 향해 갈겼다. 2층 난간, 그리고 층계를 재빠르게 타고 내려오는 그림자를 쫒아 분진이 무성하게 날린다. 픽-,픽-, 2층 계단 앞을 차지하던 도자기 하나는 완전히 박살이 났고, 비싼 원목 가구 몇개에도 탄환이 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우는 여유롭게 그 난장판을 가로질러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미친놈, 정말로 미친놈!"

"닥쳐요."

"날.. 쐈어.네가 날 쐈다고. 개새끼. 개자식아! 네가, 네가 나한테! 윽..!"


 현우는 말없이 악소리를 내지르는 백건의 뒷머리를 그대로 잡아챘다. 억지로 몸이 일으켜지고 하염없이 벽으로 밀쳐진 백건이 현우에게 짓눌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습적인 완력에 눌린 채 등과 허리와 뒤통수가 쿵쿵 소리를 내며 벽과 아프게 부대낀다. 입술이 물어 뜯기고, 목이 졸렸다. 난폭함. 그것에서 백건은 익숙함을 느낀다. 오래 전에, 이런 식으로 마주했던가.


"욱...흐읍..,하윽..!"  


 입술 살같이 뜯어져나간 자리에선 계속 피가 났고 아프게 쓰라렸다. 그리고 바짝 목이 졸려  숨을 먹는 것이 무척이나 버거워 질 때 쯤, 아! 그리고 여전히 홧홧한 허벅지 위를 현우가 우악스럽게 움켜쥔다. 건은 소리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미쳐버릴 것 같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아. 붙잡혀서, 휘둘리고, 꿰뚫려서-


"당신, 왜 날 떠났습니까?"

"..."


 그러나 짐승의 것처럼 낮은 목소리에 담긴 감정의 절제에 건은 여전히 변함없는 관계에서의 우위를 확인한다. 글쎄, 왜 그랬을 것 같냐? 제 손톱이 할퀸 자리가 선명한 현우의 팔뚝을 어루만지며, 웃으며 건이 대답했다. 현우는 참고 기다리며 허락을, 아니면 어떤 대답을 기다린다. 그러나 내어줄 생각이 없다. 대신, 백건은 현우를 끌어 당겨 키스하는 시늉을 하다 복부에 재빠르게 주먹을 내리 꽂았다. 비틀거리며 현우가 물러나는 틈을 타 정확히 발로 정강이를 가격하고 그대로 뒤집어 바닥에 내리 꽂는다. 


"개자식."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백건은 현우에게 그간의 일을 해명하거나, 혹은 변명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현우에게서 몸을 숨길 수 있었고, 자신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예 현우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우가 만주땅을 이 잡듯 뒤져 결국에 그를 찾아 내었을 때에도, 모든 수단이 여의치 않았을 때 재회의 키스 대신, 그가 바라는 대답 대신 거리낌없이 총부리를 대가리에 겨눌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현우는 언제나 어쩔 수 없어야했다. 사랑한다고 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러했듯 똑같이 자신을 배신하고, 미워하고 총을 겨누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여전히 내게 어쩔 수 없어야 했다. 언제나 사랑하고, 감내하고, 기다리고, 애태우며.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있어야했다. 건은 그렇지 않다는 것에 서러움을 느낀다. 물론 그것은 불합리하고, 이기적이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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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7.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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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思春

카테고리 없음 2015. 9. 19. 12:38


사춘 思春


굳이 따지자면 계집애가 대신 전해달라며 제게 건내준 선생 앞으로의 편지를 멋대로 버린 것이 잘못이라지만, 그걸 가지고 꼰대질을 하며 혼을 내었던 것은 건이 생각하기에 명백히 선생의 잘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잘못이라 그러는 것에 마음이 상하였다. 


 한 지붕 아래 살면 싫어도 얼굴을 마주치게 될 법도 하건만 백건은 일부러 선생이 머무는 사랑채 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종일 선생을 피해다녔기 때문에 둘은 학교에서만 얼굴을 볼수 있었다. 사이엔 한동안 냉기가 흘렀다.


선생은 그 틈을 타 자꾸 수업시간만 되면 백건에게 교과서 낭송을 시키려고 했다. 그게 얄미워 수업을 한 번 빠졌을 뿐인데, 수업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선생은 매일 그와 함께 나머지 공부를 할 것을 요구했다. 평소라면 가지 않았을 테지만 선생은 웃는 낯으로 말을 하면서 시덥잖은 협박을 했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겠다는 것이었다. 유치했지만 어느 정도 위력이 있는 협박에 백건은 그것을 받아들여야했다.

그러나 나머지 공부라고, 뭔가 귀찮을 것만 같은 이름과 달리 그 내용은 간단했다. 매일 한시간씩 그가 부르는 낱말과 문장을 받아쓰는 것이 전부였다. 받아쓰기는 누가 국어 선생 아니랄까봐 고리타분한 시 같은 것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같잖은 연애시가 주를 이루었다. 간혹 선생이 말을 걸기도 했지만, 백건은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글을 받아쓰는 데만 열중했다. 


선생 놈은 도대체 어떻게하면 세상에 많고 많은 시 중에서도 그딴 낯간지러운 것들만을 쏙쏙 찾아내는건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화다닥 달아오를 것만 같이 간지러운 것들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부끄러워졌다. 또한, 그러다가도 그걸 또 어딘가 어느 계집애들에게 읽어주고, 계집애들이 사탕발림에 완전히 녹아내려 선생님 나 죽네 하며 매달릴 것이 생각나서 한없이 짜증이 솟구치곤 했다.


-미소는 나의 운명의 가슴에서 춤을 춥니다 새삼스럽게 스스러워 마셔요. 
-그런 거 말고 야한 시는 없냐? 왜, 그런거.

 한 번은 반항이랍시고, 아니. 그냥 저도 나처럼 좀 곤란해져봐라 하고 일부러 그렇게 물었다. 언제 쯤 사과를 할까 기다리고 있는데, 그럴 기미는 없고 오히려 제 하는 짓을 즐기면서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구는 게 못내 얄미워서였다. 그런데도 선생은 별로 당황한 기색도 없이 그저 빤히 백건을 바라보더니 별안간 손을 뻗어 학란 옷깃을 매만지며 말하는 것이었다. 

-야한 게 뭔지는 알고? 

이게 또 어디서 애새끼 취급이야.

-...나도 알건 다 알거든.

백건은 오갈 데 없는 시선의 끝을 실쭉 웃는 입술 밑 점에다 할 수 없이 걸어두고, 딱 그 또래 남자아이의 쑥스러운 대답을 하는게 고작이었다. 백건 다 컸네, 그런 것도 알고? 선생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웃으면서 말을 했다. 


아. 


머릿속이 빨갛게 물이 드는 것 같았다. 목은 따끔거렸고, 얼굴도 분명 새빨갛게 물들었으리라. 웃고 있는 걸 볼 때마다 자꾸만 기찻길 옆 샛길에서 선생과 입을 부비던 것이 떠올랐다. 멍하게, 그 때와 비슷하게 쿵쾅거리는 떨림을 느낀다. 그때도 이렇게 빤히 보던거 같았는데. 빨간 속눈썹이, 그러다가 입술이 닿고, 혀가, 근데 그 때 눈을 감았던가?


툭, 툭, 학란 단추가 두어개쯤 벌어지고 나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더랬다. 백건은 두 팔로 선생의 가슴팍을 세게 밀치고 일어났다. 우당탕탕, 밀려난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에 교무실의 다른 선생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릭 백건을 쳐다보았다. 씩씩거리며 백건은 선생을 노려봤다. 안 봐도 시뻘게져 있을 것 같은 제 얼굴을 두고도 선생은 그저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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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선의 끝에



-오후 쯤에 사람이 갈겁니다. 주문이랑 최대한 비슷한 걸 구하기는 했는데.
-알았어, 땡큐. 매번 신세가 많아.
-그럼 이번에는 좀 오래 쓰던가요. 매번 성가시니까.
-어쩔 수 없는 거 알면서 또 그런다.

현우가 아침 일찍 전화로 물건의 도착을 은찬에게 미리 알렸고, 그것은 당일 오후 곧바로 은찬의 집에 도착했다. 은찬은 잠시 부재중이었기 때문에 애꿎은 택배 회사 직원이 두 번 씩 이나 이고 나르느라 고생을 좀 했다. 때문에 택배 회사 직원이 무척 불친절한 태도로 은찬에게 수령인 사인을 요구했고 은찬은 이걸, 컴플레인을 걸까 말까. 거슬리는 말투와 태도에 몇 번이나 택배 회사 홈페이지의 고객 센터 란에 컴플레인을 걸 지 말 지 고민했는지 몰랐다. 그러던 은찬은 남자를 곁눈질하며 의외의 사실을 깨닫는다. 푹 눌러쓴 캡 아래의 남자의 얼굴이 궂은 일을 하는 직업답지 않게 새하얬다. 색 밝은 머리카락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하얀 피부에, 챙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또렷한 실루엣의 이목구비가 단박에 시선을 끈다. 좀 더 자세히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은찬은 고개를 숙이며 수령인 체크란에 사인을 했다. 치켜뜬 시야에 보이는 남자의 눈은 보기 드문 노란색이었다. 

"근데 대체 뭐가 들어서 이렇게 무거워요?"

은찬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물건이 무겁다는 핑계를 대 남자를 집 안에 들였다. 남자는 군말없이 그것을 집 안까지 옮겨주는 듯 하더니 또다시 작게 불만을 표했다. 남자가 물었을 때, 은찬은 굵은 목줄기에서 남자의 팔뚝으로 시선을 옮기던 중이었다. 별건 아니고, 그냥...가구같은 거.., 은찬은 얼버무리며 눈알을 굴린다. 현우가 물건을 보낼 때 그것은 항목상 가구로 분류되어 은찬에게 배달되었다. 그러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배달 품목에 버젓이 '사람' 이라고 써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그런것 치고도 좀 많이 무겁네."

남자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여기다 놔 주시면 되요."

은찬은 듣지 못한 척 적당한 위치를 가리켜 말했다. 남자가 은찬이 말한 위치에 물건을 내려놓는 순간에 시선은 어느새 허리춤에 내려가 있었다. 허리가 굽혀지며 맨살이 살짝 드러났다. 동시에 굵은 어깨선과 달리 잘록해지는 허리 부분때문에 몸이 굉장히 역동적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다 딱 붙는 바지의 옷감에 감싸인 허벅지 부분이 터질듯이 팽팽해서 그대로 시선이 멈춘다. 그리고는 등을 돌리고, 땀에 젖은 티셔츠 너머로 보이는 등에서 마지막까지 시선을 거두지 못한채 현관 문이 닫기는 순간 탄식과도 같은 은찬의 목소리가 나지막히 터져나왔다. 와, 씨발년이 진짜. 




그대로 포장을 뜯고 지퍼백을 열었다. 지퍼백 안에는 각종 처리를 해 썩히는 걸 늦춘 남자 시체 한 구가 들어있었다.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 방금전 남자를 떠올리며 은찬은 망설임 없이 그대로 그것을 처리했다. 이윽고 새로 현우에게 전화를 했을 때, 당연스럽게도 수화기 너머에선 현우의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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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거처



1.

 

 건은 오늘 선주로부터 밀린 임금을 모두 지불 받았다. 항구에 배가 정박했을 때 미리 기다리고 있던 선주의 심부름꾼이 건을 포함한 뱃사람들의 임금을 그들에게 전달했다. 그가 지난 번의 체불을 말 없이 참고, 묻은 소금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훌쩍 바닷길에 오른 때로부터 정확히 3개월 만이었다.

 

덕분에 목돈을 거머쥔 건의 바지 주머니가 오랜만에 두툼하게 차올랐다. 소금과 바람에 거칠어진 손을 주머니 깊숙히 종이 쪼가리들과 함께 찔러 넣은 채 건은 세어보지 않았지만 제법 손에 잡히었던 돈의 액수를 가늠해본다. 매번 정체를 알 수 없는 화물을 실어 나르고, 서너시간이 고작인 수면시간을 제외하면 깨어 있을 때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던 고생을 생각하면 돈은 터무니 없는 액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번 배에 오를 때 까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거기에 선장이 수고했다면서 덤으로 그의 젖은 손에 무언가를 얹어주었기 때문에, 매번 힘없이 질질 끌리던 발걸음에는 평소보다 무게가 실렸다. 선장이 항상 그것을 저보다 짬밥 높은 것들과 비밀스럽게 나누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마도 마약이나, 아니면 그에 준하는 밀수품 같은 거겠지.몰래 들여오는 물건들은 제 값을 쳐서 받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건의 손에 조금의 푼돈이나마 더 쥐어 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 번 배가 뜰 때 까지, 이번엔 생활이 조금은 더 윤택해질 지도 모르는 일이다.


2.

 

배를 댄 항구에는 새벽과 함께 뭍으로 올라온 뱃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파도의 포말처럼 흩어져 부서지고 있었다. 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선창가엔 아침이면 열릴 시장을 위해 어선들이 미리 불을 밝혀놓아 어두운 끄트머리까지 길게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건은 하얗게 백열하는 등불의 빛을 등지며 걸음을 옮겼다. 

 

 소란스러운 선창가 바닥은 물에 잔뜩 젖어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그럼에도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바다 안개 너머의 희미한 빛줄기를 피해, 엉성하게 포장된 콘트리트 도로와 짧은 모래밭, 그리고 방파제 위를 가로지른다. 그리고 마침내 제대로된 뭍으로 들어서는 경사로를 타고 오를 쯔음, 귓가에 메아리처럼 따라붙던 바닷가 소음이 잠잠해졌다. 그쯤해서 경사로 중간 쯤에 잠시 멈추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거리 위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고요했다. 

 

건은 그대로 슬그머니 손에 쥔 것을 품안에 갈무리하고, 마저 걷는다. 비스듬히 경사진 언덕을 넘으면 보이는 것은 해안가 구시가지의 빈민 주거 지구였다. 거미줄 같은 골목이 낡은 가로등 불빛 하나를 미끼로 걸쳐두고 건을 맞이 하고 있었다.

 

  

3.


 건은 그 구시가지 안에 위치한 빈민 지구의 가장 낡은 건물 꼭대기층에 살았다. 처음 그가 이곳에 자리를 잡을 때 가지고 있던 돈으로 그가 들어가 살 수 있는 곳은 방세가 싼 꼭대기층 뿐이었고, 마저도 아래층은 죄다 사창가로 사용되는 건물이었지만 형편이 나아지지 않은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집이라고는 해도 그가 배 위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곳에서 제대로 생활을 한 적은 없었다. 처음 이곳에 내던져 졌을 땐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었고 기억조차 나지 않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결국 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체념했을 쯤에도 건은 매일 낮이면 잠에 들고 밤이면 빨갛게 불을 밝히고 하루를 시작하는 그 곳의 유령같은 삻을 견디지 못했다. 배를 타게 된 것도 그곳에서 잠을 자며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건물 아래층에 그와 함께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이웃사촌과 건은 제법,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진 사이었는데, 주은찬, 그 이웃사촌은 어느날 술에 취해 옥탑방 문을 두드린 불청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취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건은 빼꼼히 열린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건을 마주한 은찬이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웃던 것을 기억한다. 입술 밑의 점이 헤픈 웃음이었다. 그러고는, 계집애들 다리 밑으로 돈이나 긁어모으는 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문을 닫으려고 하니 대뜸 제 이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결국 건은 얼떨결에 놈이 건내는 술을 대가로 그 자리에서 은찬의 굴곡지고 장황한 인생사를 들어주게 되었다. 은찬은 이곳 부랑자들에게서 들려오는 각양각색의 혀가 꼬부라진 외국어, 천박한 사투리와 욕설 대신 제법 건에게 익숙한 언어를 구사했다. 점잖고, 깔끔한. 어렴풋이 구석에 쳐박아둔 기억이 두둥실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날이면 잊어버릴 이야기를 차곡차곡 귀에 담았던 건지도 몰랐다.

 

은찬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내내 헤프게 눈웃음을 쳤다.

 

웃었고, 웃다가, 또 웃고, 웃더니, 마지막엔 키스를 했다.

 

-외로우니까 키스 한 번만 해보면 안돼요?

-미친놈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변덕스러웠던가? 고작 몇시간 만에도 뒤집힐 수 있을 만큼? 그러나 건은 곧 이해했다. 이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똑같이, 펄럭일 날개조차 꺾여 아우성치고 있는 삶인 것이다. 갑자기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 사이 은찬은 키스를 하고 있었다. 얇은 입술의 표면과 젖은 혀가 톡톡 두드린 자리가 뜨겁게 달아올라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숨을 받아 먹는 그를 적당히 마르고 살집이 맺힌 손가락이 더듬어 내려갔다. 

 

달이 뜬 밤이었다. 가빠진 호흡과, 싸구려 술의 깔끔하지 못한 뒷마무리로 올라오는 독한 기운에 취한 채 건은 그날, 밤보다 새카만 은찬의 두 눈을 봤다.

 

 

4.

 

아직 시커먼 하늘 위로 고개를 처들고 건은 익숙한 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불빛 한 점 없었지만, 이미 그런 것쯤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곳에 익숙해졌다. 건은 빈민가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걷다 보면 비릿한 살 냄새가 깊은 한을 선명히 아로새기듯 가시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 위로, 위태롭게 위로 쌓아올려진 낡은 건물의 그림자가 작은 빛줄기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짙게 드리워있었다. 그것은 해가 뜬 낮시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림자는 구석구석 스며들어 사람들을 짓누른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절망은 그냥 삶의 일부였다.


건물 앞까지 다다랐을 때 건은 때마침 물건을 바깥으로 옮기고 있는 은찬과 마주쳤다. 1층의 불만 켜져 있는 걸 보니 가게 마감을 치는 중인 듯 했다. 건은 은찬을 그대로 바라본다. 은찬은 눈치 채지 못한다.


"왔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 와중에 등 돌린 은찬이 그렇게 말을 하고, 건은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 입술을 비죽였다.


"어."


대수롭지 않게 툭 던지는 말을 기다렸던 것 같기도, 그런데 고작 그 뿐이라 서럽다.



5.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겨우 몸을 지탱하는 낡은 골목의 유일한 출구는 바다였다. 사람들은 매일 바다를 바라 본다. 그러다 견딜 수 없어질 때 쯔음, 그 바다의 푸른 수평선 너머에 지푸라기처럼 매달려 뛰쳐나간다. 그러나 결국 갈곳 없이 떠돌다 이곳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건은 매번 더 절망하고 더욱 지쳐 버린 채로 이 골목에 온전히 몸을 맡긴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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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石榴

카테고리 없음 2015. 8. 25. 00:19






석류 




껍질의 건조한 금빛이

어떤 힘의 요구에 따라

과즙의 빨간 보석들을 터뜨릴 때



*


나는 최근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호텔 1층에 자리 잡은 카페 창가에서 매일 해변에 나타나는 남자 아이 하나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는 이방인의 건조하고 밝은 색을 가진, 성숙과 미성숙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애매한 나잇대로 짐작되는 아이였다.  


막 각이 지기 시작한 얼굴과 몸에서는 어중간한, 그러니까 과도기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그것도 막 시작된 성장의 낌새다. 그래서 그 애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농익은 것을 보는 것보다 더 미묘한 충동을 일으키게한다. 그 아인 자기가 그렇다는 것을 잘 알았다. 


 매일 해가 질 때면 어김없이 해변에 나타나던 그 아이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약 한 시간 가량 해변을 맴돈 이후엔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와 함께 사라지고는 했기 때문이다. 동행은 날마다 다르다. 또래의 남자 아이일 때도 있었고, 나같은 청년일 때도 있었으며 중년 혹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기도 했으며 여러명일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마 모두 같은  것을 원했을 거다. 그랬음이 분명하다. 누구든 그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애의 하얀 얼굴이나 물 오른 가을의 황금빛 밀밭 같은 두 눈, 그리고 붉게 익은 팔다리와 모래밭을 꼼지락거리는 맨발이 사람을 미치게 했으니말이다. 


 나는, 아마도, 그애를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아이와 시선을 주고 받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 아이는 그 누구에게도 먼저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그 아이가 물가에 발을 찰박이며 일행과 함께 해변을 거슬러 사라질 때면 그 기다란 그림자와 함께 건조한 껍질같은 색을 한 샛노란 시선을 꼭 나를 향해 던져두곤 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나는 내가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이라고 생각했던 그 아이의 시선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믿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그렇게 느꼈다. 나는 그 애의 시선을  받았다. 그 애는 나를 본다. 그러나 그 아이는 늘  나에게 그 아쉬운 시선만을 남기고 떠나갔다. 매번 야속한 뒷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얼마나 비참하고 당혹스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점점 기이하게 뒤틀리는 나 자신을 느낀다. 나는 이제 내 충동의 본질을 스스로 알 수가 없다. 얇은 옷을 걸친 몸과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다리를 보고 있으면 막연한 첫사랑을 느끼고 설레이다가, 어리지만 분명 남자아이의 것인 등허리를 보고 있으면 그 애가 마치 내 품속의 애인같아 사랑스럽고 황홀하고 아찔해 끌어안고 키스를 하고 싶어졌고, 그러다 끝내 그것이 내가 아닌 어느 누군가의 팔에 둘러져 있는 것을 보면, 수십 수백 번 천박한 모습을 상상하고 그 애를 매도하며 채 성숙하지 않은 그 애가 두번 다시 소생할 가능성조차 없게 영영 내 손으로 꺾어 쥐고 흔들고 싶다고 생각하며 애를 태우기도 했다.


이제 그 애는 하루 종일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내게 작용하여 내 전부를 옭아매고 있었다. 나는 완전히 그 애에게 홀렸다. 사로잡혔다. 미쳤다. 나는 때때로 마치 내가 예전부터 그 애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낀다. 심지어 내가 그 아이와 유일하게 각별한 사이라는 착각이 든다. 그리하여 애틋함에 시달리며 목이 말라 갈망한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 그 애를 보기 위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매일 카페를 찾는 것이다. 나는 종일 창가 자리에 앉아 내가 그 애의 애인인 양 그 애를 기다린다. 기다림은 괴롭다. 그리고 해질녘, 내 괴로움을 끝내줄 시간이 오면 그 애가, 나의 소년이, 투명한 발목을 휘저으며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참을 수 없는 환희에 부풀어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한다. 그러나 다시금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해를 따라 서서히 잠겨가는 그림자를 볼 때면 또다시 목이 말라 갈망하며 슬픔에 잠겨 밤새도록 울고야 만다.



*



오늘도 나는 여느 때처럼 그 애를 기다린다. 기다리다보니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해질녘이 아닌 오후에 그 애가 나타났다. 그 아이는 물가를 거니는 대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제법 오랫동안 조용히 바라본다. 나는 시선을 느꼈지만, 모르는 척 했다. 상대를 정확히 겨냥하여 꿰뚫는 호기심 어린 눈빛에 사냥을 당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애 앞에서, 내가 바라던 그 애의 눈길과 관심 앞에서 나는 무심코 겁이났다. 목이 움츠러든다. 짧은 셔츠깃 위로 식은땀이 맺힌다. 그 위로 더운 바람이 불었다.


 그 아인 계속 그 자리에서 나를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낮은 자리에서 발갛게 타오르기 시작했을 무렵에, 나는 목이 말라 다급히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그런데 웨이터가 맥주를 가져다주고, 내가 팁을 건네고, 영수증을 확인하는 동안 그 아이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사뿐거린다기보단 성큼성큼 느긋하고 여유로운 발걸음이 나를 향한다. 걸음에 맞춰 심장이 뛴다. 곱게 갈린 조개와 모래 더미 위를 가로지르는 흰 다리가 이따금씩 백사장의 모래 틈 사이에 고인 웅덩이에 빠져 얄팍한 물비늘이 튄다. 그 때마다 우아하게 뻗은 그의 종아리가 함께 반짝였다. 나는 숨이 찼다. 그것은 누구라도 하는 짓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 아이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위험하고 아름다웠으니까. 


그러나 나는 유일한 구경꾼이었다. 그것을 다른 누군가가 보았다면 무척 화가 났을 테지만, 해변엔 사람이 없었다. 멀리 아지랑이처럼 하얀 두 다리가 눈 앞에서 흔들린다. 겨울에 뜨는 낮달처럼 그것은 현실감이 없다. 그래서 나는 넋을 놓고 그 애의 두 다리를 핥았다. 그리고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그러니까, 그 애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다가와 불쑥 고개를 내밀어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더운 살냄새를 맡으며 이곳 카페에 유리창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렇다. 여긴 동물원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왜 자꾸 쳐다 봐?"


목소리는 생각 이상으로 어렸고, 그것은 부드럽게 귓가를 구르다 톡 터져 허공을 배회한다. 비눗방울 같다. 생각했던 것보다, 직접 대면하는 순간은 그리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애가 내게 다가오던 때가 떨렸다. 나는 벌써 막연하게 여겨지던 그 아이가 수월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 애가 이 남쪽 휴양지에서 볼 수 있는 흔해빠진 아이들처럼 굴지는 아니었다. 아이는 내게서 빼았은 잔을 홀짝이며 매끄럽게 뻗은 속눈썹을 나를 향해 당돌하게 깜빡였다. 그 순간 나는 어디선가 분명 이 애의 목소리 같은 것이 천진하게 웃는 것을 듣는다. 실제로는 여물어 농익은 체리같은 입술에 웃음이 비집고 나올 틈은 없었다. 나는 다만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깔끔히 다물린 채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냥 예뻐서."


그냥 있으면 패를 내놓을것 같지 않아 나는 먼저 베팅을 시도했다.


"아, 이 아저씨 선수 같은데."

"미안, 근데 너무 예뻐서 쳐다봤어. 그리고 나 아저씨 아니야."


한 번 더 내 몫을 걸었다. 그러자 웃는다. 다물린 껍질이 알맹이를 터트리듯,사방으로 웃음소리가 번졌다. 웃음은 생각보다 값이 쌌다. 그렇다고 어여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름이 뭐야?"

"알아서 뭐하려고."

"불러주고 싶으니까 그렇지."


이름은 조금 더 비쌌다. 아마도 그것이 그 아이가 흥정하는 방식인듯 했다. 사랑인듯, 연인인듯, 꽃인듯. 그 어느 것도 아니면서 그 모든 모습을 내게 하나씩 보여주니 나는 마른 껍질 속에 박힌 알맹이가 무척 탐이났다. 목 마르지 않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새로 칵테일 한 잔을 더 주문하고 웃는다. 백건. 하고 그 애가 이름을 톡 던진다. 이번엔 순진한 아이처럼. 그러나 빨갛게 익은 입술을 보고 있으니 내 방 서랍 안에 놓여있을 비타민제가 문득 생각났다. 그걸 쓸 수 있으면 좋을텐데. 


 동그랗지만 각이지기 시작한 어깨 너머로 해가 기운다. 붉고, 노란 햇살이 하얀 그 아이를 적신다.나는 황홀하게 바라본다. 물론 상냥하고 다정하게 이름을 속삭이는 것을 잊지 않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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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은 가시덤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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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씨의 이름은 청가람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오랫동안 마을을 지배해왔던 어느 유서 깊고 대단한 가문의-옛날부터 대대로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이름 깨나 있는 집안으로, 현재 마을 일대의 전답과 산림 대부분이 가문의 것일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지요-마지막 일원으로,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후 슬픔에 빠져 새로이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댁 무남독녀 외동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곧 둔덕 위에 자리 잡고 대대로 마을을 굽어보던 대저택과 그들 가문의 완전한 몰락을 의미했습니다.


 이윽고 소식을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모여들었지요. 마을이 떠들썩해졌습니다. 노인. 중년, 젊은이들. 그리고 어린아이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는 사람들이 장례식을 마치 오랜만의 축제인 양 기다리며 덩쿨에 감긴 그 집 높은 담장 주변을 기웃거리고는 하였습니다. 그 가문의 찬란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이들은 그것이 마치 그들의 것이었던 것처럼 여겼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한탄했습니다. 젊은 남자들은 그림처럼 예뻤던 젊은 아가씨의 죽음을 슬퍼했고, 마을 처녀들 또한 호들갑을 떨며 그 죽음을 입에 담았지요.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그 젊은 아가씨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던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오랫동안 감히 넘볼 수조차 없었던 담장 너머의 세상이 궁금했던 것이지요. 저택을 둘러싼 소문은 오랫동안 무성했습니다. 오래 전, 그녀의 아버지가 죽고 난 뒤 아름다운 모녀가 집의 대문을 걸어잠근 바로 그 때부터요.사람들은 스스로의 막연한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그 소문들을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설마 그럴 리 있겠냐고 스스로 허황되었음을 알면서도 그것이 사실이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제일 먼저 눈독을 들인 것은 젊은 남자 의사였습니다. 어떤 관계인지 모르나 저택과 연줄이 닿아있는 또 다른 도시의 꽤 큰 가문의 도련님인 그는 빨갛게 머리를 물들이고 웃음을 흘리곤 하는 젊은 의사선생님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한 때 아가씨의 주치의로서 유일하게 그 저택을 들락거리던 외부인이였고 한 때는 죽은 아가씨와 혼인을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던 남자였지요.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그가 필시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번번히 그들의 기대를 빗나갔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여주인과 죽은 아가씨에 대해 물을 때면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웃으며 얼버무렸고, 자기는 아는 게 없노라고 더이상 캐묻지 못하게 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애매한 태도는 이윽고 의심의 불씨가 되어 또다시 저택에 대한 소문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축제처럼 기다려온 죽은 아가씨의 장례식 날, 사람들은 소문의 진상을 직접 확인하고자 모여들었지요. 개중에는 그 대단한 집의 문턱을 한번 넘어 보고자 했던 방문객도 더러 있었을 것입닏다. 그러나 식의 구색을 갖춰놓고도 그 의사는 물론이거니와 먼젓번 남편의 죽음 이후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던 그녀의 어머니조차 장례에 얼굴을 비치지 않은 채로 낯선 사람들에 의해 서둘러 형식뿐인 장례가 마무리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어떤 범상치 않은 예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함부로 입 밖에 꺼낼 수도 없으며 그 정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모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 죽은 청가람 아가씨에게 어떠한 비밀이, 그것도 아주 치밀하게 관여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입니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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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燦爛



붉은색 무성한 해를 등지고 길을 걸을 때면 발끝에 달라붙은 기다란 그림자가 저녁까지 끈질기게 뒤를 따라오고는 했다. 건은 바짝 고개를 숙인 채 도보 블록 위를 칸칸히 어설프게 쫒으며 길을 걸었다. 함께 걷고 있는 은찬과 다른 장난을 치기에 둘은 너무 지쳐있었고, 날씨는 너무 더웠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은 지루했기에 건은 혼자 할 수 있는 놀이에 제법 열중해 있었고, 때문에 처음 은찬이 부르는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자신은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는데, 건은 매일 지나쳐 가버린다. 은찬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다시 한 번 백건, 하고 불러본다. 건은 이번에도 듣지 못했다. 은찬은 그것이 못내 서운했다. 혹시 따라가지 않으면 뒤를 돌아 봐 줄까? 길 한복판에 오도카니 멈춰 선 은찬의 운동화가 건을 기다리며 수줍게 발끝을 들썩인다. 그러나 기다림은 오래가지 못한 채로 끝이 났다. 점점 멀어지던 건의 그림자가 자신을 지나쳐 이윽고 하얀 운동화 앞코에 아슬아슬하게 걸리고야 말았기 때문이었다. 은찬은 급하게 손을 뻗었다. 건아, 백건.


"...뭐야?"


 멀어진 어깨가 닿지 않아 옷자락을 쥐었다. 들린 티셔츠 자락 아래로 살짝, 곧게 뻗은 하얀 등이 보였다. 맨살에 닿는 더운 바람에 놀란 건이 곧바로 은찬이 쥔 제 옷자락을 획 낚아채며 몸을 움츠렸다. 동그란 두 어깨가 놀란 나머지 조금 숨 가쁘게 위아래로 들썩이고 있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나 은찬은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넋을 놓고 건을 쳐다 보기 바빴다. 미술관에 걸린 수채화의 주인공처럼 예쁜 백건이 바로 가까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자기 인형같이 하얀 건의 얼굴이 발간 해에 물들어 빛났고, 드물게 두 뺨이 붉었다. 그자리에서 도톰한 입술이 삐죽이는 앙증맞고 귀여운 모양을 본다면 누구라도 사랑스럽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체 뭔데?"

"...아냐..."


 그것은 그 자리에 단 둘이 동행하고 있던 어린 은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건의 얼굴이 낯설었고 예쁘게만 보여 가슴이 설레었다. 은찬은 구슬 같은 노오란 두 눈에 붙잡혀 움직이는 것은 커녕 제대로 말을 할 수 조차 없었다.


 건은 은찬의 뺨이 제 머리색만큼이나 붉어진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찬은 무언가 말을 할 듯 입을 달싹이더니,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건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해버렸기 때문에 건은 은찬에게서 아무말도 들을 수 없었다. 건은 제법 오랫동안 은찬을 기다려주었다.그러나 여름 해가 여전히 등 뒤에서 건의 여린 피부가 따끔거릴 만큼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고 때문에 건의 인내심은 그리 강하지 못했다. 더이상 길 위에 서있고 싶지 않았다. 휴, 한숨을 쉬며 건이 말했다.


"할 말 없으면 그냥 간다?"


 바로 그 때 은찬이 덥석 건의 손을 붙잡아 당겼다. 으으, 있잖아...! 은찬의 손바닥은 뜨뜻했다. 고개를 든 은찬이 건을 바로 보고 말한다. 


"전에 그거, 지금 해도 될까....?"

 

 조심히 허락을 구하면서도 은찬은 불안했다. 만약 거절당한다면 잔뜩 서운해질 것만 같다. 불현듯 올라오는 영문 모를 먹먹함이 있었다. 뺨이 붉어지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울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순간, 은찬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뜻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건은 대답없이 입술을 도톰히 부풀리고 있었다. 은찬의 손아귀에는 무심코 힘이 실렸다.


 대답을 피하며 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홍색으로 불타오르던 하늘은 어느새 맑은 보라색으로 변해있었고, 신비로운 색의 하늘은 불어오는 더운 바람과 함께 비밀스러운 일을 제안 받은 건의 어린 마음을 들뜨게 했다. 비스듬히 내리쬐는 골목은 개미새끼 한 마리 없이 조용하다. 그것은 둘만의 대화를 더욱 은밀한 비밀로 만드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은찬도 마찬가지여서, 둘은 조금 부끄러운 기억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그날. 한 풀 깊어지기 시작한 무더위에 더운 바람이 불고, 골목에선 우아하게 해가 지고. 그 때도 지금처럼 함께 걸어가던 와중에 불현듯 은찬이 고개를 내밀었다. 허락없이 들어온 살덩이가 입안을 누볐고, 한입 베어 문 아이스크림의 자취가 남아 있었던 탓에 시원하고 달콤했다. 그러나 조금씩 뜨거워졌다.가벼웠던 열기가 점점 버거워지고 어린 둘은 부끄러워졌다.


"...싫어?"

"싫은 건 아냐."


 건은 그 때와 비슷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손을 꼼질거렸다. 파르르, 은찬의 붉은 속눈썹이 해에 부딪쳐 투명하게 반짝이는 게 보인다. 건이 늘 거절하기 힘들게 만들곤 했던 것은 지금처럼 새카만 눈동자에 담긴 순수함 때문이었지만 건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순진한 건은 거절하는 방법도 모른다. 그래서 순하게 꼬리를 내린 은찬의 두 눈을 마주하고 선채, 붉어진 눈시울 앞에서 그저 그것이 꼭 제 잘못인 것만 같이 느끼는 것이다. 


"건아.응?" 


 어린 은찬은 그런 건을 알지 못했지만 조금은 영악했다. 꿈을 꾸듯, 울먹이듯, 둥글게 오므린 빨간 입술로 이름을 부른다. 손을 매만지며 애타게 부르고 매만진다. 


부끄럽고, 간질거리는 이름은 제 것 같지가 않다. 막연한 죄스러움에, 건은 눈꺼풀을 닫는다. 


그 순간 감은 눈꺼풀 안 쪽에서는 빨간 불빛 같은 것이 반짝였다.


"...대신, 빨리 하는 거다?"

"응."


 말갛게 하얀 얼굴 위로 비스듬히 햇살이 내리쬔다. 희고 섬세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은찬은은 조심히 발뒤꿈치를 들었다. 


먼젓번에 코끝이 서투르게 부딪쳤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수월하게 입술이 맞닿았다. 둘은 기억을 더듬듯 주름진 겉 입술을 서투르게 빨고, 이를 부딪치며, 안쪽 깊은 곳의 숨을 파먹었다. 몇번 입술을 부딪친 후 둘은 열에 달뜨기 시작했다. 숨이 차오를 무렵엔,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분홍색 혀가 서로의 틈새를 헤매며 엉키고 있었다. 입 속에서 뜨겁게 달구어진 침방울이 포슬포슬 흘러 넘쳐 턱을 적시고, 숨결이 하나로 섞인다. 그 때마다 둘은 아랫배 부근에서 올라오는 기분 좋은 뒤틀림을 느꼈다.


 그 이상야릇한 떨림은 둘의 입맞춤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어린 둘은 착각 속에서 허기를 느끼며 실제로는 고작 1분 남짓했을 시간 동안 허겁지겁 입술을 부딪쳤다. 땅을 딛고 곧바로 서 있던 발목이 서로 엉켰고, 볼록한 배가 우연히 맞붙었다. 파드득, 몸을 떨며.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건은 어쩌면 눈을 떴을 때 해가 져버려 밤이 되어 버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걱정과 달리 하늘엔 여전히 해가 떠 있다. 다만 끄트머리에 검푸른 어둠을 걸친 채 어느새 짙어진 보라색으로 변한 하늘이 둘의 머리 위에서 서서히 식어가는 햇빛과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




"이상해."

"나는 좋은데...."


하늘을 두고 말한 것이었는데, 은찬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손을 놓고 말한다. 미안해. 동그랗게 두 눈을 뜬 채, 건은 불그죽죽하게 달아오른 은찬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은찬이 울먹이고 허둥지둥 거리는 것을 본 적 없는 건에게 눈앞의 은찬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건은 그것이 조금 전 처럼 순전히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순진하게, 그것이 이미 휘둘리기 시작한 것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아직 어린 건은 서투르게 은찬을 달랜다.


"그....다음에 그거 또 하자."

"....진짜?"

"응."


 배고프다. 은찬의 손을 잡으며 건이 말했다. 밝아진 얼굴로 은찬이 손에 깍지를 낀다. 나는 네가 싫어할까봐. 건은 대답없이 걸었다.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은찬이 다시 자기가 아는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둘이 걸어가는 눈 앞에는 식어가기 시작한 노란 햇살이 비스듬히 비추는 광경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들어왔다. 푸르게 변한 하늘이 서편으로 붉은 해를 밀어내고 있었다. 밀려나는 노을과 함께 어느덧 완전히 그림자에 묻혀가기 시작하는 골목을 둘은 등진다. 소년들은 아주 느리게 걸었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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