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찬 X TS 백건
그 밤에




TV에서는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건은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그것을 심드렁하게 쳐다보았다. 아담한 체구의 여성이 걸어가는 장면이었다. 예쁘긴 하네, 그 빛바랜 흑백 영화는 제법 유명한 것이었는데, 그녀는 어머니와 오빠가 화면 속 여배우의 대단한 팬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아는 것이 없었다. 제목이 뭐더라. 몇 번 들어본 것 같긴한데 도무지 기억이 안난다.


 힐끔, 시계를 쳐다본 백건은 하품을 했다. 딱히 뭘 한 것도 없는데 벌써 1시라니. 대체 어디로 흘러가버렸는지 모를 시간을 떠올리며, 백건은 몸이 지루함에 잠식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물론, 집에서 같이 영화를 보며 앉아있는 토요일 밤은 상황만으로는 로맨틱했다. 사랑스러운 여배우와, 진부한 대사가 만들어내는 흑백의 세계는 적당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천천히, 때로는 경쾌하게 흐르는 배경음악과 더불어 어두운 거실에 가득 차오른 낡고 푸르스름한 빛은 미묘하게 에로틱했다. 보통의 연인들에게라면 더할 나위 없는 감성적인 밤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감성과는, 그다지 친하지 않다. 그저 습관처럼 틀어놓은 티비 채널이 우연히 맞아 떨어져 보게 된 영화는 그녀의 취향과는 동떨어져있었다. 아무래도, 사랑에 목매는 멜로따위 그녀의 관심사가 아닌 것이다. 배우인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가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아버지조차도 극찬을 하던 아주 유명한 영화였는데도 불구하고 백건은 그것이 그저 지루하기만 했다. 영화는 모름지기 시끌벅적한 게 좋았다-아버지는 그녀의 심드렁한 태도에 안목이 낮다며 투덜거렸던 걸로 기억한다.


"...."


 그에 비해 은찬은 화면에서 눈을 땔 줄 몰랐다. 제법 재미를 느끼는 듯 얄쌍한 눈끝이 시종일간 휘어져 있다. 혹시 아는 영화일까, 물어볼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몰두하듯 화면만을 꽉 채운 검은색 눈동자를 본 백건은 제빨리 생각을 접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건지. 


가난하고 멍청한 여자 하나라 반반한 얼굴만을 앞세워 잘난 남자를 물고, 거기에 덥썩 낚이는 멍청한 남자의 웃기지도 않는 연애 신파극일 뿐인데. 

감길 듯 말듯 두 눈동자가 빛을 잃고 까무룩 뒤집어진다. 꿈뻑꿈뻑, 백건은 몇 번 고개를 내저으며 버티는가 싶더니 결국 무너져 내리듯 은찬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은찬은 담요를 가져와 모로 누운 백건의 어깨 위로 덮어주었다. 색밝은 뒷통수가 무릎 위를 간지럽게 파고들었다. 고양이를 긁어주듯 은찬은 작게 웃으며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동그란 어깨가 움츠러들다 이내 긴장을 푸는 것이 느껴졌다.

"졸려?"
"재미없어."
"보는 눈이 없구나 백건"
"다른 건 모르겠고, 주은찬 네 취향이 고리타분하다는 건 알겠다."
"차라리 고상하다고 해줄래?"
"저런 게 좋냐?"

별로 예쁘지도 않고, 가슴도 작고, 멍청한데다 가난하고 약한데. 은찬은 말 없이 백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할리퀸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냐. 잘생기고 능력 좋고 돈많고 착한 남자를 싫어하는 여자는 잘 없어. 

"나는 허접하고 성격나쁘고 못생긴 남자가 좋아."
"나도 역시 예쁘고 가슴 크고 몸매 좋고 돈도 많고 능력있는 이 쪽이 좋은 것 같아."
"속물이네 주은찬."
"속물인 것 마저도 네 취향은 아니고?"

 TV에선 여전히 영화가 흘러나왔다. 배경음과 배우들의 속삭임이 둘 사이의 침묵을 메워갔다. 백건이 하품을 했다.은찬은 백건의 정수리 부근에서 맴돌던 손을 슬 며시 움직여 뺨과 목을 쓰다듬었다. 은밀한 제스쳐를 알아차린 눈이 빛을 내며 휘어졌다. 은찬의 굽은 목을 어느새 뻗어온 희고 긴 팔이 낭창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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