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류石榴

카테고리 없음 2015. 8. 25. 00:19






석류 




껍질의 건조한 금빛이

어떤 힘의 요구에 따라

과즙의 빨간 보석들을 터뜨릴 때



*


나는 최근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호텔 1층에 자리 잡은 카페 창가에서 매일 해변에 나타나는 남자 아이 하나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는 이방인의 건조하고 밝은 색을 가진, 성숙과 미성숙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애매한 나잇대로 짐작되는 아이였다.  


막 각이 지기 시작한 얼굴과 몸에서는 어중간한, 그러니까 과도기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그것도 막 시작된 성장의 낌새다. 그래서 그 애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농익은 것을 보는 것보다 더 미묘한 충동을 일으키게한다. 그 아인 자기가 그렇다는 것을 잘 알았다. 


 매일 해가 질 때면 어김없이 해변에 나타나던 그 아이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약 한 시간 가량 해변을 맴돈 이후엔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와 함께 사라지고는 했기 때문이다. 동행은 날마다 다르다. 또래의 남자 아이일 때도 있었고, 나같은 청년일 때도 있었으며 중년 혹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기도 했으며 여러명일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마 모두 같은  것을 원했을 거다. 그랬음이 분명하다. 누구든 그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애의 하얀 얼굴이나 물 오른 가을의 황금빛 밀밭 같은 두 눈, 그리고 붉게 익은 팔다리와 모래밭을 꼼지락거리는 맨발이 사람을 미치게 했으니말이다. 


 나는, 아마도, 그애를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아이와 시선을 주고 받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 아이는 그 누구에게도 먼저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그 아이가 물가에 발을 찰박이며 일행과 함께 해변을 거슬러 사라질 때면 그 기다란 그림자와 함께 건조한 껍질같은 색을 한 샛노란 시선을 꼭 나를 향해 던져두곤 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나는 내가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이라고 생각했던 그 아이의 시선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믿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그렇게 느꼈다. 나는 그 애의 시선을  받았다. 그 애는 나를 본다. 그러나 그 아이는 늘  나에게 그 아쉬운 시선만을 남기고 떠나갔다. 매번 야속한 뒷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얼마나 비참하고 당혹스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점점 기이하게 뒤틀리는 나 자신을 느낀다. 나는 이제 내 충동의 본질을 스스로 알 수가 없다. 얇은 옷을 걸친 몸과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다리를 보고 있으면 막연한 첫사랑을 느끼고 설레이다가, 어리지만 분명 남자아이의 것인 등허리를 보고 있으면 그 애가 마치 내 품속의 애인같아 사랑스럽고 황홀하고 아찔해 끌어안고 키스를 하고 싶어졌고, 그러다 끝내 그것이 내가 아닌 어느 누군가의 팔에 둘러져 있는 것을 보면, 수십 수백 번 천박한 모습을 상상하고 그 애를 매도하며 채 성숙하지 않은 그 애가 두번 다시 소생할 가능성조차 없게 영영 내 손으로 꺾어 쥐고 흔들고 싶다고 생각하며 애를 태우기도 했다.


이제 그 애는 하루 종일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내게 작용하여 내 전부를 옭아매고 있었다. 나는 완전히 그 애에게 홀렸다. 사로잡혔다. 미쳤다. 나는 때때로 마치 내가 예전부터 그 애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낀다. 심지어 내가 그 아이와 유일하게 각별한 사이라는 착각이 든다. 그리하여 애틋함에 시달리며 목이 말라 갈망한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 그 애를 보기 위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매일 카페를 찾는 것이다. 나는 종일 창가 자리에 앉아 내가 그 애의 애인인 양 그 애를 기다린다. 기다림은 괴롭다. 그리고 해질녘, 내 괴로움을 끝내줄 시간이 오면 그 애가, 나의 소년이, 투명한 발목을 휘저으며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참을 수 없는 환희에 부풀어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한다. 그러나 다시금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해를 따라 서서히 잠겨가는 그림자를 볼 때면 또다시 목이 말라 갈망하며 슬픔에 잠겨 밤새도록 울고야 만다.



*



오늘도 나는 여느 때처럼 그 애를 기다린다. 기다리다보니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해질녘이 아닌 오후에 그 애가 나타났다. 그 아이는 물가를 거니는 대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제법 오랫동안 조용히 바라본다. 나는 시선을 느꼈지만, 모르는 척 했다. 상대를 정확히 겨냥하여 꿰뚫는 호기심 어린 눈빛에 사냥을 당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애 앞에서, 내가 바라던 그 애의 눈길과 관심 앞에서 나는 무심코 겁이났다. 목이 움츠러든다. 짧은 셔츠깃 위로 식은땀이 맺힌다. 그 위로 더운 바람이 불었다.


 그 아인 계속 그 자리에서 나를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낮은 자리에서 발갛게 타오르기 시작했을 무렵에, 나는 목이 말라 다급히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그런데 웨이터가 맥주를 가져다주고, 내가 팁을 건네고, 영수증을 확인하는 동안 그 아이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사뿐거린다기보단 성큼성큼 느긋하고 여유로운 발걸음이 나를 향한다. 걸음에 맞춰 심장이 뛴다. 곱게 갈린 조개와 모래 더미 위를 가로지르는 흰 다리가 이따금씩 백사장의 모래 틈 사이에 고인 웅덩이에 빠져 얄팍한 물비늘이 튄다. 그 때마다 우아하게 뻗은 그의 종아리가 함께 반짝였다. 나는 숨이 찼다. 그것은 누구라도 하는 짓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 아이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위험하고 아름다웠으니까. 


그러나 나는 유일한 구경꾼이었다. 그것을 다른 누군가가 보았다면 무척 화가 났을 테지만, 해변엔 사람이 없었다. 멀리 아지랑이처럼 하얀 두 다리가 눈 앞에서 흔들린다. 겨울에 뜨는 낮달처럼 그것은 현실감이 없다. 그래서 나는 넋을 놓고 그 애의 두 다리를 핥았다. 그리고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그러니까, 그 애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다가와 불쑥 고개를 내밀어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더운 살냄새를 맡으며 이곳 카페에 유리창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렇다. 여긴 동물원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왜 자꾸 쳐다 봐?"


목소리는 생각 이상으로 어렸고, 그것은 부드럽게 귓가를 구르다 톡 터져 허공을 배회한다. 비눗방울 같다. 생각했던 것보다, 직접 대면하는 순간은 그리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애가 내게 다가오던 때가 떨렸다. 나는 벌써 막연하게 여겨지던 그 아이가 수월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 애가 이 남쪽 휴양지에서 볼 수 있는 흔해빠진 아이들처럼 굴지는 아니었다. 아이는 내게서 빼았은 잔을 홀짝이며 매끄럽게 뻗은 속눈썹을 나를 향해 당돌하게 깜빡였다. 그 순간 나는 어디선가 분명 이 애의 목소리 같은 것이 천진하게 웃는 것을 듣는다. 실제로는 여물어 농익은 체리같은 입술에 웃음이 비집고 나올 틈은 없었다. 나는 다만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깔끔히 다물린 채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냥 예뻐서."


그냥 있으면 패를 내놓을것 같지 않아 나는 먼저 베팅을 시도했다.


"아, 이 아저씨 선수 같은데."

"미안, 근데 너무 예뻐서 쳐다봤어. 그리고 나 아저씨 아니야."


한 번 더 내 몫을 걸었다. 그러자 웃는다. 다물린 껍질이 알맹이를 터트리듯,사방으로 웃음소리가 번졌다. 웃음은 생각보다 값이 쌌다. 그렇다고 어여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름이 뭐야?"

"알아서 뭐하려고."

"불러주고 싶으니까 그렇지."


이름은 조금 더 비쌌다. 아마도 그것이 그 아이가 흥정하는 방식인듯 했다. 사랑인듯, 연인인듯, 꽃인듯. 그 어느 것도 아니면서 그 모든 모습을 내게 하나씩 보여주니 나는 마른 껍질 속에 박힌 알맹이가 무척 탐이났다. 목 마르지 않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새로 칵테일 한 잔을 더 주문하고 웃는다. 백건. 하고 그 애가 이름을 톡 던진다. 이번엔 순진한 아이처럼. 그러나 빨갛게 익은 입술을 보고 있으니 내 방 서랍 안에 놓여있을 비타민제가 문득 생각났다. 그걸 쓸 수 있으면 좋을텐데. 


 동그랗지만 각이지기 시작한 어깨 너머로 해가 기운다. 붉고, 노란 햇살이 하얀 그 아이를 적신다.나는 황홀하게 바라본다. 물론 상냥하고 다정하게 이름을 속삭이는 것을 잊지 않으며.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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