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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6.06.09 은찬
  5. 2016.05.01 가장 자기 파괴적인 것들
  6. 2016.01.06 네가 내 이름을 부를 때
  7. 2016.01.05 ㅇㅅㅇ
  8. 2015.12.19 택시
  9. 2015.11.21 유곽 au
  10. 2015.11.21 엔드게임

찬가람

카테고리 없음 2016. 6. 10. 16:38

아가씨의 이름은 청가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마을을 지배해왔던 어느 유서 깊고 대단한 가문의-옛날부터 대대로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이름 깨나 있는 집안으로, 현재 마을 일대의 전답과 산림 대부분이 가문의 것일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지요-마지막 일원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죽은 후 슬픔에 빠진 아버지가 새로이 장가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댁 무남독녀 외동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곧 둔덕 위에 자리 잡고 대대로 마을을 굽어보던 대저택과 그들 가문의 완전한 몰락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모여들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으로 인해 온 마을이 떠들썩해졌습니다. 노인. 중년, 젊은이들. 그리고 어린아이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는 사람들이 장례식을 마치 오랜만의 축제인 양 기다리며 덩쿨에 감긴 그 집 높은 담장 주변을 기웃거리고는 하였습니다. 그 가문의 찬란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이들은 그것이 마치 그들의 것이었던 것처럼 여겼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한탄했습니다. 젊은 남자들은 그림처럼 예뻤던 젊은 아가씨의 죽음을 슬퍼했고, 마을 처녀들 또한 그 죽음을 입에 담았지요.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그 젊은 아가씨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던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오랫동안 감히 넘볼 수조차 없었던 담장 너머의 세상이 궁금했던 것이지요. 저택을 둘러싼 소문은 오랫동안 무성했습니다. 오래 전, 그녀의 아버지가 죽고 난 뒤 아름다운 아가씨가 집 대문을 걸어잠근 바로 그 때부터요. 사람들은 스스로의 막연한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그 소문들을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설마 그럴 리 있겠냐고 스스로 허황되었음을 알면서도 그것이 사실이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최근 아가씨와 추문이 돌았던 젊은 남자 의사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댁 아가씨와 어떤 관계인지 모르나 의사는 저택과 연줄이 닿아있었고, 또 다른 도시의 꽤 큰 가문의 도련님이었습니다. 그 가문은 대대로 아가씨 가문과 연줄이 있던 집안이고, 아버지가 죽은 후 가문의 저택과 전답 모두를 그 가문 어른들이 대신 관리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허울 좋은 이야기일뿐 실상 힘없는 어린 여자아이 앞으로 딸린 재산에 눈이 멀어 그것을 빼았나 간 것이었죠. 남자는 청가람 아가씨와 결혼해서 그 재산을 합법적으로 자기 가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내려온 사기꾼이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니 아가씨가 죽자 한 때 마을 사람들은 아가씨의 주치의로서 유일하게 그 저택을 들락거리던 외부인이였고 한 때는 죽은 아가씨와 혼인을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던 남자에 대해 사람들은 그가 필시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가씨의 유언장이라고 공표된 그것에도 모든 재산을 주은찬 그 사내에게 주겠노라 적혀있었고 실제로 그가 재산을 현물로 바꾸기 시작한든 소문이 장물아비들 사이에서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의심은 커져갔습니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이 남자가 큰 도둑질을 하게 되는 지 흥미롭게 기다리는 듯 했습니다.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남자를 닥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번번히 그들의 기대를 빗나갔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죽은 아가씨에 대해 물을 때면 친절한 얼굴로 웃으며 자기는 아는 게 없노라고 더이상 무례하게 캐묻지 말라며 사람들을 쫒아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애매한 태도는 이윽고 의심의 불씨가 되어 또다시 저택에 대한 소문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축제처럼 기다려온 죽은 아가씨의 장례식 날, 사람들은 소문의 진상을 직접 확인하고자 모여들었지요. 개중에는 오랫동안 이 지역 유지였던 가문에 대한 이유모를 향수와 충성심을 불태우며 후안무치한 남자와 그 가족들이 어떤 뻔뻔한 짓을 하는지 지켜보겠노라 성을 내는 이들도 있었고, 가십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또한 그 대단한 집의 문턱을 한번 넘어 보고자 했던 순박한 방문객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척이라고는 한명도 없는 그녀의 장례식은 참으로 쓸쓸했지요. 그 젊은 의사만이 그나마 조용히 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벌써부터 남자의 가문 사람들이 몰려와 재산을 두고 목소리를 높이는 광경도 볼 수 있었습니다. 낯선 사람들에 의해 서둘러 형식뿐인 장례가 마무리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아가씨를 불쌍해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이 끝날 무렵 분위기가 이상해졌습니다. 사람들이 헌화를 끝내고 관뚜껑에 못질을 할 무렵에, 어디선가 나타난 아가씨와 꼭 닮은 소년 때문이었습니다. 유령처럼 나타난 소년을 보고 처음엔 아가씨로 착각한 사람들이 겹을 집어먹고 장내가 소란스러워졌습니다. 거들먹거리던 남자의 가족들도 당황한 눈치였지요. 소년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사람들 가운데로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소년의 걸음걸이를 지켜보며 호기심을 불태우며 조용해졌습니다. 누구인지 모를 이 소년의 얼굴도, 신경질적이고 꼿꼿하고 자태가 참으로 죽은 아가씨와는 물론 이전에 죽은 그녀의 아버지와도 많이 닮아있었가때문입니다. 모두가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가운데 조용히 있던 남자가 다가와 소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다정하고 상냥한 얼굴로 소년의 어깨를 쥐고 친근함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소년이 죽은 아가씨의 먼 친척이라는 이야기를 했지요. 그 순간 사람들이 뒤집어졌습니다. 웅성거림이 끊이질 않았죠. 그러다 째지는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남자 뒤에 있던 그들의 가족이 이건 말도 안된다며 소리쳤습니다. 탐욕에 눈이 뒤집힌 이들이 작은 소년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했습니다. 소년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아니. 할필요가 없었지요. 소년을 향한 상스러운 욕을 남자가 나서서 잠재워주었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소년이야말로 이 가문의 일원으로서 아가씨가 남긴 가문의 모든 유산에 적법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앞장서서 자기 가문으로 재산을 빼돌린다고 믿던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어찌되었든 소년은 이 위대한 가문의 일원임이 너무나도 틀림없어 보였고, 사기꾼인 줄 알았던 남자가 소년의 곁에서 다정한 보호자가 되어 그를 비호하고 나섰으니까요. 결국 남자의 가족들은 물러나야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소년을 향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며 탐욕스럽게 재산에 눈독을 들이던 그들의 모습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들의 이야기는 아주 오랫동안 이 지역 사람들에 의해 두고두고 놀림거리로 회자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출신만은 확실한 그 소년이 도련님이 되어 모든 권리와 의무를 되찾으면서 가문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거기엔 남자의 공이 컸지요. 사람들은 여전히 남자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어찌됐든 이 집안의 땅을 빌어 먹고 살던 이들은 남자의 양심있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꼴사납게 거들먹거리돈 경성 부자들이 이 가문을 채가지 않아 다행이라며 안도했습니다. 사람들은 아가씨를, 그리고 그 가문을 동경하고 그것의 오랜 영광이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여겼던 것처럼 그 도련님을 호의로 환대했습니다.

소년. 도련님은 얼마 있지 않아 동경으로 유학을 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느 화창한 여름, 무더위가 찾아오기 직전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역사에서 말단으로 일하던 청소 직원이 도련님이 큰 가방을 들고 떠나는 걸 보았다고 했습니다. 곁에는 빨간머리 남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일등칸에 탔고 같은 칸에 탄 누가 행선지를 묻자 동경으로 갈거라고 이야기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건 기차는 부산행 상행선이 아니라 경의선 방향의 하행선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날 이후 도련님은 남자와 함께 저택을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소식은 들을 수도 없었지요. 그리고 그 큰 저택은 점점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한 채 과거의 영광스러운 역사와 함께 조금씩 시간과 함께 바스라져 그 누구도 찾지않는 쓸쓸한 폐허로 남아 자리를 지키고 딨답니다.


에필로그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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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백건

카테고리 없음 2016. 6. 10. 15:46

잊혀진 계절에는 달이뜬다.



나는 계속 네 꿈을 꿔.

꿈은 언제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시작돼. 우리가 같이 저녁을 먹고, 주은찬 몰래 네 방에서 이불을 깔고 누워 있으면 너는 아무 말 없이 내 손만 잡고 있고 나는 네 품에 기대서 한복 옷자락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부드럽게 밀려오는 졸음에 취하던 바로 그 시간이야. 그래. 겨울. 바로 그날 말이야. 겨울이라 바깥엔 눈이 내려. 겨울밤은 참 차갑고 춥지. 사정을 봐 주는 법이 없어서 문을 꼭 닫아놔도 낡은 찻집 바깥에서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소리가 문틈을 찢고 들어와. 그래서 추운 걸 싫어하는 나는 언제나처럼 널 안고 같이 이불을 덮고 따뜻한 바닥에 배를 깔고 나른한 기분으로 누워있어. 그대로 우린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다 또 스마트폰을 뒤적이며 게임에 빠져 키득거리며 웃지. 아주 평화롭지? 그렇지만 그 날은. 그 꿈에선 잘 시간이 되면 내 옆에 누워있는 네가 조용히 중얼거리는 거야.

잊혀 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나는 꿈에서 계속 그런 질문을 받아. 하지만 처음엔 그 말을 듣지 못해. 아마 그때도 똑같이 나는 제대로 듣지 못했을거야. 네 목소리가 워낙 작기도 작았거니와, 혼잣말을 하는 듯해서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말을 듣지 못한 나는 꾸벅꾸벅 졸면서 내 할 일만을 하고 있지. 네가 다시 한 번 내게 물어와. 그러면 나는 이상하게 낯선 기분이 들어서 일어나 너를 쳐다봐.

일어나서 너를 보며 무슨 소리냐고 묻지. 너는 조용히 이불 위로 두 손을 단정하게 포개고 베개를 베고 누워 있어. 아주 얌전히. 네가 늘 잠드는 바로 그 자세 그대로. 드리고 또렷하게 뜨고 있는 까만 눈으로 조용히 나를 봐. 그리고 대답해 달라고 하지. 너는 언제나 그 눈을 통해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말해주지만 그때 네 눈은 언제나 너무나도 불안하고, 내가 미처 알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해. 왠지 네가 울것 같다고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러다보니 나는 조금 불안해져. 눈앞에 네가 선명하게 있는데도 너는 이상하게 흐릿하고, 너의 목소리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같아. 아니 그것보다 훨씬 멀어. 넌 꼭 유령이나 연기처럼 아주 희미하게 느껴져. 내 옆에 누워 있는 네가 사라질것만 같다는 걱정을 하지.

그래서 왜 그런지 고민하기 시작해.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 하루를 곰곰히 되짚어보는거야. 사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짓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러다가 문득, 평소 같지 않던 오늘 네 행동들이 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떠올라. 너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하던 수련도 하지 않고 무작정 내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왔지. 날 끌어안고선 학교에 가지 말라며 이상한 투정도 부렸어. 결국 같이 잠들어버려서 청룡한테 잔소리를 들었고 결국 난 아침에 학교를 안 갔어. 하루 종일 너랑 있었지. 생각해보니 그때도 넌 좀 이상했어. 평소처럼 멍청한 소리나 얄미운 말은 하나도 하질 않았거든. 기억은 잘 안나지만. 어쩌면 네가 나한테 뭔가 이야기 하고 싶었던걸지도 모르는데.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걸. 그리고 내가 멍걸이 데리고 너한테 장난 친 거 기억해? 근데 개라면 질색하고 눈길도 안 주던 네가 멍걸이를 안고 쓰다듬었단 말이야. 심심해서 같이 수련하는데도 자꾸 실수 하고, 멈칫거리면서 먼 곳만 바라보고. 나랑 대련할땐 때리지도 못하더라. 결국 내가 재미 없다고 관둬버렸지만. 그리고 너. 지겹도록 챙겨 보던 우리 누나 드라마도 안 보고 저녁 먹기 전에 산책이나 하자면서 동네 한바퀴를 다 돌았지. 날이 무지 춥고 바람도 많이 불고 했는데도 말이야. 걷는 동안 네가 내 손을 계속 잡고 있어. 평소에 그런 간지러운 짓은 하지 않는 게 우리 사이인데 말이야. 까무잡잡한 네 손은 나 못지 않게 크고, 뜨겁고. 게다가 하도 꽉 잡아서 땀으로 미끌거렸어. 생각해보니까 너는 계속 뭔가 말 할고 했던거 같아. 결국 하지 않았지. 대신 골목 앞에서 나한테 키스 했어. 아주 짧게. 이건 꿈에서도 자꾸 생각나더라. 좋았나봐. 아무튼. 이것저것 생각 해보니 하루종일 네 행동이 이상했다는 걸 깨달아. 그러니 네가 했던 이상한 질문과, 이상하게 흐릿하고 멀게 느껴지는 네 모습과 그것들이 겹쳐져서 나는 당장이라도 네가 사라질 것만같다는 불안을 느끼는거야.

도대체 그딴 걸 왜물어봐?

그래서 불안한 나머지 난 조금 화를 내면서 물어봐. 너는 말없이 날 바라보지. 여전히 네 눈은 새카매. 너무 까매서 내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너는 나를 바라보다, 천장 위로 고개를 돌려.그리고 이렇게 말해.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줄까요.

그건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야. 너는 그냥 네가 할 말을 계속하지. 그렇게 끝도 전혀 올라가지 않은 단조로운 어투의 물음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해. 물론 꿈속에서. 아마도 그 당시엔 그것보단 조금 짜증나고 답답했을 뿐일거야. 초조해진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네 어깨를 잡아.

갑자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데 그래? 무슨일인지 말을 하란 말이야. 그때 새카맣고 깊은 네 눈동자가 그런 나를 바라봐. 반질반질한 네 눈동자엔 다급해하는 내 모습만이 비쳐. 나는 너랑 눈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네 시선은 미묘하게 빗겨나가 좀처럼 맞닿지를 않아

그러면 나는 갑자기 아아, 이건 이별이구나 하고, 슬픈 기분을 느껴. 너는 여전히 내 옆에 누워 있었지만 그런 확신을 하는거야. 엇갈리는 시선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우리 사이에 완고하게 둘러쳐진 벽의 존재를 느껴. 네가 나한테 벽을 치큰 거지. 그게 참 쓸쓸해.

그렇게 꿈이 진행이 되면 그 시점에서 내가 꼭 떠올리는 기억이 하나 있어. 아주 오래 전, 너랑 같은 방을 쓰는 주은찬이 내게 말해주었던 일이지. 주은찬은 네가 가끔 집에 간다고 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한참동안 찻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 앞에 서있는 걸 봤다고했어. 머뭇머뭇 거리던 너를 자기가 한 번 안으로 데려 온 적이 있었대. 그리고 그런 날이면 잘 시간이 훌쩍 넘었는데도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마루에 앉아 있노라고. 나는 그 이야기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너한테 물어보지는 않았어. 가끔 그런 밤에 네가 내 방문 앞에 서성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도 있지만 한번도 나와 본 적은 없어. 알다시피 우리 사이가 그렇게 다정하고 간지러운 건 아니었잖아? 나는 그게 네 문제라고 생각했어.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고. 우리는 그럴만한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가끔 보이는 너의 어둡고 지친 모습은 너네 집안 문제라고 짐작했을 뿐이고. 우리 같은 입장에 있는 아이들이 으레 집안과 겪는 그럼 문제들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는 누워있는 네 앞에서 그렇게 후회를 해. 한 번이라도 내가 너에게 너를 괴롭게 하는 것들에 대해 물었더라면. 네가 지쳐 돌아온 그날 밤 먼저 널 부르고, 네 손을 잡고. 너를 안아 줄 수 있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수 만 가지 가정과 상상이 밀려들어. 변명은 그만 할게. 그냥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게 나는 낯설고 부담스러웠을 뿐이야.

그렇게 행복하게 시작하던 평화로운 내 꿈은 모든 걸 내려놓고 이별을 결심하는 네 앞에서 산산히 부서져.

내가 기억해줄게. 거북이같이 오래 걸리면 좀 짜증나긴 하겠지만. 어쨌든.

그리고 붙잡을 자격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말해. 정작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걸 알아. 나는 니가 답답해서 그냥 짜증을 냈고, 너는 내게 잘자라고 했어. 그렇지만 꿈에선 너한테 꼭 그말을 해야할거 같아서 나는 네 꿈을 꿀때마다 너한테 그렇게 말해. 기억 하고 있을게. 잊지 않을 게. 내가 기다리고 있을 게. 너한테 꼭 그말을 해야할거 같거든. 그렇게 내가 약속을 하면 조금 안심이 돼. 네가 웃거든. 그렇지만 네 얼굴을 아까보다 훨씬 슬프고 쓸쓸해. 나는 그렇게 꿈에서 매번 네가 이미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곳에 있음을 깨달아. 너는 그냥 내 손을 잡는다. 같이 자요. 그렇게 말하지. 나는 네 손을 깍지 껴 잡아. 너는 일찍 눈을 감아. 나는 계속 눈을 뜨고 네 얼굴을 하나하나 내 눈에 새겨 넣으려고 해. 널 기억하는 연습을 하는 거야. 까만 머리카락, 단정한 눈매와 속눈썹, 시원하게 뻗은 콧날과 다물어진 입술. 어느 것 하나 놓치기 싫어 샅샅이 살피는데 그러다 갑자기 네 목소리가 기억이 안나. 차마 널 깨울수는 없어서 네 목소리가 어땠는지 생각하는동안 아까운 시간은 계속 흐르고, 하늘에 뜬 달이 기울고 달에 비친 내 그림자가 점점 짧아져 가. 나는 불안해져. 내가 널 기다리는 동안 네 목소리를 잊어버려 네가 나를 불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아닐까?


백호공자.


그 때 어김없이 네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가 잠들어버린 줄 알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란다. 너를 바라보면 깊이 잠든 네가 어느새 네가 눈을 뜨고 그 까만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네 목소리가 기억이 난다. 너는 이 밤, 드디어 처음으로 나와 눈을 맞춘다. 어긋나가지 않고 마주치는 시선이 기뻐서 나는 처음으로 네 이름 두 글자를 불러.


정말 나를 기억해 줄 건가요?


네가 묻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기억하고 있을게. 절대 잊지 않을게. 계속 그렇게 약속한다.

나의 달. 그렇다면 기다려주세요. 시간이 얼마나 흐르더라도 돌고 돌아 곁으로 돌아올테니.

그러면서 네가 내게 키스해. 꿈은 너와 함깨 조각조각 흩어져 공간이 갈라지고 네가 멀어져. 검은 눈동자에 가득 비치던 내 모습은 흐려지고 너도 흐려지지. 물살이 일어 조각배가 흐트러지듯 눈앞이 잠시 일렁이다, 검은 파도가 밀려와 모든 것을 집어 삼켜. 나는 눈을 떠. 다시 눈을 뜨면 익숙한 내 방 천장이 보여.


그런 꿈이다.

약속을 했기때문에 나는 너를 기다려. 하지만 꿈속에선 선명히 기억이 나는 얼굴도, 목소리도, 이름도 전부 다 꿈에서 깨어나면 기억이 안나. 그런데도 너를 기다리고, ‘너’를 내가 잊지않고 기다리겠다 약속하는 그런 꿈을 매일 꿔. 그런 꿈이야.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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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찬백건

카테고리 없음 2016. 6. 10. 13:19

"수아누나, 너 좋아하는 것 같더라."

그 목소리는 어딘가 음침한 구석이 있었다. 백건은 깜짝 놀라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반짝거리던 눈으로 은찬을 살핀다. 그러나 기분이 나쁜건가 싶어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은찬은 더이상 뭐라 말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잠시 청소하던 것을 멈추고선 대걸레를 받쳐 잡고는 턱을 괘고 있었다. 새카만 두 눈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창고 안을 반쯤 물들여놓은 어둠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로 은찬의 눈은 몹시 검었다. 아래로는 그늘이 져 있어 백건이 아무리 애를 써도 나머지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백건은 한발자국 떨어져 주은찬을 본다. 그림자에 뒤덥힌 주은찬은 형태가 또렷하지 않았다. 꼭 어둠에 녹아있는것 같다.

"뭐, 그런가보지..."

불안했다. 불안해서 괜히 수선을 떤다. 평소라면, 자주 그렇게 하듯이 조금은 밋밋한 그 외모를 놀리면서 잘난 척, 장난을 걸어 볼 텐데, 그는 이제 은찬에게 어떤 식으로 대답하는 게 좋은 지 알 수 없다. 단지 그런 것은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찬은 아주 잠시 고개를 돌려 건을 바라본다. 건은 간신히 은찬의 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은찬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꼭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다가, 은찬은 다시 밀대를 잡는다. 바닥을 닦는다. 질척하게 젖은 물소리가 바닥에 부딪쳤다. 철퍽철퍽. 앞뒤를 오가는 움직임은 묘하게 절도있고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후덥지근했던 창고 안이 물걸레질로 더 습해진다. 축축한 기분이. 불안하고 불편한 감정이 천천히 발밑에 휘감긴다. 은찬은 역시 화가 난 게 분명하다.

"유나비한텐 왜 그렇게 말했어?"

이번엔 도대체 뭐가 문제야? 백건은 당장에라도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은찬의 입술을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을것처럼 일자로 다물려있다. 바닥에 문대어 지는 젖은 물소리는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걷어붙인 셔츠 소매 아래로 은찬의 각잡힌 팔뚝이 보인다. 힘이 실려 앞으로 뻗어가다 다시 뒤로 물러난다. 그때마다 대를 쥔 손과 팔에 얕게 힘줄이 돋는다. 큼지막하고 마디가 깔끔한 손과 오목한 팔목과 직선으로 뻗은 팔을 지나쳐 그 어깨에 이르는 곧은 선은 굵지 않지만 비실비실 하진 않았다. 오히려 남자다웠다. 백건은 남자다움으로 빚어진 그 선에 잔뜩 힘이 실리던 때를 기억한다. 은찬의 팔은 거침없이 뻗어와 언제든지 그가 백건을 끝장낼 수 있다는 걸 알려줬다. 조금 예민하고, 섬세하고, 그래서 질투를 하지만 결국 다정한 줄로만 알았던 주은찬이 목을 조르던 때 백건은 그것을 깨달았다. 단 한 번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사실 가장 위험한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주은찬이 그에게 달려들어 짓눌리고 잡아채여 숨이 막혀 아찔했던 순간.


"너무 예뻐서 그런가."
"...."

너무 예뻐서. 두둥실 떠오른 목소리가 부드러웠지만 더이상 백건은 안심할 수가 없었다. 하긴, 어쩔 수 없을 법도 하다. 네가 이렇게 생겼으니까. 은찬이 그렇게 말하며 넓적한 손으로 백건의 뺨을 더듬는다. 손은 뜨뜻했고 땀으로 젖어 미끌거렸다.

"차라리 이렇게."

쿡. 은찬이 손톱으로 뺨을 누른다. 손톱은 아프게 파고 들어 금방이라도 살을 후벼 팔 기세였다. 백건은 굳은 얼굴로 은찬을 내려다 보았다. 은찬은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백건을 보지는 않는다. 은찬의 눈은 아까와 같이 초점 없는 까만눈이았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이 은찬의 눈동자 속은 까마득한 어둠으로 가득했다. 여기서, 여기까지. 조금 보기 흉해지면 괜찮을까? 은찬은 그렇게 말하며 건의 뺨, 그리고 입술. 목. 어깨. 얇고 단단한 손톱으로 긁고 내려간다. 송곳처럼 낙인을 새겨넣는듯한 움직임으로 천천히 내려간다. 그리고 목을 쥔다.

"...주은찬"

백건은 더듬더듬 은찬을 불렀다. 응, 건아. 아직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목을 쥐며 은찬이 대답했다. 백건은 작게 숨을 뱉으며 몸을 떨었다. 그러지마. 은찬은 백건의 목소리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은찬이 발 뒷꿈치를 들어 부릅뜬 눈가에 입을 맞추고 안경알 위를 핥는다. 도수없는 유리알이 침으로 질척하게 젖는다. 키스할때처럼 유리알을 닦아대는 혀가 징그러웠지만 백건은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간 성난 은찬에게 눈알 하나가 통째로 파먹힐 것 같았다. 주은찬이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괴한 공포가 백건을 짓눌렀다.

"앞으로 또 헤프게 흘리고 다니면 가만 안 둘거야."

은찬은 연인처럼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내며 말했다. 눈은 더 이상 생각에 잠겨있지 않아고, 오히려 기쁨과 행복에 겨워 반짝이며, 백건을 향해 은찬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답 해."
"응..."
"착하다."

백건은 겁을 먹은 채 대답한다.

"사랑해."

이번엔 꼭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이 먹먹한 목소리였다. 동시에 축축한 입술이 침을 흘리며 건의 입술을 짓눌렀다. 다음엔 혀가 들어와 입안을 온통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백건이 숨을 토해낼 때마다 은찬이 게걸스럽게 그것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숨이 막히고, 아. 숨을 쉬려고 하면. 숨을 쉬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도록 단단히 끌어안고 키스해버려서. 백건은 몸부림 쳤다. 둘의 몸이 미끄러은 바닥 위를 구른다. 우당탕탕. 창고 선반 물건들이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를 부딪친 백건은 가벼운 뇌진탕 같은 걸 느끼며 은찬을 올려본다. 머리는 멍한데 은찬이 허겁지겁 옷을 벗기고 있었다. 은찬은 빠르게 건의 옷을 벗긴 다음 백건의 엉덩이에 자신의 성기를 가져다 댔다. 백건은 몸을 꿈틀거리며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이미 반쯤 젖어있는 것이 엉덩이엔 질척하게 문질러지고 있었다.

"잠..잠깐만 갑자기 왜이러는-악. 싫어. 싫어 주은찬!"
"그런게 어딨어. 사랑한다고 했잖아"
"미친. 하지마!하지말란 말이야! 아악!"

백건은 비명을 지른다. 잘 짜여진 전신의 근육들도 한꺼번에 뒤틀리며 같이 비명을 질렀다. 은찬은 쉴새없이 움직였다. 등허리가 뒤틀리고, 휘고. 그러는 동안 뜨겁고 좁은 공간은 조금씩 넓혀지더니, 어느새 씹어 먹을 것처럼 깊은 안쪽으로 살덩이를 끌어 당기고 있었다. 싫어. 싫은데. 아. 그렇지만 기분은 좋고.

그 짓을 하는 동안 몸의 자세는 몇번씩 바뀌었다. 은찬은 백건의 뒷목을 잡고 누르며 숨을 쉬듯 움찔거리는 그 구멍의 틈새로 성기를 박아 넣고 있었다. 백건의 허리가 잘게 떨리며 짐승처럼 앞으로 쭉 뻗는다. 몸이 밀리고, 젖은 살덩이가 잔뜩 주름 진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밀려나고 하얀 등이 뒤틀렸다. 은찬은 허리만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성기가 쉬지 않고 몸 안을 드나들고 있었다. 까슬한 털이 엉덩이에 비벼질 때 마다, 퍽퍽 치대는 소리가 날때마다 거품이는 소리가 나서 백건은 견딜 수가 없었다.

"흐응,아..아읏. 윽. 아앙! "
"어떡..흐,누나가, 너, 진짜로...좋다 그러면,...아. 나믄 어떡해...하아..기분 좋아.. "
"아니,..아흐,,,으...나..나는...아..힉..!응...!"

삐걱삐걱 흔들리던 몸이 바닥에 무너진다. 씨발, 은찬이 그렇게 욕을 하며 허리를 부여잡고 허릴 찧어댔다. 이렇게 예쁜데,응, 함부로 흘리고 다니면 어떡해.

"아, 아아...흐...주은차아안...!"

절정으로 치닿을것 같은 순간에 은찬은 백건의 목을 졸랐다. 백건은 숨이 막혔다. 은찬은 그의 굵은 손가락 마디마디 모두 힘을 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몸부림치면 칠수록 은찬이 허리를 흔들며 박혀들어와 몸이 밀렸다. 사랑해. 너무 좋아. 하고 은찬이 자꾸 말하는 것 같았다. 백건은 계속. 계속 흔들렸다. 안경이 비스듬히 흘러 내려 렌즈와 맨눈의 시야가 섞여 보이는 세상이 이상했다.이상하다. 전부. 전부 다 이상해. 은찬은 더이상 주은찬이 아닌 것만 같았다. 자신도 더이상 자기 자신이 아닌것만 같았다. 은찬은 이렇게 하기 싫은 짓거리를 하고. 또 이렇게. 어쩌면 정말로 그를 죽일지도 모르는데. 그런데도 은찬은 좋았다. 은찬은 계속 사랑한다고 말해준다. 죽일만큼 사랑한다고. 무섭고 괴롭지만 싫지 않은걸. 아. 어떡하면 좋아. 백건은 때때로 은찬이 이럴 때마다 백건은 알 수 없는 뭔가가 있어서. 그건 어쩌면 나쁜 주술이나, 못된 귀신같은 것인데 바로 그것이 은찬을, 아니면 두사람 모두를 집어 삼켜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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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찬

카테고리 없음 2016. 6. 9. 22:59

사냥은 숲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요란하게 타악기를 두드리며 어지럽고, 그러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가장자리부터 불을 지른다. 정복에 앞서 화살을 쏴 첫 불을 내는 것은 족장의 역할이다. 주작의 정화 의식을 상징하는 부족의 오랜 전통이었다. 은찬은 족장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자 후계로서 모든 것을 참관해야했다. 그는 사람들 틈에 섞여 그의 이모를 바라본다. 그 순간에도 표정 하나 없는 조용한 얼굴이었다. 죽은 그의 어머니와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

끔찍하고 잔인한 여자. 그녀는 어머니를 죽였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의 새로운 가족을 쉽게 죽일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소중한 것들을 빼았아 간다. 마르고 낭창한 팔이 화살 하나를 집어 허공에 시위를 겨눈다. 은찬은 실의에 차 그 행동을 가만히 바라만 본다. 시위를 당긴다. 쏜다. 내려 꽃힌다. 땅엔 마법처럼 불이 타올랐다. 흥분한 구경꾼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발을 굴렸다. 그 소리가 너무 커 은찬은 잠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는 몇명인지 모를 사람들이 은찬의 어깨를 지나쳐 숲을 향해 달려갔다. 모든 게 다른 세계의 일같아서 은찬은 우두커니 서서 사람들의 등을 그냥 멍하니 쫒는다. 그 동안 그들은 숲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혼란을 틈 타 그가 달아난다고 해도 알아차리지 못할만큼 흥분해있었다. 지금 도망쳐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가서 아저씨한테 알려야하는데. 백건. 건이 그 애가 저기 있는데! 그러나 은찬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친다. 차마 등을 돌릴 수는 없었다. 숯은 멀어질 수록 잘 보였다. 아까까지 별이 반짝이던 밤하늘엔 더이상 별이 보이지 않았다. 새벽 여명이 밝아오는 시간처럼 하늘이 밝았다. 불화살은 계속. 많이. 아주 많이 튀어오르고. 꼭. 어머니가 죽던 날 처럼. 그녀가 은찬의 가족들을 죽이던 날 처럼. 꼭 그날의 한 가운데 있었던 어린아이가 된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중한 것들은 사라지고. 유성처럼 떠오른 불꽃이 아래로 아프게 내려꽃히고, 불타오르고. 숲이 삽시간에 붉어진다. 아프다. 아직 가을이 아닌데도 이렇게 타오른다.

이번 가을엔 삼촌한테 널 가족으로 받아달라고 말할거야.

해에 그을린 얼굴을 하고 분명 그렇게 말해주던 네가 사랑스러웠는데. 왈칵. 까맣고 동그란 눈엔 가득히 방울이 맺히고. 그러나 눈에선 불을 끄지 못할 만큼의 눈물만이 흐른다.

세상이 온통 붉고. 아프고.

"괴롭니?"

그 때 뒷걸음질 치는 은찬의 뒤에서 처음으로 듣는 목소리가 들렸다. 은찬은 돌아본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이제까지와 달리 황홀한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였다.

"저 네발 달린 것들은 언제나 우리를 이렇게 괴롭히는구나."
"..."
"그래도 덕분에 끝을 낼 수 있었어."
"잘못했어요.."
"아마 이제 편하게 그 사람 목에 대고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겠지."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이모님 잘못했어요. 제발. 제 친구가, 아니 좋아하는 애가 거기 있어요. 이러지 마세요. 다시 돌아갈게요. 말 잘들을테니까, 시키는 거라면 뭐든 할테니까! 은찬은 몸을 웅크리고 엎드려 제 이모의 발 밑에 대고 빌었다. 아이는 그것 외에 용서를 비는 방법을 모른다. 빌고 또 빌고-

여자는 다시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이 아프니?"

꼭 위로하는 것만 같이 상냥한 목소리였다.

"아가. 어차피 끊어질 인연이었단다."

그러니 너도 더 이상 쓸데없이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도록 하렴.


불은 아귀처럼 숲을 뒤덮어 사흘 내내 타올랐다. 숲에 사는 모든 것들을 태우고, 더이상 태울 것이 없어진 뒤에야 불은 사라졌다. 그곳에 살단 것들은 형태 없이 사라졌다. 하나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건 건과 닮은 백호족 족장의 시신뿐이었다. 이모는 그의 목을 베었다. 이제 몇 년 동안은 아무것도 뿌리내리기 힘들거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은찬은 재만 남은 자리를 몇달동안 찾아 헤맸지만 백건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커가며 죽은 어미와 가족들을 잊었던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 백건을 잊을 수 있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은찬의 마음은 점점 매말라갔다. 그는 더이상 웃을 수 없었다. 웃음을 잃어가는 얼굴은 죽은 어미보단 어머니의 자매를 닮아갔다. 백건을 잊을 수 없었다. 잊을 수 없는 한 웃지 못할것 같았다. 백건은 영영 잃어버리게 된 사랑이었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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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얼마 전에 읽은 기사가 하나 있었다. 사랑에 미쳐 현해탄에 뛰어든 불륜한 두 남녀. 단지 그것이 사실의 전부일 뿐일 사건을 두고 신문에선 낭만을 지껄이며 종이에 찍힌 활자들이 요란을 떨었다. 그런 가운데 현우는, 만약 경성에 있는 백화점 옥상 같은데서 뛰어내렸어도 그런 찬사를 받았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 했다. 


그들은 평화로운 주말을 보내고 싶었던 많은 사람들, 그리고 하필 재수 없게 그 둘의 터진 시체를 처리하게 될 경찰과 미화원의 원성을 사 죽어서도 욕을 먹을 게 분명했다. 죽음도 갈라서지 못한 사랑?세기의 비극? 현우는 자신이 해당 사건의 기사를 쓴다면 그들이 백화점 옥상이 아니라 배에서 바다로 뛰어내린 것이라고 해도 그런 제목을 붙여둘 것이다. 


불륜 남녀 선상에서 동반자살. 모두를 충격에 빠트려.

한여름의 이기적인 광인들. 

불륜에 미친 남녀 함께 자살.


 배에 타고 있던 다른 평범한 사람들이 졸지에 받게 된 충격과 실망과 분노를 수식어 없이 쓰고, 그 결과 신문에는 감성적인 동정론보다는 날카롭고, 동시에 천박하지 않지만 충분히 모욕적인 단어가 차분히 나열된 글이 실릴 것이다. 


 백건은 여전히 사랑에 미쳐 제 머리에 총을 갈긴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현우는 거듭 마른 목구멍 너머로 침을 삼킨다. 자꾸만 초조해지는 참이었다. 그는 백건에게 그가 만약 대가리 터진 사내의 시체를 발견하게 될 어느 재수 없는 그 집 하인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좀 더 내게 필사적일 필요가 있어. 내 존재의 소중함을 깨달아야한다는 말이지.”


백건이 말한다. 


“글쎄요, 우리가 서로 그렇게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였습니까.”

“네가 좀 더 열렬히 사랑하고 솔직해 진다면 또 모를 일이야.”

“지금 알몸으로 이야기 하는 것 이상의 열렬함과 솔직함이 어디 있나 싶습니다만”

“그래 네놈이 이렇지.”

"사랑은 내것이 아닐 때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법이죠."


건은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 나른하게 뻗어온 흰 팔이 현우의 팔뚝을 파고 들어 팔짱을 낀다. 곧이어  건의 밝은 색 머리칼이 그의 목덜미 주변을 간질인다. 현우는 어깨를 쓸다, 건의 뒷 목을, 그리고  툭 튀어나온 척추 뼈 몇개를 더듬으며 등까지 손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 손길에 건이 기분좋게 얼굴을 부볐고 그렇게 움직일때마다 건에게서는 살내음이 났다.

  

현우는 깨질뜻한 총소리가 머리를 관통하는 상상을 한다. 한여름 밤 손을 잡고 바다에 뛰어드는 건 어떤 느낌일까? 옥상에서 뛰어내린 몸뚱이가 무겁게 떨어져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퍽 하고 터진다. 여전히 낭만적이라기보단 끔찍했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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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내 이름을 부를 때








 어느덧 백건의 키가 내 가슴팍에 닿고, 그 애의 밝은 색 머리칼이 자꾸만 턱 끝을 간질이기 시작할 때부터, 그러니까 살결 보드랍고 동그란 어깨에 각이 지기 시작하던 바로 그 무렵부터 나는 백건에게 약을 투여했다. 더 이상 백건이 자라지 않게끔 하기 위해. 그리하여 언제나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나의 백건으로 영원히 예쁘게 내 곁에 남아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약물 주사는 정확히 백건의 오른쪽 팔뚝에. 정량대로 한 달에 한번. 그러나 백건이 주사를 싫어하는 탓에 매달 주사를 놓는 게 보통일은 아니었다. 백건은 뾰족한 주삿바늘만 보면 나를 향해 소리치고, 울고, 할퀴고- 덕분에 내 뺨엔 며칠 전 백건이 만든 손톱자국이 딱지도 채 앉지 못한 채로 남아있었다.


도대체 그 애는 왜 영영 예쁘게 남아있길 바라는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걸까? 내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해주는 지 백건은 아마 모를것이다. 섭섭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괜찮다. 참을 수 있다. 그 애도 언젠가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 지 알아 줄 테니까.


그러나 주사를 놓느라 실랑이를 벌이는 것보다 힘든 것은 약을 투여한 후 찾아오는 부작용이었다. 극히 소량만을 투여하는데도 백건은 자주 열이 올랐고 걸핏하면 토악질을 했다. 약 때문인지 잘 울지 않는 아이가 울며 변덕스러운 투정을 부리면 나는 그것을 받아주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힘든 건 백건이겠지만 나 또한 그 애 못지않게 마음이 몹시 아팠다. 지켜보는 마음은 괴로웠고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파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했다.


백건은 이대로, 나의 작은 백건으로 있어 주어야한다. 그래야 지금처럼 내가 언제나 백건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또다시 내게 꽃이 되어줄 아이를 찾아 헤매며 외로운 시간을 견뎌야한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내게는 사랑이다. 백건은 받아들여야한다. 나는 이것을 그만 둘 생각이 없다.





*


 


 집에 돌아와 보니 바닥이 엉망이었다. 백건은 몸을 웅크리고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카펫이 더러워진다. 그것은 내가 겨울을 맞이해 모처럼 백건의 방에 깔아준 물건이었다. 인터넷에서 산 싸구려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고민해서 고른 것이었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더럽히면 어떡해."



백건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엉망이 된 카펫을 보는 내 마음은 자꾸 섭섭해진다. 조금이라도 내 마음을 알아주면 좋을텐데. 그런 내 발 밑에서 백건의 작은 몸뚱이는 괴롭게 바닥을 기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 사이로 남은 것들이 울컥울컥 쏟아진다.


또 한 번 카펫이 더러운 얼룩이 졌다. 카펫을 세탁소에 맡겨야 하는 걸까? 혹시 얼룩이 지워지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 심각하게 걱정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백건은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울음을 터트렸다.



"아파. 주은찬, 나 아파!"



나는 그대로 울게 내버려두었다. 웩웩 토악질을 할 때 마다 하얀 등허리가 뒤틀렸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나는 백건에게 그 어떤 악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애를 내버려 두는 것은 단지 이 애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탓이다. 물론 백건이 이렇게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할 때 내 마음도 아프고 괴롭다.



그러나 나는. 건아,  네 괴로움까지도 사랑하고 싶어. 



네 괴로움마저 나는 사랑스러워 내 눈에 담아내지 않을 수 없다. 이 모습을 외면해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내가 나쁜 걸까? 아니. 그건 백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러운 네 잘못이지.




"주은찬..흑..주은찬. 주은찬."


백건이, 나를 부른다. 나는 백건을 본다. 예쁜 아몬드 모양을 한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문득 나는 그걸 내 손으로 닦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든지 백건이 이렇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오로지 자신의 이름만을 애타게 부른다면 사랑스러워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많이 아파?"



결국 참지 못하고 나는 백건을 끌어안았다.



"..목 아파. 토했어. 아파..."



물에서 막 건져낸 사람처럼 백건의 팔다리가 필사적으로 내 품에 안겨온다. 나는 움츠린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간의 울음이 역시 어리광이었던 건지 숨소리가 퍼진다.



"냄새나..."



 백건은 멎은 눈물대신 코를 훌쩍이며 킁킁거리더니 그렇게 말하며 귀엽게 코를 움켜쥐었다. 그 말대로 내게 안긴 몸에서는 토사물의 악취가 났다. 나는 백건을 안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이 나랑 씻을까?"



그렇게 묻자 작은 입술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오물거린다. 백건은 꼭 고양이들처럼 씻는 걸 싫어했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싫어? 백건은 꼬옥, 힘줘 내 어깨를 붙들고 고개를 젓는다. 착하다, 칭찬을 하자 백건은 내게 얼굴을 부볐다. 나는 동그란 머리를 한 번 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착해?"


백건이 되묻는다.


"응. 착해."


나는 대답했다.




*





 나는 아직 순진한 내 백건이 나를 상대로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알길 원하지 않았다.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영원히 순진한, 내 작은 백건.


그래서 나는 늘 백건의 옷을 갈아입히거나 씻길 때 나는 대단히 조심스럽다. 쓸데없는 말이나 행동은 삼가려고 하는 편이다. 그건 생각보다 꽤 대단한 인내심과 섬세함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나잇대의 되바라진 아이들과 달리 내게 알몸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백건을 위해서라면 참을 가치가 있는 일이다.



 백건이 나를 향해 두 팔을 위로 뻗어 만세를 했다. 나는 조심조심 더러워진 스웨터를 벗겨냈다. 아래는 입히지 않았기에 벗길 게 없었다. 완전히 어린아이도 아닌 어중간한 몸을 이렇게 거리낌 없는 애는 없지. 그런 생각을 하니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급히 수도꼭지를 열었다. 보일러를 틀어놓은 덕에 바로 온수가 나왔다. 물을 마른 몸 위로 끼얹는다. 물방울이 부딪쳐 젖은 몸이 매끄럽게 반짝였다. 나는 백건의 몸에 비누칠을 했다. 순진한 백건은 내 시선과 손길에 담긴 노골적인 내 욕심에도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저 비누 거품에 정신이 팔려있을 뿐이다.


나는 늘 그런 무지에서 내가 바래왔던 모습을 한 백건에게 사랑을 느끼고, 아래로 뻗는 짜릿함에 숨이 막히곤 했다. 발갛게 익은 몸은 말랑말랑하게 내 손안에 잡혀왔다. 나는 붉게 달아오른 뺨에, 목덜미에, 그리고 작은 어깨 전부에 입을 맞추었다. 밋밋한 양쪽 가슴을 쥐고 주무르고, 그리고 아직 아이답게 볼록한 배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백건은 이따금씩 몸을 움츠릴 뿐 싫어, 라던가 부끄러워, 라는 말은 할 줄 몰랐다.



"간지러워!"


그래서 장난에 집중한 나머지 백건이 별안간 그렇게 외쳤을 때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혹시 나와의 행위에서 이상한 점을 깨달아 버리면 어떡하지? 나는 마치 몰래 일을 꾸미다 어른에게 들킨 애들처럼 당황한 나머지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


"..건아, 싫어?"

"응? 아니. 좋은데."



곧이어 까르륵 명랑한 웃음이 터진다. 웃는다. 백건이. 그러더니 미끌거리는 손으로 내 양 빰을 쥐고 입술을 쪽 하고 맞부딪쳤다 떨어지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 이 애가 날 다 알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내 입술에 도장을 찍은 분홍색 입술 안에서 뾰족한 혀가 앙증맞게 파닥이고 있었다.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키스를 해본다. 작은 입은 평소처럼 내 혀를 사탕처럼 힘차게 빨고, 욕을 하는 대신 달디 단 침을 내 입안에 뱉어낸다.



"흐...응..,"


콧소리는 어린애가 잠에 뒤척이는 듯 한 그것이었다. 여전히, 어린애인 채로. 여전히 내 작은 백건인 채로 백건이 키스 해주고 있었다. 황홀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백건을 끌어안는다. 짧은 팔다리는 그대로 나를 안아준다.




 나는 흥분된 마음으로 내 성기 위로 백건을 앉혔다. 키스를 하는 채로다. 보드라운 엉덩이가 내 것 위로 닿는다. 내 열기를 느낀 백건의 혀가 둔해진다. 탁한 숨소리가 들렸다. 아. 넣고 싶다. 분홍색 알록달록한 내장에 내 성기를 집어넣는 상상을 하며 좆질 하듯 혀를 넣었다 뺐다 하며 장난을 쳤다. 아래로는 손가락을 두어개 밀어 넣고.



"으응..응.....주은,찬...,"

"아파?"



작은 입술이 동그랗게 하나로 모여 내 혀를 쏙 받아먹고, 빠져나가면 아쉬운 듯 움찔거렸다. 버거운 듯 들썩이는 어깨를 보니 더 사랑해주고만 싶다. 건아. 내 백건. 내가 그렇게 부르면 사랑스러운 울음소리가 내 혀를 빨다말고 입술에서 터져 나왔다. 백건은 곧 내 목덜미를 꽉 끌어안았다. 통통한 허벅지가 내 허리춤에 감겨왔다. 눈물 젖은 얼굴이 내 가슴팍에 문대어졌다. 꼭 재촉하는 것처럼.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백건을 품에서 떼어엎드리게 했다.


그건 내가 백건을 혼낼 때와 같은 자세였다. 백건은 아직 마주보지 않은 자세로 나와 섹스를 한 적이 없었다. 나는 결코 울릴 생각이 없었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백건은 벌 받는 아이처럼 울기 시작한 뒤였다.



"시..싫어..잘못..잘못했어요 주은찬 잘못했어요."



 그런 백건을 내려다보며 나는 잠시 백건을 강간하는 상상을 했다. 이 작은 몸을 내 손에 쥐고 흔든다면. 소중히 아껴주는 게 아니라 그저 내게 복종하고 내 밑에서 울게 한다면. 한 번도 알지 못한 수치심, 부끄러움, 몸 파는 여자들에게나 할 법한 더러운 말들을 지껄여 주는 그런 것.


그러나 곧 나는 내 백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


".아냐. 건아. 벌주는 거 아니야."

"잘못..잘못했어..주은찬."

"우리 좋은 거 하는 거야. 응? 저번에 했던 거."

"아! 아아....흑..."



아무렴 내가 어떻게 백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단지 사랑해주고싶을 뿐이다.




나는 남자답기보단 마른 허리의 한 가운데를 쥔다. 그리고 내 몸에 맞게 들어 올린 다음 달아오른 내 성기를 밀어 넣었다. 백건이 귀엽게 까치발을 들어 나를 받는다. 움직임을 따라 흔들흔들 백건의 어린 몸뚱이가 움직인다. 



"아...하윽..윽...! 주은찬!"

"하...건아,..좋아..너무..너무 좋아."

"흑....으흑...흐, 아앙..!"



 애매하게 어린 몸은 내 품에서 아주 쉽게 흔들렸다. 반항 한 번 없이. 오히려 끙끙거리면서도 나를 받아 내며 백건은 조금씩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아파. 하고 내게 말하지만 실은 좋아한다는 걸 안다. 여전히 어린 아이의 콧소리로 주은찬, 하고 백건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내 성기를 바짝 물어대면 나는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퍽퍽. 소리가 났다. 내 손바닥만한 엉덩이 한쪽을 내려치며 힉 하고 치솟는 백건의 비명소리에 나는 흥분을 느낀다. 그 목소리가 좋아 나는 몇번 더 엉덩이를 내려쳤다. 흰 피부는 금새 달아올랐다. 앗. 힉...아흑..응..! 나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 때마다 울음 섞인 비명같은 신음이 들렸다. 


 어떡하지. 네 안에 들어가고 싶어. 싸버리고 싶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 비명 속에서 좁고 뜨거운 안에 정액을 쌌다. 백건이 숨을 헐떡이며 끈적한 그것이 작은 엉덩이 사이로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훔쳐 백건의 입술을 문질렀다. 백건은 내 손가락을 곧이 곧대로 입에 물고 빨아준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꼭 내 욕심을 다 아는 것 처럼, 다 받아줄 것처럼 구는 것이다. 그런 백건이 나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문득 백건 얼굴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럴거면 평소대로 하는건데. 나는 뒷머리를 잡아당겨 고개를 젖히게 만든다. 줄줄 울고 있는 사랑스러운 얼굴이 보인다. 반쯤 뒤집힌 눈이 간신히 나를 바라본다.


백건은 내게 물들고, 휩쓸려서. 내 손에, 내 품에. 그러나 여전히 순진한 백건인 채로 오롯이 그러니까 내 작은 백건인 채로-



아. 건아. 백건. 나는.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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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ㅅㅇ

2016. 1. 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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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카테고리 없음 2015. 12. 19. 18:43




택시



 



 오전 내내 일을 하다 이제 막 숨을 돌리려던 때였다. 쉴 틈이 없이 분주한 공사장 저편에서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놈 하나가 가람을 향해 유유히 걸어오고 있었다. 놈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막대사탕을 삐딱하게 입에 물고 있었고, 물 빠진 야구잠바와 낡은 청바지는 파란색 작업복이 득시글한 공사장 한복판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아니나 다를까 꼬질꼬질한 나이키 운동화를 질질 끌며 나타난 촌스러운 그 녀석을 눈치 챈 건 가람뿐만이 아닌 듯 사람들이 놈에게 아는 채를 했다. 하나 둘. 돌아가는 시선. 가람은 개중 낯익은 얼굴들이 놈의 엉덩이를 제법 끈적거리는 손길로 주무르거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친한 척 하는 것을 보았다. 백건이 그 환대에 과히 섭섭하지 않게끔 엉덩이를 튕겼다. 그러다 택시! 하고 누군가 놈의 별명을 외치자 백건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낄낄 웃으며 왜, 태워주랴? 하고 대꾸를 했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어이, 청가람!”


 그러던 백건이 별안간 그 느릿한 몸짓만큼이나 느긋한 목소리로 가람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가람은 고개를 돌린다. 왜 또 아는 척이야. 성가신 놈이 또 들러붙게 생겼다는 낭패감에 가람은 인상을 썼다. 놈의 시선을 피해버린 게 자존심 상하는 것 같으면서도 자꾸만 좀 전까지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뭐. 내가 뭐 잘못한 게 뭐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늘 이 시간에 찾아오는 백건을 기다리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놈 앞에서 순순히 인정하기는 싫었다. 그러나 좀 전부터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가람의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놈은 그를 모른 척 하고 있는 상대를 향해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나 기다렸냐?”

“돼지 새끼 약 처먹었냐.”


 저어기 뒤뚱거리는 공사장 아저씨. 돈 많더라. 백건이 가람의 바로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장난스럽게 말한다. 어쩌라고. 여긴 왜 왔냐. 가람은 담배를 퉤 뱉으며 말했다.


“너 보러.”

“개소리 하지 말고.”

“진짠데.”


거짓말. 그러나 백건의 노란색 두 눈깔은 유난히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 같았다. 가람은 이미 불이 꺼진 담배꽁초를 발로 문지르며 백건의 시선을 피했다. 너 보러 왔다니깐. 그렇게 말하며 입에 문 사탕을 낼름거리는 혀가 붉다. 시발. 가슴이 간질거렸다. 나비같이 팔랑거리는 속눈썹 아래로 쭉 뻗은 눈매가 얄밉게 휘고 있었다.



*



공사장 구석에 있는 낡은 컨테이너 박스는 둘만이 아는 비밀장소였다. 그 앞에 서서 가람은 코를 씰룩였다. 이 냄새나고 더러운 곳에 좀처럼 익숙해 질 수가 없다. 그러나 백건은 그 음습한 공간으로 말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언제나 그렇듯 익숙해 보이는 동작이었다.


“씨발. 이런데 말고 그냥 우리 집에-”

“뭐래. 내가 너네 집을 왜 가냐.”



 그래. 결국 이런 사이밖에는 안 되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람은 기분이 퍽 상한 나머지 백건의 말을 떨치지 못하고 인상을 썼다. 그런 가람의 구겨진 얼굴을 내려다며 백건이 씨익 웃었다. 이윽고 낡은 소파 위에 앉히며 가람의 기분을 달래듯이. 대신 너한테 돈 안 받잖아. 응? 너한테만이야. 하고 속삭인다. 어울리지 않게 야살스러운 목소리였다.


“청가람.”


곧이어 커다란 몸이 느릿하게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하고 싶어, 너랑. 깜빡 깜빡 위를 향해 치켜뜬 눈이 가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혀는 여전히 빨겠다.


“미친놈.”


그래봤자 많은 상대 중 한명일 뿐일 텐데. 가람은 그걸 아주 잘 알았다. 알면서도 가슴이 간질거렸다. 나도 미쳤고, 이새끼는 더 미쳤어. 가람은 으르렁거리며 하얀 정수리를 끌어당겼다. 백건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내밀었다. 



*



"..와! 하 씨. 이것 봐. 이것 봐. 이 새끼 나 기다렸네.”

“하. 너, 입 좀. 제발 닥치고-”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성기에 백건이 새하얀 얼굴을 내밀며 쪼옥, 입을 맞추며 말했다. 물론 나도 내가 참을 수 없이 꼴린 다는 걸 알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열렬히 환영해주면 어떡하냐.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그러나 손은 헤매는 법도 망설이는 법도 없이 가람을 쓰다듬고, 흔들고, 움켜쥔다. 아래로 단단히 열이 모이고 있었다. 더운 계절이 아님에도 물구하고 뒷목에 한가득 땀이 났다. 그러다가는 별안간 키스의 여운을 그대로 품은 도톰한 입술이 젖기 시작한 귀두에 쪼옥,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백건 입 안의 온도를 느끼며 가람은 고개를 젖혔다. 백건은 목구멍을 잔뜩 열어 가람을 머금었다. 수축과 이완에 따라 입 안에 물린 가람이 점점 뜨거워지고, 단단해졌고,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어느덧 가람이 제 뒷통수를 두 손으로 꽉 쥐고 흔들기 시작했을 때, 백건은 짙어지는 살내음을 깊게 빨아들이며 머리를 움직였다. 가람의 허벅지를 쥐고, 고개를 앞뒤로 흔든다. 가람의 반응이 백건으로 하여금 행위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했다. 백건은 입 안에 선액이 흘러 넘칠 때 마다, 제 입 속 온도보다 더 뜨거워진 성기가 가득 목구멍을 쑤실 때 마다 가람의 안달에 만족감을 느꼈다. 곧이어 잔뜩 단단해진 귀두가 목젖을 찔렀다. 건은 볼이 홀쭉해지도록 소리 내며 가람의 성기를 빨았다.


"읏..," 


 입 안은 금방 하얗게 차올랐다. 숨 막히던 것이 물러나자 정수리가 짜릿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백건은 웃었다. 가람이 길게 숨을 토해내는 소리가 들렸다. 욱욱, 헛구역질을 하며 백건이 올려본다. 발갛게 물이 든 얼굴 위로 허연 정액 줄기가 입술부터 시작해 사선으로 튀어 있었다. 


"너 입으로 할 때 존나 많이 싸는 거 같아."

"시끄러 돼지야."

"왜, 빨아만 줘도 못 참겠냐? 좋아 죽겠어?"


 야. 너 얼굴 빨개졌다. 이 놈은 부끄러움이라곤 없는 건지. 창피함은 오롯이 가람의 몫과 같았다. 가람은 얼굴을 붉히며 씩씩거렸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러거나 말거나 백건은 어느덧 바지를 훌렁 벗어던지고선 가람의 위로 올라타고 있었다. 묵직한 엉덩이가 덜 식은 축축한 성기 위로 천천히 비벼진다. 가람은 백건의 옆구리에 어색하게 손을 올렸다.


"그래? 그럼 좀 있어 봐. 내가 오늘 너 천국 보내준다."



*



 하얀 허리가 앞 뒤,  위 아래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굳이 넓히지 않아도 삽입은 쉬웠고 행위는 전적으로 백건에게 맡겨졌다. 가람은 언제나처럼 백건이 벗기라면 벗기고, 핥으라면 그 몸을 핥았다. 땀으로 미끈거리는 몸에선 짠맛이 났다. 백건이 허리를 내려 앉아 가람의 성기가 밀려들 때 마다 안이 꽉 조여왔다. 가람이 참지 못하고 허리를 움직일 때면 백건은 연신 기분 좋은 신음을 내지르며 몸을 떨었다. 


"응..하,으응..."


 숨을 뱉으며 기대어 떠는 백건을 내려다보며 가람은 이럴 때 백건이 꼭 말 잘 듣는 애인 같다고 생각했다. 놈은 눈을 얌전히 내리 깔고, 눈가를 적시고, 쾌감에 온몸을 집중하며 안기기 바빴다. 얄밉게 지껄이는 녀석의 입술마저 달디 단 신음을 뱉어내는 것이 낯설었다. 꼭 백건이 너한테만이야. 하고 속삭일 때 같았다.


"아. 청가람..청가람..!"


그래봤자 다 거짓말인데. 


"흣...아윽..응, 응...!"


 가람은 백건의 허리를 움켜쥐고 허리를 쳐올렸다. 백건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다. 신음이 뚝뚝, 끊겨서 들렸다. 팔다리를 얽으며, 몸을 비틀며, 허덕이며 운다. 가람의 어깨에 손톱이 박히는 순간 가람은 그에 맞서 백건의 젖혀지는 목울대를 이로 세게 깨물었다. 하윽..! 아파..아! 백건이 눈을 홉뜨며 소리를 지른다. 그대로 허리를 털었다. 성기가 안으로 말려들자 소리가 달게 울렸다. 결국 가람은 참지 못하고 백건을 밀어 넘어뜨렸다. 앗! 흐,앗..앙!응! 백건이 허리를 뒤틀며 기다란 팔다리로 가람을 꽉 끌어안는다. 퍽퍽. 살집이 부딪히며 소리가 났다. 낡은 소파가 쉼 없이 삐걱거렸다.


 아. 백건. 백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입술을 부딪치며, 쉴 새 없이 얽혀들며 가람은 백건의 이름을 불렀다. 핫...응..으응..! 눈 앞이 빨갛게, 그리고 하얗게 정신없이 터졌다. 가람이 뱉어내는 순간에 백건의 아랫배가 꿈틀 요동치며 경련했다. 가람은 조금씩 느리게 허리를 박았다. 막힌 구멍 사이로 허옇게 거품이 일어나는 게 보였다. 하. 으.. 흔들흔들 밀리는 백건은 젖은 목소리로 흐느낀다.


 너한테만. 가람은 자꾸 환청처럼 귓가에 남는 목소리를 떨치려 백건의 입술에 제 입술을 파묻었다. 백건은 능숙하게 가람을 받아주었다. 울컥, 감정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짜증이 났다. 돈만 주면 누구나 태워 준다는 뜻에서 택시라고 불리는 주제에, 그렇다면 오직 제게만 돈을 받지 않는다는 게 무슨 소용이람. 꼭 특별한 사이 같이 여겨지지만 가람은 자신이 백건의 수많은 상대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어딘가, 가람과 똑같은 남자들이 여러명 있을 테지. 


 가람은 백건의 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특별한 사이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르는 것처럼 백건은 여전히 택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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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곽 au

카테고리 없음 2015. 11. 21. 23:43

"그래서, 얘들을 뭐라고 부르는데? 숯댕이?"
"...기왕이면 보일러 요정이라고 해줘."
"벌레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 화낼텐데."
"어, 진짜네. 화났다 화났어."

 그것들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리를 이루어 백건을 향해 달려 들었다. 백건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다, 곧이어 인상을 찌푸렸다. 하나 둘, 따로 보면 별 것 아닌 것들이 모여 어느새 위협적인 기세로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겁을 먹고 움츠라드는 어깨에 백건은 심술을 부리듯 갖고 놀던 녀석을 내던지다시피 그 무리 속으로 털어냈다. 깨끗했던 손바닥은 시커멓게 변해있었다. 백건은 손바닥을 털며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징그러."

 그 순간 숯덩이들이 말을 알아 들은 것처럼 더욱 발끈하며 검댕을 일으켰다. 백건은 당황해 뒷걸음질 치며 날리는 먼지를 털어냈다. 검댕은 털어내면 털어낼수록 들러붙어 얼룩이 곳곳으로 번져갔다. 매캐한 먼지에 코끝이 간지러웠다. 자꾸만 올라오는 기침에 기다란 속눈썹 끝에는 물기가 서렸다. 그러다 시커멓게 얼룩이 묻은 소매 끝을 발견했을 때, 백건은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다간 옷이 더러워질지도 모르는데. 옷을 더럽혔다고 혼이 났던 게 바로 며칠 전이었다.  한 번 더 옷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간 아예 발가벗겨 손님에게 보내버릴 테다. 꼬박 하루를 건을 굶긴 주인이 식은 밥덩이를 던져주며 했던 말이었다. 백건은 불현듯 두렵고 겁이났다.

"야! 이..이것들 좀 어떻게 해 봐!"

"그러게, 그러면 화낸다고 했잖아..."

 할 일도 많은데. 은찬은 한숨을 내쉬며 삽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돌리자 숯덩이 틈에서 하얀 얼굴 한가득 검댕을 묻히고 있는 백건이 보였다. 

"세상에, 너 지금 우는거야?"

백건은 대답대신 빨게진 코를 훌쩍였다.

"얘들이 장난 치는 건데 ,, 왜... 울고 그래..괜찮아....?"
"옷, 더러워지면 안된단말야."

 은찬의 시선이 백건이 입고 있는 옷으로 돌아갔다. 화려하게 수가 놓인 옷은 언뜻 봐도 고가의 귀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황한 은찬은 급한대로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옷을 털어보았지만 묻은 얼룩은 좀처럼 사라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시꺼멓게 번져, 상황은 점점 위태로운 형국이 되어갔다. 백건의 얼굴은 점점 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이 옷...많이 비싸...?"
"말이라고 해?"
"그..그렇지...,"

은찬은 마찬가지로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백건의 눈치를 살피며 얼룩진 뺨을 수건으로 문질렀다. 얼룩을 닦아내자 하얗게 반짝이는 뺨이 보였다. 매일 불 앞에 앉아 그을리고 거칠어진 자신의 손과 달리 달리 새하얀 피부가 무척 보드라워서 자칫 잘못하면 까슬한 광목 수건이 그 뺨에 상처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조심, 얼룩을 닦아낼 때 마다 백건의 짧은 머리카락이 은찬의 코에 닿아 향기가 났다. 은찬은 침을 꼴깍이며 머리칼에 코끝을 자꾸만 부볐다. 향기는 달았다. 그러다 이리저리 불만스럽게 시선을 굴리는 두 눈이 어쩌다 제 쪽으로 향할 때면 백건이 자신을 눈치 챌까 가슴을 졸였다.  고운 얼굴도, 비싼 옷가지도 모두 하나 같이 알고 있는 세상의 것이 아니어서, 은찬은 꾹 다물린 백건의 옅은 분홍색 입술을 한 번 만져보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 하면서도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너 왜 자꾸 쳐다봐?"
"어,...어?"
"자꾸 보고 있잖아."
"아,냐...안 봤는데..."
"거짓말.내가 다 봤는데."
"...예뻐서."

은찬은 수건을 손에 쥐고 꼼지락 거리며 중얼거렸다. 너무 예뻐서. 신기해서. 그래서.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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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드게임

카테고리 없음 2015. 11. 21. 23:35

엔드게임

1.

하나, 둘, 셋. 어항 안에는 물고기 세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아침에 먹이를 주었을 때만 해도 분명 네 마리였는데, 이제 보니 꼭 한 마리가 모자란다. 이상하네. 은찬은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머지않아 은찬이 굽어 내려 본 어항의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있는 놈이 보였다. 느긋하게 헤엄치는 다른 세 마리의 살랑거리는 붉은색 꼬리 사이로 보이는 그것은 허연 배를 내놓은 채 죽어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옆구리일까 싶은 부분이 터져 내장인지 뭔지. 아무튼 그 비슷한 게 밖으로 튀어 나와있는 채로 말이다.

곱게 죽지도 못한 몰골은 처참해서 은찬은 솔직히 불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부풀어 오른 하얀 배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터진 틈새로는 알 수 없지만 징그러운 것들이 튀어 나와있었고 그 치부를 가리기 위한 장막처럼 빛을 투과한 지느러미가 붉은색을 띠고 투명하게 너울거렸다. 그리고 뿌연 물살 사이로 또렷이 보이는 죽은 금붕어의 누우런 흰자위와 동공이 자신을 원망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금붕어는 키우기 쉽다고 그랬는데.

애초에 다른 관상 어종들을 다 제쳐두고 금붕어를 택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관리만 잘 해주면 수년씩 살 수도 있다고. 물론 그 정도로 귀찮게 긴 수명을 바라지야 않지만, 어쨌든 금붕어라는 게 다른 것들보다 훨씬 수월한 종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죽어버리다니. 크게 애정을 갖고 기른 것은 아니었지만 오래 두고 보살피던 것들이 막상 죽어버리자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건아, 너 혹시 금붕어 먹이 줬니?"

그러다 문득 짚이는 구석이 있어 묻자, 등 뒤에서 책을 읽고 있던 백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은 갈아줬고? 또다시 끄덕끄덕.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백건을 힐끗 바라본 은찬은 이윽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물 갈아 준 게 언제야?"
"...왜 그러는데?"

대답을 피하듯 되묻는 백건의 목소리는 작고 조심스러웠다. 돌아보면 불안을 감지한 듯 아몬드 모양의 노란 두 눈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은찬은 신음하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건은 얼마 전부터 은찬의 금붕어들을 맡아 기르는 중이었다. 은찬이 그렇게 하도록 했던 탓이다. 무엇이든 금방 싫증을 내고 변덕을 부리던 녀석이 유독 금붕어 어항에 오래도록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이 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그래서 먹이를 주는 것도, 물을 갈아 주는 것도, 상태를 확인하는 것도 최근에는 모두 다 건의 몫이었다.

언제나 세상을 감정 없이 바라보던 눈이 저보다 약한 그것들을 돌볼 때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싹이 움트듯, 어린 새끼가 땅에 첫발을 내딛듯 설레고 조심스럽게. 그렇게, 주인보다도 더 그것들을 살뜰하게 보살폈을 텐데. 그것이 네 잘못으로 죽어버렸다고 선뜻 말 하기가 꺼려지는 것이었다. 어떡할까. 여전히 불안하게 얼어붙은 눈동자를 빤히 올려다보며 은찬은 고민했다. 백건은 자신이 바라보는 시선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죽었어."
"뭐?"

그래서 은찬은 입을 연 마지막 까지도 조금 뜸을 들이며 고민했다. 예상대로 놀란 백건이 앞으로 튀어나온다. 읽고 있던 책이 카펫 위로 나뒹군다. 은찬은 건이 설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서며 건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불안하게 어항 속을 헤매던 시선이 굳는다. 터진 배 위에 고정된 시선이 위태로워 몹시 염려스러웠다. 평소엔 제멋대로에 사납기만 한 녀석이 왜 이런 일에는 눈에 띠게 여려지고 약해지는 건지. 

"안되겠다, 그냥 보지 말자."

결국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을 보다 못한 은찬이 두 눈을 가려주고 나서야 건은 막힌 숨을 토해내듯 긴 숨을 뱉으며 안도하는 것이었다. 눈을 가린 손바닥 위를 기다란 속눈썹은 오래도록 불안하게 서걱거렸다. 그러다 백건은 눈가를 덮은 은찬의 손을 그것보다 큼지막한 제 손이 아플만큼 쥔다. 하얀 손등에는 핏줄이 시퍼렇게 올라와 있었다. 괜찮아. 굳어있는 어깨를 쥐고 누르며 은찬은 백건을 달랬다. 괜찮아. 가빠진 숨을 달래며, 거듭 토닥이며, 귓가에, 그리고 뺨에, 입술에 은찬은 제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달래는 동안에도 은찬은 혹시라도 건이 울음을 터트릴까 맘을 졸여야했다. 혹시라도, 저번처럼-

"나 때문이야?"
"...아냐. 금붕어는 금방 잘 죽는데. 건아, 괜찮아. 응? 괜찮다니까."
"그치만, 물. 나 생각해보니까 안 갈아 줬어."
"그럴 수도 있지. 그것 때문만은 아닐거야. "
"그래도-"

 다행이 은찬이 염려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건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핏기가 가신 입술이나, 새빨갛게 충혈 된 눈가가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은찬은 아직 눈가의 온기가 남은 손을 가져가 건의 손을 맞잡았다. 나 봐. 내가 괜찮다고 하고 있지? 다시 한 번 건을 안심시키듯 속삭이고, 손을 어루만지며 달랜다. 꽉. 무심코 힘이 건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은찬은 잡힌 손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낀다. 말없이 매달리며, 온몸으로 애원하고 갈구하며 불안하고 애처롭게.

"그건, 어쩔 수 없었어."


*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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