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茶!'에 해당되는 글 57건

  1. 2015.03.18 [은찬백건]
  2. 2015.03.17 [은찬백건]그 밤에
  3. 2015.03.17 [현우백건] 2인용 식탁 01
  4. 2015.03.17 [은찬백건] 탁류
  5. 2015.03.17 [백건현우] LOST
  6. 2015.03.13 [은찬백건]화상花傷
  7. 2015.02.25 [은찬백건] 기담 01
  8. 2015.02.25 [현오백건]
  9. 2015.02.16 라스트 로미오 01
  10. 2015.02.14 [람현] Night & Day

[은찬백건]

카테고리 없음 2015. 3. 18. 03:06

"수아누나, 너 좋아하는 것 같더라."


그 목소리는 여상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음침한 구석이 있었다. 한 번 떠보려는 걸까. 아니면, 백건의 노란 시선은 불안하게 도로록 은찬을 향해 굴렀다. 은찬은 대걸레를 바닥에 받쳐 잡고는 턱을 괜채 먼산바라기 중이었다. 그러나 새카만 두 눈에선 아무런 의도도 읽을 수 없어서, 백건은 이런 은찬에게 어떤 식으로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인지 솔직히 말해 알 수 없었다.


"뭐, 그런가 보지..."


그래서 괜히 수선을 떨았다. 평소라면, 자주 그렇게 하듯이 조금은 밋밋한 그 외모를 놀리면서 잘난 척, 장난을 걸어 볼 텐데 그럴 수가 없다. 그런 것은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아무렇지 않던 것들이 이럴 때면 꼭 계기가 되곤 하기에. 마음은 대단히 조심스러워져 건은 심드렁하게 대답을 했다. 


 은찬은 아주 잠시 고개를 돌려 건을 바라보다 다시 밀대를 잡았다. 젖은 물소리가 바닥을 치대며 닦는다. 앞, 뒤. 묘하게 절도있고 규칙적인 움직임이 반복될 때 마다 걷어붙인 셔츠 소매 아래로 은찬의 각잡힌 팔뚝이 보였다. 앞으로 힘이 실리다가, 다시 뒤로. 그때마다 대를 쥔 손과 팔에 힘줄이 돋았다. 큼지막하고 마디가 깔끔한 손과 오목한 팔목과 직선으로 뻗은 팔을 지나쳐 그 어깨에 이르는 곧은 선은 제법이 아니라 그냥 남자다웠다.  


 백건은 남자답게 으로 빚어진 듯한 그 선에 잔뜩 힘이 실리던 때를 기억한다. 지금 어른거리는 은찬의 팔뚝이 거침없이 뻗어오던 순간. 퍽 섬세하고 다정한 손이 목을 조르던 때에. 단 한 번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돌변해서 달려들어 짓눌리고 잡아채여 숨이 막혀 아찔했던.



"....너무 예뻐서 그런가."

"...."


 너무 예뻐서.....두둥실 중얼거리는 그 달달한 목소리에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하긴, 어쩔 수 없을 법도 하다. 네가 이렇게 생겼으니까. 목소리가 속삭인다. 넓적한 손이 식은 뺨을 더듬는다. 은찬의 손은 열이 올라 뜨뜻했고 땀으로 미끌거렸다. 차라리- 쿡. 보드라운 살에 가해진 위협에 백건의 목이 빳빳하게 굳었다. 은찬의 손톱은 금방이라도 볼을 후벼팔 기세로 건의 볼을 찔러댔다. 볼, 그리고 입술. 목. 어깨. 얇고 단단한 손톱이 사선으로 내려간다. 피부를 가르듯이 천천히 그러나 깊게, 낙인을 새겨넣는듯한 움직임으로 송곳이 되어 그렇게.


"...주은찬"


 백건은  더듬더듬 은찬을 불렀다. 응, 건아. 애타는 부름이 못내 사랑스럽고 예뻤다. 은찬은 발 뒷꿈치를 들어 부릅뜬 백건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노란 두 눈이 결정처럼 바스라질 듯 흔들린다. 예쁘게. 


"앞으로 헤프게 흘리고 다니면 가만 안 둘거야."


 도수 없는 렌즈 너머로  투과된 두 눈의 불안한 기색 은찬은 못내 예뻤다. 예쁘고 무지한 짐승처럼 시선을 떨구고 파르르 속눈썹을 떨어대는 것을 보면 늘 이렇게 참을 수 없는 애정이 샘솟는다. 


"대답 해."

"응..."

"착하다."


 겁먹어 대답하는 게 사랑스러워 은찬은 입술을 그대로 부벼댔다. 조심스레 보드라운 입술을 벌려 빠끔히 벌어진 틈새를 혀와 손톱으로 비집는다. 삐죽 솟은 구석의 송곳니를 손톱이 긁고, 그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혀는 이뿌리 밑을, 더듬거리며 깊이 핥는다. 아직 감지 않은 노란 두 눈이 당황하여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목 뒤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이 작게 소름이 돋았다.



*



"앗..,아윽..윽!"


귀두를 밀어넣자 잘 짜여진 등 근육이 한꺼번에 뒤틀렸다. 맥박치는 그 자태를 황홀한듯 눈으로 훑으며 은찬은 다시 한 번 뿌리 끝까지 밀어 붙였다. 그 다음엔 곧바로 내벽을 치댔다. 학. 높게 신음이 치솟는다. 등과 허리가 뒤틀리고, 휘고. 그러는 동안 뜨겁고 좁은 공간은 조금씩 넓혀지더니, 어느새 씹어 먹을 것처럼 깊은 안쪽으로 살덩이를 끌어 당겼다. 은찬은 백건의 뒷목을 잡고 누르며 숨을 쉬듯 움찔거리는 그 구멍의 틈새로 성기를 박아 넣었다. 젖은 살덩이가 잔뜩 주름 진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밀려나고 그 때마다 하얀 등이 뒤틀렸다.


허리만을 움직이던 은찬은 그것을 내내 빤히 쳐다보았다. 검붉은 음모가 흰 엉덩이에 비벼질 때 마다 하얀 거품이 묻어나왔다. 그 사이로 굵은 음경이 몸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너무나도 적나라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색 밝은 머리칼 아래로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가 보였다. 까드득 사정없이 테이블을 긁기 시작하는 손등이 하얗게 질려있다,


"흐응, 건아. 어떡..흐,누나가, 너, 진짜로...좋다 그러면,... "

"아니,..아흐,,,으...나...아..힉..!


허리를 느릿하게 뒤로 뺐다 다시 올려붙인다. 쾌감에 못이긴 백건은 고개를 젖히며 세차게 도리질을 쳤다. 삐걱삐걱 흔들리던 테이블 위로 몸이 무너진다. 씨발, 탄성을 내뱉으며 은찬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찧어댔다. 이렇게 예쁜데,응, 함부로 흘리고 다니면,


"아, 아아...흐...주은차아안...!"


말과 숨이 턱턱 끊긴 채 백건은 숨을 할딱였다. 끼고 있는 안경 렌즈 너머로 보이는 세상이 세차게 흔들렸다. 찻 숨을 뱉는 동안 다물리지 않는 입가로는 침이 뚝뚝 떨어져 턱을 적시고 있었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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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찬 X TS 백건
그 밤에




TV에서는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건은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그것을 심드렁하게 쳐다보았다. 아담한 체구의 여성이 걸어가는 장면이었다. 예쁘긴 하네, 그 빛바랜 흑백 영화는 제법 유명한 것이었는데, 그녀는 어머니와 오빠가 화면 속 여배우의 대단한 팬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아는 것이 없었다. 제목이 뭐더라. 몇 번 들어본 것 같긴한데 도무지 기억이 안난다.


 힐끔, 시계를 쳐다본 백건은 하품을 했다. 딱히 뭘 한 것도 없는데 벌써 1시라니. 대체 어디로 흘러가버렸는지 모를 시간을 떠올리며, 백건은 몸이 지루함에 잠식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물론, 집에서 같이 영화를 보며 앉아있는 토요일 밤은 상황만으로는 로맨틱했다. 사랑스러운 여배우와, 진부한 대사가 만들어내는 흑백의 세계는 적당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천천히, 때로는 경쾌하게 흐르는 배경음악과 더불어 어두운 거실에 가득 차오른 낡고 푸르스름한 빛은 미묘하게 에로틱했다. 보통의 연인들에게라면 더할 나위 없는 감성적인 밤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감성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다. 그저 습관처럼 틀어놓은 티비 채널이 우연히 맞아 떨어져 보게 된 영화는 그녀의 취향과는 동떨어져있었다. 아무래도, 사랑에 목매는 멜로따위 그녀의 관심사가 아닌 것이다. 배우인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가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아버지조차도 극찬을 하던 아주 유명한 영화였는데도 불구하고 백건은 그것이 그저 지루하기만 했다. 영화는 모름지기 시끌벅적한 게 좋았다-아버지는 그녀의 심드렁한 태도에 안목이 낮다며 투덜거렸던 걸로 기억한다.


"...."


 그에 비해 은찬은 화면에서 눈을 땔 줄 몰랐다. 제법 재미를 느끼는 듯 얄쌍한 눈끝이 시종일간 휘어져 있다. 혹시 아는 영화일까, 물어볼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몰두하듯 화면만을 꽉 채운 검은색 눈동자를 본 백건은 제빨리 생각을 접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건지. 


가난하고 멍청한 여자 하나라 반반한 얼굴만을 앞세워 잘난 남자를 물고, 거기에 덥썩 낚이는 멍청한 남자의 웃기지도 않는 연애 신파극일 뿐인데. 

감길 듯 말듯 두 눈동자가 빛을 잃고 까무룩 뒤집어진다. 꿈뻑꿈뻑, 백건은 몇 번 고개를 내저으며 버티는가 싶더니 결국 무너져 내리듯 은찬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은찬은 담요를 가져와 모로 누운 백건의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색밝은 뒷통수가 무릎 위를 간지럽게 파고들었다. 고양이를 긁어주듯 은찬은 작게 웃으며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동그란 어깨가 움츠러들다 이내 긴장을 푸는 것이 느껴졌다.

"졸려?"
"재미없어."
"보는 눈이 없구나 백건"
"다른 건 모르겠고, 주은찬 네 취향이 고리타분하다는 건 알겠다."
"차라리 고상하다고 해줄래?"
"저런 게 좋냐?"

별로 예쁘지도 않고, 가슴도 작고, 멍청한데다 가난하고 약한데. 은찬은 말 없이 백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할리퀸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냐. 잘생기고 능력 좋고 돈많고 착한 남자를 싫어하는 여자는 잘 없어. 

"나는 허접하고 성격나쁘고 못생긴 남자가 좋아."
"나도 역시 예쁘고 가슴 크고 몸매 좋고 돈도 많고 능력있는 이 쪽이 좋은 것 같아."
"속물이네 주은찬."
"속물인 것 마저도 네 취향은 아니고?"

 TV에선 여전히 영화가 흘러나왔다. 배경음과 배우들의 속삭임이 둘 사이의 침묵을 메워갔다. 백건이 하품을 했다.은찬은 백건의 정수리 부근에서 맴돌던 손을 슬 며시 움직여 뺨과 목을 쓰다듬었다. 은밀한 제스쳐를 알아차린 눈이 빛을 내며 휘어졌다. 은찬의 굽은 목을 어느새 뻗어온 희고 긴 팔이 낭창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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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x백건

2인용 식탁






카페 세렌디피티 Serendipity 는 최근 입소문을 빠르게 타고 핫플레이스로 부상 중인 서울 근교의 작은 카페였다. 시내에서 제법 먼 거리의 작은 동네에 위치한 30평 남짓한 이 작은 가게가 유명해진 것은 지난 해 겨울로, 그 해 가을에 가게가 오픈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례적일 만큼 빨리 유명해진 축에 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페 세렌디피티는 그러한 반짝하는 유명세에 안주하지 않고 한결같이 저렴한 가격과, 그에 뒤지지 않는 맛, 그리고 고풍스럽고 안락한 분위기를 유지한 결과,  꾸준히 사랑을 받으며 명실상부 맛집으로 거듭났고 현재는 손님과 돈을 갈고리고 싹싹 끌어모으는 중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이 물좋은 핫플레이스를 가장 많은 손님들이 찾아 오는 날이 휴무인 월요일이라는 점이었다.

"확,씨 한번만 더 알짱거려라, 어?!"

사실, 카페 세렌디피티의 인기 뒤에는 앞서 말한 이유들 보다도 사장과 점원의 잘난 얼굴이 큰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 몸 좋고 '잘생긴 오빠들'이야 말로 여고생, 여대생, 직장인, 그리고 주부층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에게 카페가 어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데 이 잘생긴 오빠들이, 매주 월요일 아침만 되면 아주 희한한 구경거리를 만들어내고는 했던 것이다. 


"저놈들은 왜 저렇게 미련하답디까?"

"몰라 낸들. 존나 더럽게 끈질기네."


빙 둘러싼 손님 무리들은 휴대폰이나 카메라 플래쉬를 터트려댔다. 오빠! 혹은 누구야!하고 이름을 부르면서. 마치 아이돌 팬클럽을 떠올리게 하는 이 광경과 함께하는 월요일 구경거리의 메인은 커다란 일수가방을 품에 끼고 나타난 험악하게 생긴 형님들을 잘 생긴 오빠들이 무찌르는 광경이었다.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를 연상시키듯 엎어치고, 매치고, 찌르고, 패고, 발로 차는 장면은 동네 여고생들을 비롯해 많은 여자들에게 좋은 눈요깃거리였다. 


"이 씨발....꺼져 새꺄!"


연장만 안 챙겼지 어디서 껌 좀 씹다온 게 분명한 이 미남들은 예사롭지 않은 몸짓으로 불청객들을 실컷 갈궈준 다음에는 꼭 가게에 들여놓은- 꽤 값이 나가보이는- 테이블이나 의자 같은 것을 일수꾼들에게 집어 던지는 것으로 싸움을 요란하게 마무리 짓곤 했는데, 자칫 험악해보일 수 있는 일련의 광경들이 이렇듯 잘생긴 사장과 점원 앞에서는 단순히 멋있는 하나의 퍼포먼스로 보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신기한 것은 동네가 떠나가라 소릴 지르며 난리를 피우는데도 동네 주민들로부터 민원이 들어온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인심이 좋은 건지 무관심한건지. 어쩌면 이 카페의 단골 고객층인 동네 부녀회라던가, 주부들의 입김이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지만 좌우지간 이 동네 주민은 한번도 경찰에 그들을 신고하는 법이 없었고, 덕분에 카페 세렌디피티는 개점이래 단 한번도 그런 잡음 없이 평화로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


"이제 가구점에 연락 넣기도 민망할 지경입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카페 세렌디피티는 평화롭다. 다리가 하나 부러진 채 애처롭게 고꾸라진 의자를 들어 구석에 가져다둔 현우가 백건을 향해 투덜거렸다. 신경질적인 표정이 방금 전 카메라와 선물 세례를 받으며 웃어주던 뻔뻔한 면상과는 천지차이였다. 백건은 카페 앞 계단에 걸터 앉은 채 팔을 괴고 현우가 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부러진 의자 다리를 의자 몸에 이리 저리 붙여보려고 낑낑거리는 모습이 한심했다. 어차피 그거 못 고친다니까. 부러진 의자의 한 쪽 다리는 저 멀리 가게 밖 콩크리트 바닥 위에서 뒹굴고 있을 터였다. 

"그냥 사, 새로 사면 되지."
"돈은 누가 벌고요?"
"열심히 뺑이치면 되겠지."

정 안 돼면 니 월급에서 까고. 청소기를 끌고 온 백건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노동청에 신고할겁니다. 현우는 지지 않고 가자미눈을 하고선 대들었다.

"어쭈, 신고한다 그거지.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자리까지 주는데 월급좀 깠다고 나를 신고하겠다 이거지?와, 이거 완전 배은망덕한 새끼네."
"그러게 돈 좀 제 때 갚으면 좋잖습니까?"
"이새기 이거 칼만 안 들었지 완전 강도야 강도."
"그럼 사장 당신은 택사스 목화 농장 주인이고. 노예의 폭동이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려드리죠."
"어, 그거 좋다. 해 봐. 어디 한 번."

저리 비켜. 현우의 발을 툭툭 걷어찬 백건은 청소기 전원을 켰다. 위이잉, 진동과 함께 콘크리트 바닥 위로 흩어진 나무 조각들이 흡입구에 빨려들어간다. 현우는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다 가게에서 빗자루를 들고 나왔다. 청소기가 다 쓸고 지나간 자리를 굳이 쓸어내는 건지. 꼭 모자란 놈 같이 구는 현우였다.

"아,... 근데 나 이번엔 진짜 돈 없는데."
"맞아요, 제 월급도 없습니다."
"그래 넌 좀 닥치고."

월세내고, 원두사고, 밀가루랑, 설탕이랑.....,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는 백건을 향해 현우가 혀를 찼다. 남는 게 돈이라 돈 계산하는 데는 눈이 어두워서인지 백건은 가끔 물건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특히 월요일만 되면 찾아오는 일수꾼 나부랭이들만 보면 열이 받아서는 살림살이를 내던지곤 했다. 

"그래, 뭐. 장사 잘 되고 있잖아, 괜찮아, 곧 갚겠지. 여차하면 집에다가 좀 땡겨 달라고 하지 뭐."
"당신 어머님이 내주신답니까."
"자식 이기는 부모 봤어?"
"사모님은 바늘로 찔러서 피 한 방울 안 나오실 것 같던데요."
"그럼 니네 형한테 달라고 해."
"돈이 썩었습니까? 사장님 가게에 형의 피같은 돈을 쏟아붓게. 저는 여기에 한 푼도 투자 안 할겁니다."
"꼴값떨고 앉아있네. 형한테 연락하기 민망하다고 솔직히 말하지 그래."

월급 받아 먹는 주제에 너는 입만 살았지 아무튼. 백건의 이죽거림에 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백건에게서 청소기를 빼았아 들었다. 저 멀리까지 날아간 깨진 나무조각의 톱밥이나 유리 파편같은게 흡입구에 빨려왔다. 그 때마다 요란하게 청소기가 덜덜거린다. 백건이 현우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말했다. 윽. 운동화 코가 제법 아프게 걷어차는 바람에 입술 사이로 짧게 신음이 샜다. 

"저 쪽, 저기도 쓸어. 나중에 검사할거야."
"지랄하지마시죠. 저기 깨끗하잖아요, 왜 때립니까? 저도 한대 걷어 차도 됩니까?"

현우는 투덜투덜 청소기를 끌고 가 백건이 가리킨 곳을 쓸었다. 항상 백건은 사고는 자기가 다 쳐놓고 수습은 뒷전이다. 부서진 의자 개수를 하나 둘 떠올리며 현우는 형의 번호를 기억하려 애썼다. 010...그리고 뭐더라. 아마도 남은 번호는 2층 자기 방 옷장에 걸어둔 자캣 주머니 안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테다.


다 끝나면 들어와서 밥 먹어. 그 때 등 뒤에서 백건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했다. 희미하게 커피 냄새가 났다. 아, 한정식 먹고 싶은데. 밥과 국 따위를 떠올리며 현우는  짜증스레 바닥을 청소기 흡입구로 툭툭쳤다. 사고는 자기가 쳐놓고 청소는 왜 나한테 시켜? 혼자 곱게 자라 세상 모르고 속 없는 인간 같으니.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현우의 정수리 위로 부드러운 아침햇살이 비스듬히 내리쬐고 있었다. 


그렇게 오늘도 이곳, 카페 세렌디피티의 아침은 평화롭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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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류


"그렇다고 미련하게 거기서 비나 맞고 앉아있냐?"

"그러게"


말이나 못하면 밉지라도 않을 테다.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밤 늦게 찾아온 녀석을 그러려니, 집안으로 들였지만 당사자 되는 사람의 그 뻔뻔함이 더더욱 가관이라 자연스레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 아니면 내일. 그 쯔음에는 분명 자신을 찾아와 갖은 청승을 다 떨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그 예상에서 한치의 빗나감도 없는 것에 무심코 심술이 삐죽 솟는 것이다. 


불쌍한 주은찬, 그는 오늘도  눈물로 호소하고 혀끝으로 속삭여 약삭빠르게 그의 동정과 위로를 받아  날이 밝는대로 자신을 내팽겨치겠지.


"나 차였어."


곧이어 꺼낸 말은 마찬가지로 예상대로.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그를 대신해 백건을 마주보며 은찬이 웃는다. 


"등신새끼.좋냐?"


왜 오밤중에 청승을 떨고 지랄이야. 백건은 은찬의 얼굴에 수건을 던지며 말했다. 넌 존나 비겁한 새끼야.  속에서부터 그 말이 왜이리 터지듯 올라오는 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처량한 몰골은 마음에 거슬렸다. 주제에 잔뜩 공들이고 다니 던 머리는 비에 젖어 엉망이었고 아끼며 자랑하던 옷이 어디 흙탕물에 구르고 오기라도 한 것 처럼 꼬질꼬질하고 더러웠다. 손가락에 걸린 싸구려 반지는 서글프게 반짝였다. 백건은 그것들을 아닌척 흘겨보며 그가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지 생각했다.


"그것들 다 갖다 버려. 그냥 새로 사. 내가 사줄게."


어차피 진심도 아니었잖아. 할까 말까 몇번 고민하다 그렇게 덧붙였다. 그러자 은찬은 웃으며- '하하.' 은찬의 웃음 소리가 허무하게 허공을 홀로 배회한다. 무게가 없어 먼지같은 웃음이라고 백건은 생각했다.  놈이 정말로 슬퍼하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꼭 비 맞은 개새끼처럼-풀이 죽은 눈을 조용히 깜빡, 깜빡....


그 발칙함을 알면서도 결국 넘어가버리고 마는 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백건은 은찬의 불행이 아주 잘 되었다 싶으면서도,새파랗게 질린 입술만 보고 있으면 여지없이 갓 태어난 제 새끼를 핥아주듯, 그렇게도 품어주고 싶은 마음이 끓었다. 그건 8년을 알고 지낸 불알 친구에 대한 어줍잖은 우정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었고 주은찬에게 인간적으로 연민을 느껴서도 아니었다. 다만 순수한 애정이다.


그리고 이 놈은 그런 걸 잘안다. 적어도 백건이 생각하기엔. 주은찬은 영악하고, 그렇지만 사랑스럽고. 그래서 교묘하게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만큼의 마음을 제게서 도려내 가는 약탈자였다. 그러나 언제나, 백건의 오래 묵은 마음들은 그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물처럼 흘러 넘쳐 주은찬에게로 향하곤 했다. 차라리 가만히 내버려두면 될 것을 결국 그러지 못하고는-


"너 우냐?"

"아냐."


우네. 아차 싶은 순간에 말투에 화가 베여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어쩔 도리는 없었다. 백건은 은찬에게서 수건을 빼았으며 짜증을 냈다. 놈의 시뻘게진 눈시울을 보니 화가 났다. 오래 전 은찬에게 도려져 나간 제 마음의 한 구석은 매번 이럴 때 지독한 아픔이 찾아왔다.

 이 뻔뻔하고 비겁한 놈이. 이 사랑스럽고 영악한 놈이. 주은찬은 자기도 모르게 제 마음을 도려내가놓고는 언제나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외롭고 쓸쓸한 척. 세상의 온 갖 불행은 자기 혼자 다 겪은 척. 그리하여 이 순간 내게는 너 밖에 없다는 듯이. 그 모든 것이 의도적인 연출이라는 것 쯤 모르는 바는 아니다. 

백건은 주은찬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나 뻔한 것이 뻔하지 않은 것이 되는 법. 아픔은 익숙해지지 않고 마음은 늘 기대를 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내일. 주은찬은 전리품들을 챙겨 그의 곁을 떠 날 것이다. 은찬이 내일도 곁에 있으리라는 믿음은 배신당한 지 오래됐을 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때문에 백건은 몸이 덩달아 젖어버리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내칠 수가 없다. 놈의 얼굴을 갈겨주고 싶다고 골백번 생각했고 거슬리는 놈의 쨍한 빨간머리를 죄다 뽑아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단 한번도 주먹질을 한 적은 없었고 정말로 놈의 머리털을 뽑아버린 적도 없었다. 

대신 지금처럼 주은찬의 눈물을 닦아주고, 딱하게 젖은 머리를 어루만지며 그저 달래줄 뿐이다. 백건은 주은찬을 욕하는 대신이름조차 모르는 계집애를 욕하고, 어떻게든 위로가 될 법한 말을 고르고 골라 상냥하게 은찬을 달래주고야 만다.


"건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은찬의 목소리는 늘 햇살같다. 백건은 그렇게 생각했다. 잔뜩 울먹이는 주제에. 누가 누구를 위로하는 건지 알 수 없게되버린다. 곧이어 작은 새처럼 입술을 쪼아대기 시작하는 주둥이를 향해 먹이를 물리듯 천천히 입을 벌려주며 백건은 주은찬의 뺨을 매만졌다. 축축하게 젖은 뺨이 그의 손에 남은 작은 온기마저 느릿하게 빨아먹고 있었다.

그래. 나는 네가 슬퍼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스스로 품어주게 된다. 사실 그것을 주은찬이 요구한 적이 있었던가. 모든 것은 백건 스스로 내어준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건은 그것이 약탈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은찬을 원망이라도 하면 마음껏 사랑할 수 있었다.


이런건 불공평해. 너는 비겁하고 무책임해.


눈시울이 뜨끈거렸다. 눈 앞이 뿌얘졌다. 앞이 보이질 않았다. 어쩌면 그는 지금 세찬 탁류에 마구잡이로 휩쓸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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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현우] LOST

2015. 3. 17. 0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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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花傷





 백건은 각성이 지나치게 늦은 편이었다. 때문에 그는 스무 살이 다 되도록 자신의 꽃이 무엇인지 조차 몰랐다. 백건처럼 각성을 하지 못한 사회에서 ‘덜 자란 것들’로 취급받았다. 그것은 백건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뛰어난 육체적 요소와 모순되는 그의 미성숙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걱정을 모았고 동시에 한 쪽에선 물어뜯기 좋은 적당한 놀림거리가 됐다.


그중 대부분은 혈통에 손색없는 종자를 받아 조금이라도 더 낳은 종으로의 개화를 노리는 욕심에서 비롯된 시선이었다. 남들이 각성을 시작하는 열다섯 무렵부터 줄곧 자신을 따라다니던 노골적이고 천박한 시선을 향해 백건은 거침없이 욕을 갈겼다.


“짜증나....”


짜증나 죽을 것 같다고. 백건이 작게 입을 비죽이며 쿵쿵 발을 굴렸다. 백건에게는 이렇듯 다소 어린 아이 같은 구석이 있었는데 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오는 날이면 그것이 심해졌다.


바로 지금처럼-


“주은차안...”


쿵쿵 바닥을 차던 것이 어느새 온 몸으로 심기가 불편함을 표현하며 칭얼거린다. 주은찬, 어떡하지-응? 어떡할까. 심드렁한 말투로 백건이 투덜거렸다. 삐걱 삐걱 의자와 테이블이 백건의 움직임에 함께 흔들린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은찬은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덩치도 만만치 않은 놈이 이렇게 눈앞에서 산만하게 수선을 떨면 으레 그렇듯 집중이라는 걸 도무지 할 수가 없다. 아, 이 책 마저 읽어야 되는데.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이미 손은 책을 덮는다.


“-그냥 맘을 좀 더 편하게 먹으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때 되면 찾아오겠지.”

“빌어먹을. 글쎄 그러고 기다리는 게 대체 몇 년째야?”


그 말 대로다. 본래 그 품종이 좋을 수록 꽃의 개성과 희소가치가 두드러지는 법이었는데 동시에 그런 꽃을 가진 사람들은 각성 시기가 늦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백건은 각성이 늦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한데.”


은찬은 백건의 각성이 늦어지는 이유가 주변의 지나친 관심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완전히 성인의 몸을 갖추고도 단지 ‘각성’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손조차 댈 수 없는 그를 보고 있으면 누구든 지 그런 종류의 관심과 걱정을 하며 입맛을 다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데에 동의한다.


“방법?”


미끼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백건의 노란 색 두 눈이 호기심에 가득 찬 채 빛을 냈다. 은찬은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침없는 호기심 앞에 입 안에 침이 고인다. 백건은 여전히 아이처럼 깨끗하고 순수했다. 아직도 새하얗기만 한 백건의 등을 볼 때면 은찬은 그것에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고는 했다.




 은찬은 백건과 함께 각성이 늦은 편에 속했다. 그러나 그는 열여덟이 되던 여름, 각성을 했다. 붉은 양귀비였다. 각성은 갑작스럽기보다는 오히려 준비되고 예견된 것에 가까웠지만 아무런 예고 없이 불현듯 찾아와 은찬을 덮쳤고 지독하게도 그를 괴롭혔다.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은찬은 벌레처럼 몸을 웅크렸다. 놀란 백건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아직도 속이 안 좋아? 백건은 은찬의 굽어진 등을 두드려 주었다. 툭툭, 백건이 등을 두드릴 때마다 뱃속이 뒤틀렸다. 불현듯 입 안이 오그라들더니 한가득 침이 고였다. 코끝에서 짙어진 꽃향기 같은 것에, 턱이 제 멋대로 벌어진다. 토할 것 같아.


-야. 주은찬!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 있었다. 조각조각 나 있던 작은 실마리들이 그 짧은 순간에 틀에 하나로 뭉치더니 구체적인 형태로서 나타나는 것이었다. 말로만 듣던 각성이었다. 은찬은 잠시 당황했지만, 재빠르게 행동했다. 은찬은 백건을 뿌리치고 달렸다. 자신을 부르는 백건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갈고리가 되어 발목을 아프게 찢었다. 발이 젖은 흙바닥을 차고 오를 때마다. 그 위로 운동화 자국이 하나 둘 남을 때마다, 그 자리에는 짙은 꽃향기가 남았다.


악취처럼 지독해지는 꽃향기에 무언가 크게 잘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 뜀박질을 멈추면 그 짙은 향기가 자신을 집어 삼키고야 말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그를 채찍질했다. 그러지 않으면 영영 꽃덩굴에 발이 묶여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면 돌이킬 수가 없다. 발이 묶여 달아나지 못하고, 백건이 금새 뒤를 쫒아와 버리면, 그래서 백건이 이 역겨운 악취의 진상을 깨달아 버린다면!


흙을 파내듯 달려가는 뜀박질에 운동화 앞코가 얼룩지고, 끈이 풀려갔다. 은찬은 멈추지 않았다.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 백건의 목소리와 그림자가 닿지 않게 되었을 무렵이 되어서야 은찬의 몸이 무너지듯 화단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욱, 우웩....!


 입을가린 은찬의 손가락 사이로 빨간 꽃이 한 움큼씩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하나 둘, 피가 터지듯 계속해서 꽃들이 터져 나왔다. 울컥울컥 올라오는 꽃은 피처럼 붉었고, 상처처럼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찢어지고 뭉개지고. 온전치 않은 꽃들이 침과 뒤섞여 흘렀다. 꽃은 금새 무덤처럼 수북이 쌓여 은찬의 발밑을 에워쌌다.

 꽃 더미 속에서 헐떡이며 은찬은 고개를 도리질쳤다. 미처 나오지 못한 꽃잎들이 목구멍의 점막에 달라붙어 목을 간질였다. 눈앞이 온통 빨갛게 물든다. 황홀하고 아찔하게 향기가 퍼진다. 몸이 마비되는 감각. 꽃잎이 부서지는 냄새에 까무룩-


-아,  욱...! 건아....,백건 ...!


 은찬은 거의 필사적으로, 애타게 백건의 이름을 불렀다. 한껏 꽃을 토해낸 목구멍에 불이 붙어 그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이 타올랐다. 대답 없이 혼자 부르는 이름은, 그리고 마음은 서글프고 괴로웠다. 방금 전 까지 등을 두드리던 그 손의 온기와 무게와 감촉이 불현듯 사무치게 그리워지고 애가 탔다. 눈물이 흘렀다. 상처처럼 쓰라리게만 느껴지는 두 뺨의 눈물 자국을 소매로 훔치며 은찬은 피를 토하듯 거듭 백건의 이름을 입밖으로 토했다.


지독한 꽃 멀미였다.


그리고 그날 밤 은찬은 꿈을 꿨다. 뜨겁고 황홀한 꿈이었다. 꿈속에서는, 홀로 멀미했던 그 이름과, 토해내던 마음을 부를 수 있었다. 꿈속에서 백건은 자신만의 꽃이었다. 은찬은 제 꽃을 다루듯 하얀 속살을 헤집고 뜯어내고 단단한 대를 힘껏 꺾으면서 대신 그 등에 자신의 붉은 꽃을 새겨 넣었다. 그 때 움찔 하던 등으로 백건은 울었던가. 


백건이 괴로워하는 것은 못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떨리는 흰 등줄기에 빨간 꽃이 독처럼 번지는 순간 은찬의 괴로움과 슬픔은 잊혀 갔다. 눈물은 마르고 말할 수 없는 황홀한 기쁨만이 찾아왔다. 꽃을 탐하는 은찬의 손길은 뜨겁고 거칠었다. 자신이 토해낸 꽃들을 다루듯 백건을 만졌다. 넘치는 마음이 안타까워 끌어안고, 울고, 입을 맞추고, 동시에 헤집고, 밟고, 부수면서.


하얗고 깨끗한 백건의 몸 위로 수북이 빨간 열꽃이 내려앉았다. 피와, 상처와, 울음과, 꽃이 흰 몸 위에서 터졌고 그 때마다 은찬의 아랫배에선 조용히 열이 끌었다.그러다 잠에서 깬 이른 새벽엔 젖은 몸을 느낄 수 있었다. 침대 위엔 간밤 잠결에 토해낸 지긋지긋한 붉은 색 꽃잎이 수북했다. 온 몸이 꽃무더기로 맞기라도 한 것처럼 화끈거리고 아파왔다. 그날 이후 은찬은 걸핏하면 꽃 멀미를 앓았다. 그런 날엔 꿈에 늘 백건이 나왔다.


"...그거 좀 위험하지 않나."

"어차피 계속 이 상태면 너 나중엔 너네 집안 어른들 손에 끌려가서 아무하고나 떡치고 각성하고 씨뿌리게 될 걸."

"이 씨발 주은찬 이게 그걸 말이라고."

"그런 식으로 사고치는 애들도 많은 데 뭘 그렇게 신경쓰고 그래? 걱정하는 부분도, 각인만 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없을 거야. 건이 네가 자연적인 각성을 정 못 기다리겠다면 그것도 방법은 방법이긴하지."


 얼핏 그럴듯한 대안에 샛노란 아몬드 모양의 두 눈 위로 드리우는 진지한 고민의 그림자에 은찬은 상냥하게 웃었다. 눈앞의 상대는 순진해서 예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못내 사랑스럽다. 은찬은 백건을 마주보고 웃으며 처음 각성 했던 때를 떠올렸다. 그를 괴롭히던 꽃 멀미와 밤을 적시던 꿈들이 떠올랐다.


"한번 해 볼래?"


 나랑. 



 그 때처럼, 어쩌면 그 때보다 더 짙게, 악취 같은 꽃향기가 났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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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찬x백건

기담 奇談

01



백건의 장례식 절차는 간소했다.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임종이 없어 초혼이나 곡도 없었다. 시신이 없어 문중 선산에도 묻히지 못하게 되었다고. 다만 백건은 그 집안의 유일한 장손이었기에 먼저 간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나마 신위와 향불이 놓였다. 그러나 첫째 날 아침 병풍 너머 관 속에는 백건의 시신 대신 산에서 발견된 백건의 술띠가 들어있었다.


얼마 전 돌아온 백건의 생일날 은찬이 그에게 선물했던 황벽색 노란 술띠였다.


-은이 누나.

-...은찬이 왔구나.


손수건에 눈물을 찍어 누르는 백은이 낯설었다. 화사한 봄같이 맑은 인상의 그녀는 언제나 백건보다도 더 단단한 구석이 있었는데, 오늘은 토끼같이 새 빨간 눈을 하고 삼배로 얽은 상복을 걸치고 있었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건이한테, 인사해야지...


붉게 옻칠 된 나무패에 쓰인 백건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 지. 백은이 코를 훌쩍이며 자신을 백건의 빈소 앞으로 이끌 때 까지도 은찬은 깨닫지 못했다. 백건. 제 이름보다도 익숙했던 그 두 글자가 읽히지가 않았다. 난생 처음 본 것 같이. 너무나도 단촐한 죽음 앞에 울컥 화가 솟구친다. 무슨 소리야, 누나. 시신이 없는데 어떻게 장례를 치른단 말이야. 백은이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


백건이 죽었을 리 없다. 꼬박 한 달을 헤맨 산속에서 발견한 것은 피 묻은 술띠뿐이다. 은찬은 향불 너머의 병풍을 막무가내로 젖혔다. 백은은 은찬을 말리지 않았다. 병풍 뒤에는 우두커니 놓인 백건의 관이 있었다.


수북이 쌓인 하얀 종이 꽃과, 그 하얀 무덤 위로 검붉은 색, 길쭉한 자국이 하나.


끝끝내 부정하고 싶은 진실을 머리가 인정하기 시작한다. 두 다리가 휘청, 벽으로 기운다. 은찬은 아득해진 정신을 부여잡고 탄식을 내뱉었다. 피에 절어 검붉은 색이 된 술띠는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백건의 죽음을 은찬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장례는 땅에 묻는 대신 불에 태우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네가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백건 어머니의 부탁이 있었기에 백건을 떠나보내는 것은 은찬이었다. 가족이 아닌 친구가 상을 치르는 것이 예법에 어긋나지 않을 까 걱정되었으나 어차피 앞세운 자식의 장례를 치르는 것부터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백건의 어머니가 말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담담한 목소리였다.


은찬은 착잡하게 술띠를 집어들었다. 백건에게 주었던 생일 선물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몰래 담은 마음에 하늘이 벌이라도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건이 너를 좋아한다고, 말이라도 해볼 걸 그랬다.


술띠 끝에  불길이 치솟았다. 비명에 간 백건처럼 삽시간에 타오른 불길이 붉은색 술띠를 삼켰다. 매캐한 냄새가 났고, 불씨가 풀풀 휘날렸다. 백은과 백건의 부모님은 울지 않았다. 죽음 앞에도 담담히 자신을 떠나보내는 그 모습에 백건이 미련 없이 떠나버릴 것만 같아 은찬은 때를 쓰듯, 더운 바람에 눈물이 말라가는데도 불구하고 하염없이 흐느끼며 울었다.


나는 아마 평생 너를 잊지 못하고, 너를 찾으며 울고,


그러면 네가 찾아와 줄까 싶어서.



*



“그 소문 들었어?”

"아, 저 사람이 그...."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은찬은 갓을 고쳐 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백씨 집안, 백건, ...달빛 아래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발걸음이 스치는 족족 듣기 싫은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술에 잠긴 귀에도 그 소리만은 지독하게도 선명했다.


마을에서도 유명했던 백씨 집안 도령의 실종은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누군가는 백건이 죽음을 가장해 사귀던 처녀와 달아났다는 추문을 입에 담았고, 사실은 그의 가족들이 그를 죽인 것이라는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하기도 했다. 백건의 가족들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백건을 둘러싸고 오르내리는 많은 말들을 담담히 무시했지만 소문은 무성해져 갈 뿐이었다.


은찬은 그 소문들을 들을 때 마다 견딜 수가 없었다. 무수한 이야기들이 백건을 둘러싸고 그를 더럽히고 있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점점 사람들이 싫어졌고, 지겨워졌다. 동시에 자신만의 백건을 떠올리는 날들은 더욱 많아져갔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날도 늘어났다. 그러지 않은 날엔 기방에서 여자들과 어울리며 술을 진탕 마셔댔다.


"나 왔어, 백건."


장지문을 밀어젖히며 은찬이 빈 방에 대고 속삭였다. 대답없는 방 안에 은찬의 조용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밤낮으로 은찬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방 한켠에 놓인 백건의 유품에 대고 그에게 하듯 인사를 건내는 것이었다. 언젠가 간지럽다면서도 함께 주고받던 서찰들과 자잘한 선물들이었다. 백은이 전해주기를, 백건은 은찬에게 받아온 선물들에 투덜거리면서도 함부로 하는 법이 없었다고. 그러다 가끔은 주은찬이 준 거라며 누이를 붙잡고 넌지시 자랑하기도 하며 소중히 보관했다고 했다.


 은찬은 그것들을 곱게 갈무리 해놓고 백건이 생각날 때면 꺼내보곤했다. 준 보람도 없이 다시 제 품으로 돌아와버린 것들이었지만 백건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방에 틀어박혀 백건의 유품들을 품에 끌어안고 혼자 대화하는 주인 도련님의 이야기는 하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 은찬의 집 대문 밖으로 퍼져갔다. 


미쳤다느니, 귀신에 홀렸다느니. 사람들은 이제 은찬이 나타날 때면 쉬쉬하면서도 그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오늘도 몇 번째 계집아이들이 속닥거리는 이야기들을 들었는지 모른다.


백 도령의 친구 도령이 미쳤다는 소문.


그리고 소문은 또 다시 이상한 소문을 만들었다.


범이 백건을 물어갔다는 이야기였다. 호환이라고, 사람들은 쑥덕였다. 그 쯔음 해서 마을의 가축들이 짐승에 물어뜯긴 채 발견되는 일이 많아지면서 생긴 새로운 소문은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번져갔다.


사람들은 백건이 호환을 당한 게 틀림없으며 창귀가 되어 은찬에게 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마다 은찬은 자신의 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범은 산신이 아니라 요물이다. 호환虎患을 당해 시체를 찾을 수 없게 된 귀신은 창귀가 되어 요망한 범의 종자가 된다고 들었다. 범은 그 창귀를 부려 그것이 생전에 알고 있던 이들의 이름을 캐내 그들의 혼을 빼어먹고 육신을 잡아먹을 생각을 한다고. 


곧고 맑게 빛나던 백건이 사람 고기를 탐하는 요괴가 되어 버린다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에는, 사람들 말터럼 그런 모습으로라도 백건이 자신을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추잡한 마음이 언제나 남아 있었다. 백건을 두번 죽이는 일이었지만, 꿈에라도 한 번 나타나지 않는 백건을 기다리는 은찬의 마음은 병들어가고 있었다. 



"보고싶다...."


나는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모습, 어떤 형태든 좋다. 만나고 싶다. 그를 만나 끝내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구름이 달을 가리자 방에 조용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은찬은 까무룩 눈을 감았다. 바스락, 서찰이 손 끝에서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다시 달빛이 흘렀다. 어느새 문 밖에선 달을 등진 하얀 그림자가 잠이 든 은찬의 위로 드리우고 있었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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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오백건]

2015. 2. 25.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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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로미오 01

2015. 2. 16.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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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현] Night & Day

2015. 2. 14.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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