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멘

카테고리 없음 2015. 10. 11. 20:17


카르멘



 현우는 백건에게 총을 빼어들고 경고했다. 그것을 단순히 말뿐인 위협으로 여겼던 것은 백건이었다. 아직도 현우가 자신을 어쩌지 못하리라는 막연하고 근거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건은 현우를 뿌리치고 걸어갔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현우는 그를 쐈고, 건은 그대로 고꾸라져 층계를 굴렀다. 허무하리만치 손쉽고 아무렇지 않게 현우는 건을 쐈다. 자신을 등지고 걸어가는 백건이 어느 정도 거리까지 멀어졌을 때, 그래서 그에게 심각하진 않지만 발을 묶어둘만한 제약을 걸 수 있게 되었을 때 말뿐이던 경고가 정확히 백건의 오른쪽 다리를 명중시켰던 것이다. 


"너. 날 죽일 셈이지!"


 그대로 1층까지 굴러 떨어진 백건은 피가 흐르는 다리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고는 성난 얼굴로 재빨리 품 안의 권총을 꺼내 현우를 향해 갈겼다. 2층 난간, 그리고 층계를 재빠르게 타고 내려오는 그림자를 쫒아 분진이 무성하게 날린다. 픽-,픽-, 2층 계단 앞을 차지하던 도자기 하나는 완전히 박살이 났고, 비싼 원목 가구 몇개에도 탄환이 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우는 여유롭게 그 난장판을 가로질러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미친놈, 정말로 미친놈!"

"닥쳐요."

"날.. 쐈어.네가 날 쐈다고. 개새끼. 개자식아! 네가, 네가 나한테! 윽..!"


 현우는 말없이 악소리를 내지르는 백건의 뒷머리를 그대로 잡아챘다. 억지로 몸이 일으켜지고 하염없이 벽으로 밀쳐진 백건이 현우에게 짓눌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습적인 완력에 눌린 채 등과 허리와 뒤통수가 쿵쿵 소리를 내며 벽과 아프게 부대낀다. 입술이 물어 뜯기고, 목이 졸렸다. 난폭함. 그것에서 백건은 익숙함을 느낀다. 오래 전에, 이런 식으로 마주했던가.


"욱...흐읍..,하윽..!"  


 입술 살같이 뜯어져나간 자리에선 계속 피가 났고 아프게 쓰라렸다. 그리고 바짝 목이 졸려  숨을 먹는 것이 무척이나 버거워 질 때 쯤, 아! 그리고 여전히 홧홧한 허벅지 위를 현우가 우악스럽게 움켜쥔다. 건은 소리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미쳐버릴 것 같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아. 붙잡혀서, 휘둘리고, 꿰뚫려서-


"당신, 왜 날 떠났습니까?"

"..."


 그러나 짐승의 것처럼 낮은 목소리에 담긴 감정의 절제에 건은 여전히 변함없는 관계에서의 우위를 확인한다. 글쎄, 왜 그랬을 것 같냐? 제 손톱이 할퀸 자리가 선명한 현우의 팔뚝을 어루만지며, 웃으며 건이 대답했다. 현우는 참고 기다리며 허락을, 아니면 어떤 대답을 기다린다. 그러나 내어줄 생각이 없다. 대신, 백건은 현우를 끌어 당겨 키스하는 시늉을 하다 복부에 재빠르게 주먹을 내리 꽂았다. 비틀거리며 현우가 물러나는 틈을 타 정확히 발로 정강이를 가격하고 그대로 뒤집어 바닥에 내리 꽂는다. 


"개자식."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백건은 현우에게 그간의 일을 해명하거나, 혹은 변명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현우에게서 몸을 숨길 수 있었고, 자신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예 현우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우가 만주땅을 이 잡듯 뒤져 결국에 그를 찾아 내었을 때에도, 모든 수단이 여의치 않았을 때 재회의 키스 대신, 그가 바라는 대답 대신 거리낌없이 총부리를 대가리에 겨눌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현우는 언제나 어쩔 수 없어야했다. 사랑한다고 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러했듯 똑같이 자신을 배신하고, 미워하고 총을 겨누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여전히 내게 어쩔 수 없어야 했다. 언제나 사랑하고, 감내하고, 기다리고, 애태우며.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있어야했다. 건은 그렇지 않다는 것에 서러움을 느낀다. 물론 그것은 불합리하고, 이기적이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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