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


"그렇다고 미련하게 거기서 비나 맞고 앉아있냐?"

"그러게"


말이나 못하면 밉지라도 않을 테다.


바깥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밤 늦게 찾아온 녀석을 그러려니, 집안으로 들였지만 당사자 되는 사람의 그 뻔뻔함이 더더욱 가관이라 자연스레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 아니면 내일. 그 쯔음에는 분명 자신을 찾아와 갖은 청승을 다 떨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그 예상에서 한치의 빗나감도 없는 것에 무심코 심술이 삐죽 솟는 것이다. 


불쌍한 주은찬, 그는 오늘도  눈물로 호소하고 혀끝으로 속삭여 약삭빠르게 그의 동정과 위로를 받아  날이 밝는대로 자신을 내팽겨치겠지.


"나 차였어."


곧이어 꺼낸 말은 마찬가지로 예상대로.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그를 대신해 백건을 마주보며 은찬이 웃는다. 


"등신새끼.좋냐?"


왜 오밤중에 청승을 떨고 지랄이야. 백건은 은찬의 얼굴에 수건을 던지며 말했다. 넌 존나 비겁한 새끼야.  속에서부터 그 말이 왜이리 터지듯 올라오는 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처량한 몰골은 마음에 거슬렸다. 주제에 잔뜩 공들이고 다니 던 머리는 비에 젖어 엉망이었고 아끼며 자랑하던 옷이 어디 흙탕물에 구르고 오기라도 한 것 처럼 꼬질꼬질하고 더러웠다. 손가락에 걸린 싸구려 반지는 서글프게 반짝였다. 백건은 그것들을 아닌척 흘겨보며 그가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지 생각했다.


"그것들 다 갖다 버려. 그냥 새로 사. 내가 사줄게."


어차피 진심도 아니었잖아. 할까 말까 몇번 고민하다 그렇게 덧붙였다. 그러자 은찬은 웃으며- '하하.' 은찬의 웃음 소리가 허무하게 허공을 홀로 배회한다. 무게가 없어 먼지같은 웃음이라고 백건은 생각했다.  놈이 정말로 슬퍼하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꼭 비 맞은 개새끼처럼-풀이 죽은 눈을 조용히 깜빡, 깜빡....


그 발칙함을 알면서도 결국 넘어가버리고 마는 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백건은 은찬의 불행이 아주 잘 되었다 싶으면서도,새파랗게 질린 입술만 보고 있으면 여지없이 갓 태어난 제 새끼를 핥아주듯, 그렇게도 품어주고 싶은 마음이 끓었다. 그건 8년을 알고 지낸 불알 친구에 대한 어줍잖은 우정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었고 주은찬에게 인간적으로 연민을 느껴서도 아니었다. 다만 순수한 애정이다.


그리고 이 놈은 그런 걸 잘안다. 적어도 백건이 생각하기엔. 주은찬은 영악하고, 그렇지만 사랑스럽고. 그래서 교묘하게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만큼의 마음을 제게서 도려내 가는 약탈자였다. 그러나 언제나, 백건의 오래 묵은 마음들은 그가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물처럼 흘러 넘쳐 주은찬에게로 향하곤 했다. 차라리 가만히 내버려두면 될 것을 결국 그러지 못하고는-


"너 우냐?"

"아냐."


우네. 아차 싶은 순간에 말투에 화가 베여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어쩔 도리는 없었다. 백건은 은찬에게서 수건을 빼았으며 짜증을 냈다. 놈의 시뻘게진 눈시울을 보니 화가 났다. 오래 전 은찬에게 도려져 나간 제 마음의 한 구석은 매번 이럴 때 지독한 아픔이 찾아왔다.

 이 뻔뻔하고 비겁한 놈이. 이 사랑스럽고 영악한 놈이. 주은찬은 자기도 모르게 제 마음을 도려내가놓고는 언제나 이렇게 사람을 비참하게 만든다. 외롭고 쓸쓸한 척. 세상의 온 갖 불행은 자기 혼자 다 겪은 척. 그리하여 이 순간 내게는 너 밖에 없다는 듯이. 그 모든 것이 의도적인 연출이라는 것 쯤 모르는 바는 아니다. 

백건은 주은찬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나 뻔한 것이 뻔하지 않은 것이 되는 법. 아픔은 익숙해지지 않고 마음은 늘 기대를 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내일. 주은찬은 전리품들을 챙겨 그의 곁을 떠 날 것이다. 은찬이 내일도 곁에 있으리라는 믿음은 배신당한 지 오래됐을 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때문에 백건은 몸이 덩달아 젖어버리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내칠 수가 없다. 놈의 얼굴을 갈겨주고 싶다고 골백번 생각했고 거슬리는 놈의 쨍한 빨간머리를 죄다 뽑아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단 한번도 주먹질을 한 적은 없었고 정말로 놈의 머리털을 뽑아버린 적도 없었다. 

대신 지금처럼 주은찬의 눈물을 닦아주고, 딱하게 젖은 머리를 어루만지며 그저 달래줄 뿐이다. 백건은 주은찬을 욕하는 대신이름조차 모르는 계집애를 욕하고, 어떻게든 위로가 될 법한 말을 고르고 골라 상냥하게 은찬을 달래주고야 만다.


"건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은찬의 목소리는 늘 햇살같다. 백건은 그렇게 생각했다. 잔뜩 울먹이는 주제에. 누가 누구를 위로하는 건지 알 수 없게되버린다. 곧이어 작은 새처럼 입술을 쪼아대기 시작하는 주둥이를 향해 먹이를 물리듯 천천히 입을 벌려주며 백건은 주은찬의 뺨을 매만졌다. 축축하게 젖은 뺨이 그의 손에 남은 작은 온기마저 느릿하게 빨아먹고 있었다.

그래. 나는 네가 슬퍼하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스스로 품어주게 된다. 사실 그것을 주은찬이 요구한 적이 있었던가. 모든 것은 백건 스스로 내어준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건은 그것이 약탈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은찬을 원망이라도 하면 마음껏 사랑할 수 있었다.


이런건 불공평해. 너는 비겁하고 무책임해.


눈시울이 뜨끈거렸다. 눈 앞이 뿌얘졌다. 앞이 보이질 않았다. 어쩌면 그는 지금 세찬 탁류에 마구잡이로 휩쓸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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