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마리스크 나무 아래 1

2015. 1. 2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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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솥을 안치고 얼마 안 있어 고소한 밥 냄새가 났다. 칙칙 요란한 소리를 내며 솥이 끓는다. 뭉게뭉게 하얀 김이 퐁퐁 샘솟는 모양이 탐스러웠다. 가람은 밥 뜸을 들이는 동안 국을 끓이고 생선과 나물로 몇 가지 요리를 더 했다. 은찬이 잠에서 깨고, 욕실로 들어가자 손은 더욱 바빠졌다. 가람은 은찬이 씻는 동안 음식들을 그릇에 나눠 담았다. 


 그리하여 두 명 분의 밥상을 다 차렸을 무렵 동이 트기 시작했다. 햇빛에 비친 장지문이 하얗게 빛났다. 거슬리게 늘어지는 문살의 가느다란 그림자에 콧등을 찡그리며 가람이 장지문을 할짝 열어젖혔다.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햇살이 방 안으로 흘러든다. 햇살이 마당 위로 소담스럽게 내리쬐는 광경을 보며 가람은 기지개를 켰다.


"좋은 아침."


곧이어 밥상 앞에 앉은 은찬이 인사했다. 가람이 대답한다.


"좋은 아침 주은찬."


오늘도 어김없이.



주은찬X청가람

손끝의 연인



"오늘 무슨 일 있어?"


 저 좋아하는 것들로 반찬을 만들어주는 날이면 은찬은 말이 많다. 차려준 보람이 없게 밥은 먹지 않고 여기 저기 젓가락을 놀려 대면서 무슨 산해진미라도 눈앞에 둔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이건 맛이 어떠니, 저건 또 어떠니. 그렇게 한참을 답답하게 깨작거리는 것이었다. 가람은 으레 그렇듯이 밥이나 먹어 돼지야, 하고 말하며 은찬에게 수저를 건네주었다.


"이렇게 먹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기억나?"

"또 뭐가."

"가람이 네가 아침 밥 차릴 때 마다 백건이 시끄럽다고 매일 뭐라고 했잖아. 그러다 너희 둘이 싸우고,"

"주은찬."

"나랑 현우는 너희가 밥상 엎을까봐 밥상 붙잡고 밥 먹고......"

"나 다 먹었어."

"안 남기고 다 먹었지?"


 가람은 대답대신 빈 밥그릇을 내밀어 보였다. 그는 배고픔을 잊은 지 오래였지만 은찬은 가람이 밥을 함께 먹기를 원했다. 가람이 밥을 먹지 않으면 자기도 밥을 먹지 않겠다는 은찬은 막무가내였기에 가람은 매일 삼시세끼를 꼬박 챙겨먹어야했고 더불어 밥을 다 먹고 난 뒤엔 은찬에게 빈 그릇을 검사 받아야했다.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것 같아 불쾌했지만 은찬의 고집은 대단했다. 


"당연히 다 먹었지 멍청아."

"그랬어? 잘했어 청가람."


가람은 더부룩함을 감추고 남은 반찬을 깨작거렸다. 은찬은 제 밥을 그릇에 덜어준다.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이렇게 잘했다 잘했다 칭찬 하며 머릴 쓰다듬는 것도 순 애 취급 하듯 하는건지. 어쩐지 모르게 얄미웠지만 묘하게 간질거리게 만드는 칭찬은 싫진 않다. 가람은 은찬이 덜어준 밥을 다시 돌려주며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었다. 집은 반찬을 은찬의 숟가락 위에 올려 주며, 많이 먹어 주은찬, 하고 말했다. 


2.


 설거지를 하는 동안엔 은찬이 늘 부른 배를 문지르며 거실 소파에 앉아 아침 드라마를 봤다. 목을 길게 빼고 TV를 보며 가람은 그릇을 닦았다. 늘 그렇고 그렇기 마련이듯 드라마는 그저 그랬다. 금세 TV에 흥미를 잃은 가람은 심드렁하게 눈길을 돌리다가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온 은찬을 보며 혀를 찼다.


"진짜 이제 아저씨가 따로 없다 주은찬."

"그럼 가람이 넌 아줌마야? 꼭 부부 같다."

"이게 또 헛소리야. 난 너같이 게으른 남편 필요 없거든."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어?"


 가람의 삐죽한 한마디를 듣고 나서야 소파에 늘어져 있던 은찬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는다. 은찬은 끝끝내 일어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가람은 그런 주제에 목소리만 별이라도 따다 줄 듯 하염없이 다정스러운 그 뻔뻔한 꼬락서니에다 대고 뭐라 한마디를 해줄까, 아니면 화를 낼까 머리를 굴리며 잠시 생각을 하다가, 


"됐어. 설거지 다하고 청소할 거니까 그 때 도와주기나 해."


역시 그 게으르고 뺀질거리는 모습으로 능청을 부릴 걸 또 지켜보느니 차라리 이게 낫다. 그러나 웬 걸. 청소라는 이야기에 은찬은 단 번에 얼굴이 죽어서는 다 드러나는 표정으로다가 또 그 귀찮은 일을 어떻게 빠져나갈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인상을 썼다. 


그러고는 아주 비장한 결심이라도 한 듯 얼굴을 굳히며 한다는 말이


"가람아, 우리 청소는 좀 나중에 하자."

"주은찬 네가 그러니까 어디 가서 아저씨 소리나 듣는 거야."

"너무하다. 나 아직 아저씨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잖아? 나 아직 쓸 만 해."

"쓸 만하긴 개뿔이. 당장 일어나 이 게으름뱅이야. 얼른. 나 청소할 거란 말이야."

"에이......가람아, 그냥 내일 하면 안 돼? 내일 하자. 내일."

"멍청아. 오늘 아니면 안 돼. 일어나 빨리."


 결국 가람의 성화에 못 이긴 은찬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났다. 투덜거리지는 않아도 불만스러워 보이는 은찬의 얼굴을 깔끔히 무시한 채 가람은 가장 먼저 은찬의 방으로 향했다. 가람은 방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창문을 모두 연 다음 은찬에게 먼지 털이를 쥐어주고 청소를 시켰다. 은찬이 먼지를 털어 내면 가람이 빗자루와 걸레로 바닥을 청소했다.




3.


  낡은 집에선 전체적으로 마른 낙엽의 냄새 같은 것이 났다. 바싹 마른듯하면서도 어쩐지 기분 자체는 축축한 그런 냄새였다. 그것이 짙게 베인 구석구석에서는 오래된 잡동사니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굴러 나왔다. 제법 쌓인 그것들은 은찬의 물건이기도 했고 가람의 것이기도 했으며 백건이나 현우의 물건들이기도 했다. 꼭 무슨 창고 같아. 가람이 중얼거리자 그 순간 마당을 쓸고 있던 은찬이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창고 정리하는 걸 깜빡했어."


 부랴부랴 은찬이 방에서 창고 열쇠를 꺼내왔다. 은찬은 바로 몇 해 전 순이 할멈이 노환으로 돌아가신 후 자기가 대신해서 창고를 관리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제법 쌓인 잡동사니가 제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버려야할 지, 말아야할 지 고민하던 차에 잘 된 일이었다. 여차하면 거기다 다 쳐박아두면 되니까. 가람은 은찬과 함께 그것들을 비닐 봉투에 꾹꾹 눌러 담은 다음 창고로 향했다. 그러나 자물쇠를 풀고 창고의 문을 열었을 때 가람은 눈앞으로 훅하고 밀려드는 두터운 먼지바람과 쾌쾌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며 재채기를 했다.


"관리는 얼어 죽을, 너 대체 얼마나 청소를 안 한 거야?"


 한동안 손을 대지 않았던 탓에 창고를 정리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아무렇게나 쌓인 물건들은 전부 하늘나라에서 떨어진 보패들이었다. 정리를 하고 있으면 군데군데에서 추억어린 물건들이 튀어나왔다. 가람은 새삼 신기한 듯 그것들을 만져보다가 몰래 가져가면 안돼. 하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은찬에게 눈을 흘기며 빗자루를 들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가람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은 은찬이 청소를 했고 가람은 밑을 쓸었다.


 가람은 손을 꼬물거리다 선반 위를 청소하는 은찬을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새삼스러운 사실이었지만 은찬은 가람보다 아주 조금 키가 컸다. 사실 크지 않은 건 가람뿐이었다. 중앙에서 수련을 하는 동안, 성장이 멈춘 가람과 달리 나머지 셋은 조금씩 키가 더 자랐다. 은찬은 그 후에도 나이를 먹으며 키가 좀 더 자랐고 얼굴은 좀 더 갸름해졌다. 처진 눈매는 조금 더 가라앉아 어릴 때보다도 더 차분한 인상으로 변했다.


"왜 그래?"

"그냥 쳐다봤어."

"역시 잘생겼지?"

"미친 놈이 뭐라는 거야"


 가람은 새삼 낯설어진 은찬의 옆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 옆 모습에서 햇빛에 투과되어 잘게 부서지는 듯이 반짝이는 붉은 색 속눈썹을 보고는 덥썩 은찬의 뺨을 감싸 쥐었다. 차가운 가람의 손에 가늘고 긴 속눈썹이 불씨처럼 파르르 떨렸다. 보통 사람보다 조금 높은 은찬의 따뜻한 체온은 손바닥을 통해 가람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제서야 사라져 버릴 지도 모른다는 비현실적인 걱정이 사라지고 안심이 되었다. 가람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친 은찬은 고개를 숙였다.


"가람이 너 손 무지하게 차다. 추워? 너 추위 많이 타잖아."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친 은찬이 코를 부벼대며 말했다. 추위 따위야 당연하게도 느끼지 않았지만 고개 숙인 은찬의 어느덧 새까매진 머리 뿌리를 바라본 가람은 은찬을 끌어안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좀 춥기는 하다. 너는 안 추워, 주은찬?"

"나야 뭐 추위 별로 안 타잖아. 추우면 이렇게 안고 있으면 되지."


 은찬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미소였다. 그렇게 서른을 훌쩍 넘긴 삼심대 후반의 아저씨가 된 은찬을 볼 때마다 가람은 늘 은찬을 아저씨라고 놀렸다. 하지만 사실 아저씨라고 부르기엔 조금 곤란한 것이 은찬은 나이와 달리 여전히 그 뺀질한 인상만은 어쨌든 간에 젊은 편이었다.


 옛날보다 게을러지기는 했지만, 은찬은 걱정하던 것처럼 머리가 벗겨지지도 않았고 주름이나 뱃살이 접히지도 않았다. 분위기 같은 것에서 나이 먹은 티만 좀 날 뿐 여전히 젊은 인상을 주는 얼굴은 문득문득 가람에게 그의 시간이 이십대 후반에서 멈추어 버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난 괜찮아.청가람."

"이게 왜 뜬금 없이 헛소리야?"


 하지만 시간의 흐름마저도 느껴지지 않는 은찬은 가람을 기다리는 동안 오로지 그것을 위해 아마도 이때 껏 낙엽 냄새만이 가득해진 빈 찻집에서 혼자 수련을 하고, 나이를 먹어가며 시간을 보냈을 테다. 가람은 미안함과 서글픔을 느꼈다. 주은찬의 시간과 기다림은 어떻게해도 자신이 보답 해 줄 수가 없다. 이렇게 손을 잡는 것이 가람이 은찬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사과이자 위로고 보답인 것이다. 세월을 내색하지 않는 은찬이었지만 그  손가락만은 유일하게 옛날과 달랐다.


 거칠고  억센 마른 나뭇가지같은 손가락이 얽혀와 가람을 어루만졌다. 은찬에게 남기고 간 세월을 스스로에게 새기듯 가람은 은찬의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뒤늦게 그 흔적들을 가리듯 은찬이 빠져나가려 했다. 가람은 은찬의 손을 더욱 세게 붙들었다. 꽉.



"...배고프네."

"...라면 먹을래?"

"주은찬 네가 끓여주면.물론 별로 미덥지는 않지만."


 어느덧 점심 때를 훌쩍 놓친 시점에서 아침과 마찬가지로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가람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은찬이 슬며시 웃는 게 퍽 보기 좋았다.



 은찬은 분명 나이를 더 먹었고, 키가 조금 더 컸고, 머리엔 사실 이미 검정물이 든 데다 이 손 처럼 홀로 늙어가고 있는 아저씨지만 가람에게 은찬은 여전히 잘 웃고, 다정하고, 조금 뺀질거리기는 하지만 제 맘을 고스란히 품어주는 머리색 빨간 주은찬이었다. 


변한 건 없다. 가람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쭉. 단지 변하지 않는 둘이 있을 뿐이다. 






Posted by 세한(歲寒)
,

ㅇㅇ

2014. 12. 18.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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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가람 루프썰 #1

2014. 12. 13. 23:04


청가람 루프썰

아마도 찬가람

가람애비 시점

근본없는 설정 날조 주의

BGM삽입 실패ㅠㅜㅠ 노동요는 해리의 슬픈 사랑의 노래입니다.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봄의 일이었어. 내년 봄에는 고운 아이를 품에 안게 될 것이라고 봄을 맞아 동녘으로 날아드는 까치와 제비들이 그를 축하하며 알려준 덕이었지. 그래서 청룡은 땅에있는 아내보다도 아내의 임신사실을 먼저 알 수 있었어.


 소리 없는 봄비와 봄꽃처럼, 그렇게 찾아온 생명. 만연한 봄의 축복이자 선물. 태어날 아이는 땅에 내버려 두고 올 수 밖에 없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던 아내와의 사랑의 결실이었고, 그는 아내를 사랑하는 만큼 태어날 자신의 아이도 사랑했어.  비록 태어날 자기 아이는 자신을 닮아 인간의 껍질을 쓴 용으로 태어나겠지만, 어쨌든 아내의 태를 빌어 사랑의 결실로서 생긴 아이니까. 그리고 임신한 아내를 찾아가 부른 배를 보고 쓰다듬으며 그 안의 생명을 느끼면서 다짐했지.사랑해주자. 아껴주자.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고 지켜주자. 좋은 아버지가 되자.


 하늘의 존재인 청룡으로 살아야 하는 시간이 길어서 그만큼 아이와 함께할 시간들이 적을 지는 몰라도 그는 최대한 아이를 사랑해주자고 결심했어. 그래서 그는 임신한 아내를 자주 찾아와 하늘의 온갖 좋은 음식들을 가져다 주었고 함께 아이의 성별이나 이름에 대해 머릴 맞대고 고민을 했어. 하늘에서도 다른 사신들을 비롯한 하늘의 신선들에게도 아이의 탄생을 이야기 하고 다녔고  생명을 점지해 준다는 신선들에게 찾아가 아이가 잘 자라고 있는지, 사주팔자는 어떤지, 언제쯤에 태어날 지 등등에 대해 묻고 다니며 세심하게 신경을 썼어.


 생명을 낳아 기르는 봄을 관장하는 청룡이기에 아이가 태어날 날을 고를 수도 있었지. 그래서 그는 봄 중에서도 가장 따뜻하고, 길한 날을 아이가 태어날 날로 잡아놓고 그 아이를 기다렸어. 그렇게 사랑과 기대를 받아 태어난 아이는 남자아이였어. 용인 자기를 닮아 눈이 선홍색으로 반짝이는. 그렇지만 아내의 품에 안겨있는 아들을 만나게 된 순간 그는 크게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어. 무언가를 움켜쥐듯 다물린 아이의 주먹이 예사롭지가 않았거든.


 그는 아내의 품에서 아들을 받아들고 꽉 움켜쥔 아들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쳐 본 뒤에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어. 아이의 손에 푸른 빛깔이 도는 아주 작은 구슬이 쥐어져있었어. 그것을 놓지 않겠다는 냥 쥐고 있는 어린 아들의 모습에 청룡은 망연자실하게 아들을 끌어안았어. 그는 그게 무엇을 의미 하는 지 알고 있었어. 여의주. 자신과 같은 청룡의 증표. 아들은 자신의 뒤를 이어 청룡이 될 청룡후계자였던거야.


 그렇지만 아직 작은 봄꽃같은, 어쩌면 아직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같은 여리고 어린 아들이 져야할 삶의 무게에 그는 그것을 마냥 기뻐할 수 없었지. 청룡으로 태어난 용의 아이는 온전한 인간도, 용도 아니었고 이무기에 가까운 어중간한 존재였어. 용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청룡이 되지 못하면 이무기인 채로 살아야하는. 그리고 이무기는 짐승과 신수의 중간에 해당하기 때문에 부정한 것들의 영향을 받기가 쉬웠지. 이무기가 전설 속에 사악한 역할로 등장하는 것도 그때문이었어,


 그래도 청룡이 된다면야 그런 것 쯤은 문제가 없었어. 하지만 소중한 아들이 청룡이 되기위해 자신이 청룡이 될 때 느꼈던 고통과 절망을 겪어야 한다는 게 그는 견딜 수 없었지. 다른 사신들도 일정한 대가를 치루기는 하지만 청룡이 되기 위한 대가는 컸거든. 전대의 청룡이 가진 여의주를 깨부수어야만 완전한 사신강림을 하고 청룡이 될 수 있었는데, 그건 단순히 구슬 하나 깨는 문제가 아니었어. 여의주는 용의 심장과도 같은 것이었고 그게 깨지면 용은 죽어버리게 되어있었거든. 그러지 못하면 청룡 손에 죽는 거고. 그렇게 죽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해서 한쪽만이 살아 남아 청룡이 될 수 있었지.


 물론 이런 사실은 금기였기 때문에 속세의 사람들은 물론 청룡가문의 사람들도 알지 못했어. 그저 사신이 되면 청룡으로 일하다 하늘나라 신선이 되겠구나 생각했을 뿐이었지. 지금의 청룡도 자신도 자기 앞의 청룡과 싸워서 죽인 끝에 지금의 자리에 올랐는데, 그걸 아들이 반복한다는 걸 내버려둘 수 밖에 없는 게 끔찍했어. 이 품 안의 작은 아이에게, 소중하기 짝이 없는 아들에게 제 아버지를 죽여야만 하는 그런 잔인하고 끔찍한 살수의 운명을 지워줄 수 밖에 없다니 말이야.


 어떻게든 그 운명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었지만 청룡이 되지 못하면 언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이무기로서 살다 죽거나, 제 손에 죽게 되겠지. 그는 절망했지만 곧 방법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어. 아들이 자신을 죽이고 청룡이 된다. 그것 밖에는 답이 없어. 그리고도 아들이 자기 다음의  청룡 후계자들에게 죽이지 않도록 강하게 키우자.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그래서 누구도 아이를 해칠 수 없게.


 그러기 위해선 아들이 자신을 죽이는 것에 미련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그는 생각했어. 그래서 일부러 아이에게 매몰차게 대하고 사랑과 관심대신 무시와 무관심으로 아이를 키웠어. 아이를 사랑했지만 그 아이에게 사랑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 그래야만 아들이 강한 청룡이 되어 제 아비를 죽이고도 딛고 일어나 그 자릴 지킬 수 있을 테니까.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길을 만들어 주어야겠지.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그것을 다 자기가 해 줄 수 있으니 그대로 아들이 깔아놓은 길을 가도록 해야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는 아들에게 사랑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 대신 아들에게 가람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어. 그 이름에 평생의 사랑과 애정을 담아두고 묻어버렸지. 그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가람이라는 그 이름 뿐이었어. 그리고는 하늘로 올라가 자주 찾아오지도 않았고, 찾아 오더라도 아내에게만 살갑게 대했어. 하늘에선 늘 가람이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언제나 아들 앞에서는 매몰차게 굴었어. 그래서 아들이 자신을 증오하도록.


 그렇지만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가람은 어릴 때 부터 인간들 틈에서 유일하게 자신과 똑같은 아버지를 늘 따르고 사랑했지. 살을 맞대고 사는 제 엄마보다도 자기를 따랐어. 가끔씩 속세에 찾아올 때면  자신을 부르며 달려왔고 웃어댔지. 청룡도 그 웃는 얼굴에 똑같이 웃어주고 안아주고 손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참아야했고, 꾹국 감정을 눌러담으며 참았어. 더 매몰차고 차갑게.


 그런데도 자신을 미워하긴 커녕 어떻게든 제 눈길을 한번 받아보려 애쓰는 가람이었어. 커거면서 단 한 번도 자길 미워하려들지를 않았지. 속세에 들렀을 때 자기 아버지가 어쩜 그렇게 제 자식한테 모질고 무정하냐고 나무라고 타이를 때도 들은 척도 안했어. 가슴은 아팠지만 그게 가람이를 위한 가장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오히려 아들과 손자를 걱정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기도 아버지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속으로 되뇌이기만 했지.


그렇지만 여전히 아버지랍시고 자신을 따르는 가람이와, 그런 가람이의 빠른 성장에 청룡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 실력이 출중해서 어쩌면 자기보다도 빨리 청룡이 될 지 모르는데 여전히 아버지를 사랑하는 가람이가 자기를 죽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어. 저 상태로 커버려서 겪을 일 생각하면 가슴아프고, 걱정스럽기만 했어. 물론 아들에게 미안했고 아무것도 모르며 휘둘리는 아내와 아버지에게 오해를 받아가며 하는 짓들이었지만 그는 그렇다고 자신의 뜻을 꺾을 생각은 없었어. 


 그래서 결국 최강자전에서처럼 청룡은 가람이에게 극약처방을 가했지. 자기한테 의미있는 것은 아내뿐이며 사랑하는 것도 아내뿐이라고. 그래서 너는 빨리 내 자릴 물려줄 수 있는 훌륭하고 가치있는 존재라고 물건같은 취급을 하면서. 사실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지만. 그리고 대련 끝에 자기에 대한 분노를 가감없이 드러내며 외치는 가람이를 보고 마음 한구석이 쓰라렸지만 이젠 됬다고 생각하고 안심을 했어. 그렇지만 자신을 따르고 표정에 다 드러날 만큼 애정을 표현하던 가람이가 분노에 차서 외치는 말들과 사나운 눈빛이 가슴 아프긴 했지.


 그런데 그 뒤, 청룡은 중앙에 가서 수련하는 가람이를 지켜보면서 아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자신을 향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래서 가람이의 마음 속에 자신을 향한 증오만을 남기려고 행동했지. 애증에서 사랑을 떼어내고 증오와 독기밖에 남지 않게끔.


 그래서 순조롭게 중앙에서 지내는 가람이한테 어느날 찾아와서 위협하고 무시하며 옛날처럼 싸움을 붙인 다음 다시 한 번 처참하게 쓰러트린 후에 여전히 쓸모없다고 아예 쐐기를 박아버린다거나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사건을 계기로 가람이 마음 속엔 완전히 증오와 미움만이 남아버리고 가람이는 아버지에게 독을 품고 칼을 품었어. 청룡이 되기 위해, 그래서 아버지를 쓰러트리고 자기와 똑같은 마음을 겪게 해주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지도 않고 독하게 수련하고 노력해서 마침내 사신 강림에 완벽하게 성공하고 청룡문까지 열게 되겠지.


 청룡은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모든 게 자기 계획대로, 뜻대로 가고 있다고 믿었어. 비록 아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사랑하는 아내마저 힘들게 했지만 그게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라는 걸 의심하지 않았지. 그리고 가람이가 청룡문을 열고 제 앞에 나타났을 때 청룡이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에 대해 설명을 해 주겠지. 자신을 죽여야만 청룡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에 가람이 조금 동요하는 듯 했지만 이내 아버지에게 창을 들고 덤벼들었어.


살벌하게 창과 번개가 오가는 싸움 끝에 결국 죽게되는 건 당연히 청룡이겠지. 싸우는 와중에도 아들을 자극하고 상처주는 말들을 해대면서 아들이 더더욱 전의에 불타 자기 목숨을 가져갈 수 있도록. 그리고 마지막 일격을 가하고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분노에 차서 자길 죽이는 아들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손길 한 번 주지 않고 죽어버렸어. 이걸로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이제 자기 아들이 완전한 청룡이 되어 부정한 이무기가 되어 떠돌지 않아도 된다. 아비를 죽이는 패륜에 대해서도 사랑하지 않는 아비를 죽였기에 아마도 괜찮을 거다. 견딜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누구보다 강한 청룡이 되서 후계자들에게도 위협받지 않고 하늘의 신선으로서 잘 지낼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지.


 하지만 아버지가 눈을 감고, 가람이 아버지의 여의주를 짓밟아 깨트린 그 순간에 청룡의 비밀과 그동안의 기억과 마음이 가람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졌어. 그 때 가람이는 아버지가 어떤 생각으로 저를 그렇게 대했는지 깨달았고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고 아꼈다는 것을 깨닫겠지. 그리고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건 지도 깨달으면서 미칠 것 같은 자책감과 자기 혐오에 몸부림쳤어. 그렇지만 울면서 아버질 끌어안고 불러 봐도 죽은 아버지에게선 대답이 아무 대답이 없고, 그렇게 모든 걸 깨닫고 가람이는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어. 



애비 시점 끗...청가람, 주은찬 시점은 언젠가...ㄸㄹㄹ

캐릭터와 설정의 날조만이 난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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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가람 현대, 대학AU 

폐차 은찬 주의

다정한 벤츠 은찬이 없어요...








“우리 헤어져.”
“여보세요?”
“헤어지자고 주은찬”
“가람아. 뭐먹을 지 정했어?”
“....”
“난 게살 볶음밥이 좋은데, 너도?”
“멍청아, 나 볶음밥 싫어해. 짬뽕시켜.”
“네, 여기 게살 볶음밥 하나랑, 짬뽕 하나요. 단무지 많이 주시구요.”
“주은찬!”
“아, 어. 그래. 미안. 아까 뭐라고 그랬어?”

 그래도 공짜 밥은 마다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마침 배도 고팠고, 단골 중국집 쿠폰을 드디어 40개나 모았다며 사주겠다는 주은찬을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조미료 맛이 팍팍 나는 불은 짬뽕을 먹으면서 가람은 후회했다.


 그냥 자장면 시킬 걸. 아무리 거저로 주는 짬뽕이라고 해도 맛이 없어도 너무 없잖아? 한 입 먹고 입맛이 싹 가셨다. 공짜로 밥까지 얻어먹고 해어지자고 말하는 게 미안했는데, 덕분에 당당하게 해어지자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람은 망설이지 않고 내뱉었다. 우리 헤어져.


"그래."
"나 장난하는 거 아니거든?"
"그래. 그러자니까."

주은찬의 대답은 쿨했다. 그래. 놀라기는커녕 평소랑 다름없는 표정을 하고 ‘그래’란다. 왜? 어째서? 무슨 일이야? 하고 물어보는 것 정도는 기대하며 이유까지 준비해 두었던 가람은 기가 찼다. 무릎 위에 단정히 올려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고작 그 한마디로 끝내고 다시 군만두에 집중하는 주은찬이 괘씸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러냐? 나쁜 놈. 지금 나랑 밀당 하는 건가? 

아니면 이 자식 진짜 진심으로 나한테 아무 생각 없는 거 아니야? 

 사건은 일주일 전. 가람은 평소와 다름없이 은찬과 통화를 하며 집에 돌아가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람은 오늘 뭘 했는지, 별 일 없었는지. 수업을 들었는데 교수가 어떠했고, 팀플 하기 싫다는 둥 시시콜콜한 사담을 주고받으면서 집에 가던 길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통화를 하고 가다가 가람이 은찬과 마주쳤다는 거였다.


 집에서 과제를 하는 중이라고, 수화기 너머로 말하고 있던 은찬이 시내 한 복판에 있었다. 집에서 학교 앞까지 순간이동을 했을 리는 없고, 과제 한다는 놈이 왜 번화가에서 얼쩡거리고 있느냐 하는 게 궁금하긴 했지만 가람은 딱히 개의치는 않았다. 오히려 이참에 깜짝 놀래켜나 주자고 생각했을 뿐.

 그런데 길 건너 은찬에게 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순간, 가람은 한가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자연스럽게 여자를 옆에 끼고 당당하게 허리까지 안은 채로 제 쪽으로 걸어오던 은찬 때문이었다. 보통 친구나 가족끼리 친하다고 해도 그런 식으로 노골적이게 허리를 끌어 안는 법이 있던가? 


여전히 자신과 통화를 하면서, 맞은 편에 있던 여자를 옆에 끼고 걸어오는 은찬을 보면서 자신은 무슨 생각을 했던가? 그대로 머리가 싸늘하게 굳고, 힘이 빠졌다. 가람은 말없이 은찬과의 통화를 끊고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혹시 오해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다. 빨간 머리가 주은찬만 있는 것도 아니고, 시내라서 자신이 잘 못 본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주은찬에게 자신이 모르는 형제나 친적이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가람은 그것이 자신의 착각과 오해이길 빌었다.


 그런데 그날 밤 11시가 넘어 집에 도착해 다시 전화를 했을 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건 어디서 굴러 먹다 온 건지도 모를 계집애의 술 취한 목소리였다. 


"주은찬 이 시발 개새끼야!"

그렇게 소리치고, 가람은 그 날로 은찬의 번호를 폰에서 지웠다. 





별 것도 아닌 데 왜 화를 내고 그래? 네가 우리 엄마라도 되?

 그리고 헤어짐을 통보하려 문자를 보내니 주은찬은 더 가관인 문자로 답을 해왔다. 그래. 시발 내가 왜 니 엄마겠냐 다 니 좆대로 해라. 굳이 따지면 틀린 말 하나 없는데도 가람은 은찬이 괘씸하고 미웠고 하늘 같은 자존심에 나버린 상처를 되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헤어질 땐 헤어지더라도 반드시 사과를 받고 이겨 먹겠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니 입에선 은찬에게 하는 욕이 신기할 만큼 줄줄 나왔다. 평소 다정하고 배려 깊던 태도도 하나하나 들춰보니 자신을 순 바보 취급하는 것들이었고 오늘이 아니더라고 계집애들과 도 친했던 것 같았다. 가람은 알고 있는 욕들은 죄들먹이며, 너 같은 가벼운 애 나도 싫다. 내가 뭐가 아까워서 너같은 거랑 계속 사귀겠냐.그냥 헤어지자 하고 소리 치는 데까지 갔다.

 그렇지만 사과를 받겠다는 마음은 굽히질 못해 다음 날 학교에서 헤어지자고 완전히 못을 박았고 건성이지만, 어쨌든 사과를 받고, 짬뽕 얻어먹고 헤어지고 끝. 



그렇게 처음 해 본 연애가 웃기지도 않게 끝이 났다.


*




"-그래서 헤어졌어."
"등신."
"시끄러!"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는 그런 말 듣기 싫거든? 이 멍청아! 채워진 잔을 들어 털어 넣으며 가람이 백건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눈앞의 백건은 어디서 개가 짓나 하는 표정으로 코웃음이나 치며 고기를 향해 젓가락을 놀릴 뿐이었다. 씨이, 이거 다 내 돈인데. 투덜거렸더니 보란 듯이 먹는 속도까지 빨라진다.


 가람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어느새 백건이 채워준 잔을 한 번 더 비웠다. 아, 쓰다. 소주가 원래 이렇게 썼나 싶을 정도라 코끝이 찡했다. 하긴 이 상황에서 술이 달 것도 없다.


 홧김에 해어지자고 했더니 주은찬은 아무 연락도 없고, 어디 하소연 할 데가 없어서 부른 게 백건인데 이놈은 기껏 불러서 배부르게 먹여 줬더니, 말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먹기만 잘 먹는다. 심지어 이참에 아주 뽕을 뽑을 모양인가보다. 

 무섭도록 먹어치우는 백건의 모습에 가람은 슬슬 지갑 사정이 걱정됐다. 이 사람인지 돼지인지 모를 놈은 돈도 많으면서 치사하게시리! 돼지 같이 처먹는 꼴이 이놈은 저번에 4명분의 술값을 모조리 덤터기 씌운 것에 앙갚음을 하려는 게 분명했다. 


"야 백건 이 식충아! 망할 자식! 멍청한 게! 그만 먹어! 그만 먹으라고! 내 얘기 듣고는 있냐? 야!!! 내가 너 고기 두 개 집지 말라고 했잖아! 이 돼지야! 니가 사람이야?!"

 결국, 백건이 알바를 불러 추가주문을 시키려는 것에 인내심이 폭발해 버린 가람이 꼬인 지 오래인 혀를 놀려 소리쳤다.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술이 들어가서 그런 건지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눈을 찌를 듯이 얼굴에 대고 삿대질을 하자, 백건은 그제야 슬며시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듣는 시늉을 했다. 이 뻔뻔한 놈.

"주은찬 원래 그래. 내가 말했잖아 니 눈이 삔 거라고.말릴 땐 안듣더니 왜 이제와서 난리야?"
"고기 다 뱉어 새끼야."
"아, 그래. 청가람. 얼마나 속이 상했겠어? 그치? 그럼~우리 청가람이 어떤 놈인데. 주은찬이 다 잘못했네."
"그냥 나가 죽어 망할 자식.도움안되는 놈. 멍청이 아메바!"
"얼씨구. 야.아직도 그렇게 억울하면 이참에 주은찬 불러. 삼자대면해 삼자대면. 편은 들어줄게. 지금 전화할까?"
"하기만 해, 너 나한테 죽어! 야!!"


"가만 있어봐, 여보세요. 주은찬? 아 난데-"

[어. 빽건. 무슨 일이야?]


말리기도 전에 전화를 걸어버린 백건이 스피커폰을 켜 둔 탔에 가람은 속으로 욕을 곱씹으며 숨을 죽였다.


“지금 청가람이랑 나랑 만나서 한잔하고 있는데 2차 가려고 하거든?”


[...2차 어디로 가게?]


"거기 학교 앞에 았는 데-"

설마 오는 건 아니겠지. 가람은 가슴을 졸이며 스피커폰 너머 은찬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올 거야?"

[아니,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근데 거기 안주 맛없어. 참, 가람이보고 내일 물건 좀 챙겨서 택배좀 보내달라고 말해줘, 그럼 나 바빠서, 이만 끊을게.]

"씨발..."

 깔끔하게 끊기는 수화음을 들으며 가람은 무심하게 백건을 쳐다보았다. 

"....야, 청가람."
"뭐! 왜! 뭐!"

 여기 소주 두병 추가요! 울컥하는 무언가를 참고 삼키며 가람은 크게 소리쳤다. 
개새끼. 니가 거기서 무슨 안주를 쳐먹었는지 나는 알지도 못했다. 보나마나 다른 계집애들이랑 갔다왔겠지!



*


휘청휘청, 위태로운 갈 지 之자 걸음으로 걷다 멈춘 가람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도 한 움큼씩이나 보였다. 

씨이, 별도 저렇게 많은데, 나는 왜 혼자고, 
주은찬 자식은 왜 연락이 하나도 없냐구. 
아, 나 취하면 추위타는데. 
이게 다 주은찬 때문이야. 
주은찬 나쁜 놈, 멍청이, 해삼 멍게 말미잘. 
나-쁜놈.

중얼거리자 여민 목도리 사이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생각해보니 목도리도 주은찬 거다. 은찬은 밥 먹었냐는 것부터 시작해서 별 시시한 것들에 까지 관심을 가지고 챙기려드는 다정함이 싫지 않았다. 매일 귀가 길에 소소하게 통화를 하는 것도 마음이 간질간질 거려 연애를 한다는 게 실감이 나서 좋았다.


 그런데 그 모든 게 하룻밤 꿈처럼 사라졌다. 모든 게 후회스러웠다.


 정말로 해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이미 헤어졌지만, 은찬에게서 아니라는 말이 나오길 기대하며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오기로 이별 선언을 했던 가람의 마음은 이제 진흙탕에 구르고 있었다. 사실 지금도 조금은 거짓말 같아서, 은찬의 다정함에 기대하며 가람은 조금만 더 버티면 미안하다며 사과해 올 것만 은찬을 떠올렸다.

빨개진 코끝을 훌쩍이며 가람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었다. 아무 연락이 없다는 걸 알리듯 화면은 말끔했다. 은찬의 번호까지 꾹꾹 입력했지만 통화버튼 누르는 것을 망설였다. 전화를 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결국 코너를 돌고 건널목을 지나갈 때 까지 가람의 소심한 망설임은 이어졌다. 

정말로, 조금만 더 있으면 먼저 전화든 문자들 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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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세한(歲寒)
,

[백훈현오] 영원의 의미

2014. 11. 30. 22:46

백훈X현오


영원의 의미




 꼬박 백일 동안 피어있다 저버린다는 바닷가의 붉은 꽃처럼 인간의 청춘은 아름답고 짧다. 잠을 자고 있는 사이 조용히 떨어진 꽃처럼, 깨닫고 나면 이미 손아귀에서 사라진 모레 알갱이처럼, 바람인 듯 밀려오고 쓸려가는 파도인 듯.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天長地久有時盡

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가 있건만

 

次恨線線無絶期

이 한은 끝없이 계속되네.




 태어날 때부터 영원을 약속받은 백훈은 때 지난 꽃은 시들고 열매가 썩는 지상의 생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돌고 도는 세상의 원리도, 그리하여 변화하는 세상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해서 그는 자신이 가진 영원한 젊음만을 사랑했다.


 모두가 저무는 자신의 삶을 두려워 할 때 지지 않는 봄을 누리며 그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이였으므로, 그는 한 번도 지상의 것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나고 자란 땅에 대한 애착도, 피붙이에 대한 정도. 이 땅의 모든 것은 잠시 스쳐 지나는 인연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깎이고 쓸려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존재들에 관심과 정을 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 무한한 것. 태어나는 순간 서쪽을 향해 저물어가는 지상의 생명들은 오히려 혐오스러웠다. 그것은 낫지 못할 병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는 어리석고 가여운 것들이었다. 그것을 즐기지 못하고 허비하는 것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불쌍했다.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



 오로지 하늘만을 바라고 원하며 자란 백훈은 언제나 자신은 특별하다는 것만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자부심

이자 다짐이자 신념이었고 그가 땅으로부터 받은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다.



"세상에 완벽한 건 아무것도 없더군."



 나는 예외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현오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백훈은 말했다. 반으로 질끈 묶어놓은 것을 풀어내자 흰 등줄기 위로 검은 물결이 부드럽게 요동친다. 퍼지는 향기는 동백의 것이던가. 흘러내린 머리끈에선 짙은 꽃향기가 났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음과 양의 원리에 따라 나뉘고 각자 나고 자라 돌고 돌지."


 장막처럼 드리운 검은 머리카락 사이를 손으로 갈랐다. 갈무리하는 손길에 긴장하는 반응을 즐기듯 느릿하게, 하지만 조심스럽게. 앞머리 모양을 잡아주고, 숱이 풍성한 뒷머리를 한 올 한 올 갈무리하며 마침내 귀 밑 잔머리까지 남김없이 정리해 모으자 손 안에 모인 부드러운 흑단이 한 움큼 들어왔다.


"때문에 신神이라 할지라도 불완전한 존재들이야"


백훈은 몇 번 빗질을 더한 뒤 조심스러운 손길로 현오의 머리칼을 틀어쥐고 말아 올렸다. 꽃처럼 화려한 붉은 보석과 검은 머리카락이 흰목과 대비를 이루는 뒷태는 곡선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관능적이었다. 백훈은 만족의 표시로 단정한 목줄기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불완전한 것들은 서로에게 없는 것을 찾아 탐하게 되고."

".....그만..."


 불안한 눈이 움찔, 뒤를 돌아본다. 영락없이 겁먹은 얼굴이다. 아아, 역시 참을 수가 없다. 정염에 차 붉어진 눈가와 물기 젖은 검은 두 눈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애정이 끓어올랐다. 백훈은 그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고스란히 전해지는 숨소리와 작은 떨림, 바짝 오른 열기 가 도화선처럼...





*




"아, 아앗, 응...그만!..하아..!"

"그만? 정말로 그만해도 좋아? 이렇게 바짝 물고 늘어지는 데?정말로 그만둘까?"

"그런,거.아아.잠,깐..앗,응,응..!"


 지금의 현무 후계자를 도와 달라. 현무 후계자와 차기 가주가 가문 전체를 상대로 내던지는 승부수가 흥미로웠던 백훈은 그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느냐 물었다. 현오는 무엇이든 주겠노라 백훈에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백훈은 섹스를 했다.


 처음에는 현무가 차기 가주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유약해 보이는 인상과 여린 심성에 대한 작은 호기심이었던가. 그런 주제에 대담한 제안을 했던 것 때문에 백훈은 현오에게 관심을 가졌다. 현무가 차기 가주가 아니었다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텐데 흥미는 호감이 되고, 호감이 깊어져 애정이 됐다.


그 애정을 깨달았을 때, 백훈은 금욕과 절제로 똘똘 뭉친 얼굴을 하고 누군가에게 속죄하듯 진흙탕 속을 구르는 현오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미련하게 스스로 진창을 나올 생각은 하지 않고 속죄라는 이름으로 자학을 계속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백훈은 수렁에서 그를 건져 올릴 힘이 있었다. 제가 필요하다 말만 한다면.


 그러나 견고한 껍질 속에 숨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현오의 행동에 그렇다면 제 손으로 이 남자의 전부를 죄 파헤치고, 속살을 끄집어내 폭로해버리고 싶다고 백훈은 생각할 때가 많아졌.


"하읏, 응! 아아, 훈, 아, 으, 백훈..!!"

"혼자 흔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만져줬으면 좋겠지? 이렇게 만지면서, 이렇게 부술 듯이 실컷 흔들어 주면 좋겠지?"

"좋아,..!좋아요..더, 해줘..아앗.아,응..응..!!"

"말해. 뭘 원하는지. 스스로,현오 네 입으로 말해봐."

"...아,응..! 만져줘요. 더 힘껏 박고 쑤셔,,서...하앗,,흐.."


 한 번도 무언가를 쫒아 본 적이 없다.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백훈은 불완전한 것들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홀로 완전했다. 인생에 있어 한 번도 봄이 아닌 적은 없다. 저무는 가을을 다스리며 죽어가는 온갖 것들의 생을 끊어내면서도 그 슬픔과 안타까운 원성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계절은 언제나 홀로 풍성하고 만개한 봄이었다.


그런데 원하는 것이 생겼다. 때문에 백훈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달았다. 제가 가진 영원한 젊음과 무한한 시간을 남자와 결코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이 잔인한 세상의 이치를 백훈으로 하여금 깨닫게 했다. 모든 것은 불완전하고, 음양으로 나뉜 만물은 그렇게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맨다. 알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그것을 백훈은 가슴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살아있는 것들, 시든 꽃과 썩어가는 열매와 지는 해. 끝이 있는 모든 것의 가치와 아름다움. 언젠가 저물고 말 지상의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것이 가진 슬픔과 안타까움 때문이리라.



"아아아...!"



 백훈은 현오의 팔을 붙잡고 잡아당기며 허릴 흔들었다. 굳게 다물린 금욕적인 입술이 천박한 말들을 뱉어 내고, 신음을 토해내며 운다. 거침없는 허릿짓을 따라 흰 몸이 흔들리고 기어코 제 위에서 파정하는 모습이 야했다.


발가벗겨진 자신을 깨닫는 순간, 가장 순수한 감정이 그 얼굴에 드러나는 그 때. 현오는 오직 섹스로만 솔직해졌다. 자신의 품에서 감정을 토해내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토로하고, 진흙탕 속에서 속으로 바라던 구원에 대한 비겁하고 추잡하며 천박한 바람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롭고 아슬아슬하지만 간절하게.


"아직, 아직이지? 더 만져주고, 박아줬으면 좋겠지? 얼른.말해봐."

"아, 아응! 거기, 세게! 더,세게 해주세요. 하아..!"

"이름 불러. 하, 응? 내 이름 부르면서-빨리."

"흐, 훈, 백훈...!!아아, 좋아요, 좋아, 안에다..하아..."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다. 그 때를 놓치는 생은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생이었다. 때문에 백훈은 평생을 진흙탕 속에서 구르면서 지려하는 남자의 허비되는 젊음과, 청춘과, 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처연하게만 느껴지는 눈물과 달뜬 목울음에 백훈은 현오의 엉킨 머리칼을 쥐어잡고 몸을 바짝 끌어 당겼다.


"계속, 계속 불러야지. 내이름."

"응...읏..!하아...하...읏..!!"

"하아, 현오야...."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하다. 손을 뻗으면 끌어내는 건 순간이다. 하늘이 정한 불문율 따위 문제없다. 한 번, 딱 한번이면 모든 건 끝날 텐데. 제 손으로 모든 것을 베어내고 끊어내어 햇빛 아래로 그를 건져낼 수 있는데. 벌어진 입술위로 키스를 하며 그는 사정을 했다. 


모든 것이 끝난 자리에선 썩기 직전 과일의 농밀하고 짙은 향처럼 눅진한 냄새가 났다.




*



"그건 네가 가지고 있어."



비취가 세공된 은으로 만든 작은 상자를 건네주며 백훈이 말했다. 현오는 그 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상자를 열자 꽃을 연상시키는 화려하고 섬세한 장신구가 반짝였다. 값비싸 보이는 데다 하늘의 백호가 주는 것이니 필경 하늘의 물건일 게 틀림없다.



잘,..가지고 있겠습니다.



  받아둬도 되는 건지. 현오는 조용히 백훈이 쥐어준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것의 의미를 알까. 말하지 않아도 짐작 가는 바는 있었지만 현오는 그것의 의미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햇살같이 곧고 밝은 눈빛처럼 제가 생각한 대답이 그 입에서 거침없이 나올 것을 생각하면 두려웠다.




대답을 감당할 자신은 없다.




"간다."

"...안녕히가세요."




 나는 나이를 먹고 늙어갈겁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영원이나 순환하는 세상의 이치 따위는 알지 못해요. 갖지 못한 나머지를 찾으며 헤매는 것이 당신이 말하는 인생이라면, 영원을 쫒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 걸요. 당신은 변하지 않을 테고 영원 속에 있겠지만 나는 변해가고, 사라지겠죠.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도 겹치지 않는 평행선처럼.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가 지듯, 해가지면 달이 뜨듯, 시든 꽃과 썩어버린 열매처럼 나는 그렇게 저물어 갈 거예요.




"그렇지만 좋아해요."



 파란 새벽빛으로 가득찬 방안에서 백훈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현오는 중얼거렸다. 현무가로 부터 벗어날 수 없다. 현우를 버릴 수도 없다. 그건 스스로 했던 약속이었다. 각오이기도 했다. 언제까지라도, 어떤 형태라도, 자신은 현우를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지상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존재에게 어떠한 말도, 약속도, 기대도 영원이 될 수 없다.

무쓸모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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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세한(歲寒)
,

[투현] 유디트

2014. 11. 28.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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