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훈현오] 영원의 의미

2014. 11. 30. 22:46

백훈X현오


영원의 의미




 꼬박 백일 동안 피어있다 저버린다는 바닷가의 붉은 꽃처럼 인간의 청춘은 아름답고 짧다. 잠을 자고 있는 사이 조용히 떨어진 꽃처럼, 깨닫고 나면 이미 손아귀에서 사라진 모레 알갱이처럼, 바람인 듯 밀려오고 쓸려가는 파도인 듯.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天長地久有時盡

높은 하늘 넓은 땅 다할 때가 있건만

 

次恨線線無絶期

이 한은 끝없이 계속되네.




 태어날 때부터 영원을 약속받은 백훈은 때 지난 꽃은 시들고 열매가 썩는 지상의 생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돌고 도는 세상의 원리도, 그리하여 변화하는 세상도 납득할 수가 없었다. 해서 그는 자신이 가진 영원한 젊음만을 사랑했다.


 모두가 저무는 자신의 삶을 두려워 할 때 지지 않는 봄을 누리며 그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유일한 이였으므로, 그는 한 번도 지상의 것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나고 자란 땅에 대한 애착도, 피붙이에 대한 정도. 이 땅의 모든 것은 잠시 스쳐 지나는 인연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깎이고 쓸려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존재들에 관심과 정을 줄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 무한한 것. 태어나는 순간 서쪽을 향해 저물어가는 지상의 생명들은 오히려 혐오스러웠다. 그것은 낫지 못할 병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는 어리석고 가여운 것들이었다. 그것을 즐기지 못하고 허비하는 것들은 그 중에서도 가장 불쌍했다.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



 오로지 하늘만을 바라고 원하며 자란 백훈은 언제나 자신은 특별하다는 것만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자부심

이자 다짐이자 신념이었고 그가 땅으로부터 받은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다.



"세상에 완벽한 건 아무것도 없더군."



 나는 예외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현오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백훈은 말했다. 반으로 질끈 묶어놓은 것을 풀어내자 흰 등줄기 위로 검은 물결이 부드럽게 요동친다. 퍼지는 향기는 동백의 것이던가. 흘러내린 머리끈에선 짙은 꽃향기가 났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음과 양의 원리에 따라 나뉘고 각자 나고 자라 돌고 돌지."


 장막처럼 드리운 검은 머리카락 사이를 손으로 갈랐다. 갈무리하는 손길에 긴장하는 반응을 즐기듯 느릿하게, 하지만 조심스럽게. 앞머리 모양을 잡아주고, 숱이 풍성한 뒷머리를 한 올 한 올 갈무리하며 마침내 귀 밑 잔머리까지 남김없이 정리해 모으자 손 안에 모인 부드러운 흑단이 한 움큼 들어왔다.


"때문에 신神이라 할지라도 불완전한 존재들이야"


백훈은 몇 번 빗질을 더한 뒤 조심스러운 손길로 현오의 머리칼을 틀어쥐고 말아 올렸다. 꽃처럼 화려한 붉은 보석과 검은 머리카락이 흰목과 대비를 이루는 뒷태는 곡선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관능적이었다. 백훈은 만족의 표시로 단정한 목줄기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불완전한 것들은 서로에게 없는 것을 찾아 탐하게 되고."

".....그만..."


 불안한 눈이 움찔, 뒤를 돌아본다. 영락없이 겁먹은 얼굴이다. 아아, 역시 참을 수가 없다. 정염에 차 붉어진 눈가와 물기 젖은 검은 두 눈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애정이 끓어올랐다. 백훈은 그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고스란히 전해지는 숨소리와 작은 떨림, 바짝 오른 열기 가 도화선처럼...





*




"아, 아앗, 응...그만!..하아..!"

"그만? 정말로 그만해도 좋아? 이렇게 바짝 물고 늘어지는 데?정말로 그만둘까?"

"그런,거.아아.잠,깐..앗,응,응..!"


 지금의 현무 후계자를 도와 달라. 현무 후계자와 차기 가주가 가문 전체를 상대로 내던지는 승부수가 흥미로웠던 백훈은 그 대가로 무엇을 줄 수 있느냐 물었다. 현오는 무엇이든 주겠노라 백훈에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 백훈은 섹스를 했다.


 처음에는 현무가 차기 가주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유약해 보이는 인상과 여린 심성에 대한 작은 호기심이었던가. 그런 주제에 대담한 제안을 했던 것 때문에 백훈은 현오에게 관심을 가졌다. 현무가 차기 가주가 아니었다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텐데 흥미는 호감이 되고, 호감이 깊어져 애정이 됐다.


그 애정을 깨달았을 때, 백훈은 금욕과 절제로 똘똘 뭉친 얼굴을 하고 누군가에게 속죄하듯 진흙탕 속을 구르는 현오에게 화가 났다. 그러나 미련하게 스스로 진창을 나올 생각은 하지 않고 속죄라는 이름으로 자학을 계속하는 모습 때문이었다. 백훈은 수렁에서 그를 건져 올릴 힘이 있었다. 제가 필요하다 말만 한다면.


 그러나 견고한 껍질 속에 숨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현오의 행동에 그렇다면 제 손으로 이 남자의 전부를 죄 파헤치고, 속살을 끄집어내 폭로해버리고 싶다고 백훈은 생각할 때가 많아졌.


"하읏, 응! 아아, 훈, 아, 으, 백훈..!!"

"혼자 흔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만져줬으면 좋겠지? 이렇게 만지면서, 이렇게 부술 듯이 실컷 흔들어 주면 좋겠지?"

"좋아,..!좋아요..더, 해줘..아앗.아,응..응..!!"

"말해. 뭘 원하는지. 스스로,현오 네 입으로 말해봐."

"...아,응..! 만져줘요. 더 힘껏 박고 쑤셔,,서...하앗,,흐.."


 한 번도 무언가를 쫒아 본 적이 없다.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백훈은 불완전한 것들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홀로 완전했다. 인생에 있어 한 번도 봄이 아닌 적은 없다. 저무는 가을을 다스리며 죽어가는 온갖 것들의 생을 끊어내면서도 그 슬픔과 안타까운 원성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계절은 언제나 홀로 풍성하고 만개한 봄이었다.


그런데 원하는 것이 생겼다. 때문에 백훈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달았다. 제가 가진 영원한 젊음과 무한한 시간을 남자와 결코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이 잔인한 세상의 이치를 백훈으로 하여금 깨닫게 했다. 모든 것은 불완전하고, 음양으로 나뉜 만물은 그렇게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맨다. 알지만 이해할 수 없었던 그것을 백훈은 가슴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살아있는 것들, 시든 꽃과 썩어가는 열매와 지는 해. 끝이 있는 모든 것의 가치와 아름다움. 언젠가 저물고 말 지상의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것이 가진 슬픔과 안타까움 때문이리라.



"아아아...!"



 백훈은 현오의 팔을 붙잡고 잡아당기며 허릴 흔들었다. 굳게 다물린 금욕적인 입술이 천박한 말들을 뱉어 내고, 신음을 토해내며 운다. 거침없는 허릿짓을 따라 흰 몸이 흔들리고 기어코 제 위에서 파정하는 모습이 야했다.


발가벗겨진 자신을 깨닫는 순간, 가장 순수한 감정이 그 얼굴에 드러나는 그 때. 현오는 오직 섹스로만 솔직해졌다. 자신의 품에서 감정을 토해내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에 대한 죄책감을 토로하고, 진흙탕 속에서 속으로 바라던 구원에 대한 비겁하고 추잡하며 천박한 바람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롭고 아슬아슬하지만 간절하게.


"아직, 아직이지? 더 만져주고, 박아줬으면 좋겠지? 얼른.말해봐."

"아, 아응! 거기, 세게! 더,세게 해주세요. 하아..!"

"이름 불러. 하, 응? 내 이름 부르면서-빨리."

"흐, 훈, 백훈...!!아아, 좋아요, 좋아, 안에다..하아..."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다. 그 때를 놓치는 생은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생이었다. 때문에 백훈은 평생을 진흙탕 속에서 구르면서 지려하는 남자의 허비되는 젊음과, 청춘과, 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처연하게만 느껴지는 눈물과 달뜬 목울음에 백훈은 현오의 엉킨 머리칼을 쥐어잡고 몸을 바짝 끌어 당겼다.


"계속, 계속 불러야지. 내이름."

"응...읏..!하아...하...읏..!!"

"하아, 현오야...."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한 번이면 족하다. 손을 뻗으면 끌어내는 건 순간이다. 하늘이 정한 불문율 따위 문제없다. 한 번, 딱 한번이면 모든 건 끝날 텐데. 제 손으로 모든 것을 베어내고 끊어내어 햇빛 아래로 그를 건져낼 수 있는데. 벌어진 입술위로 키스를 하며 그는 사정을 했다. 


모든 것이 끝난 자리에선 썩기 직전 과일의 농밀하고 짙은 향처럼 눅진한 냄새가 났다.




*



"그건 네가 가지고 있어."



비취가 세공된 은으로 만든 작은 상자를 건네주며 백훈이 말했다. 현오는 그 안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상자를 열자 꽃을 연상시키는 화려하고 섬세한 장신구가 반짝였다. 값비싸 보이는 데다 하늘의 백호가 주는 것이니 필경 하늘의 물건일 게 틀림없다.



잘,..가지고 있겠습니다.



  받아둬도 되는 건지. 현오는 조용히 백훈이 쥐어준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것의 의미를 알까. 말하지 않아도 짐작 가는 바는 있었지만 현오는 그것의 의미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햇살같이 곧고 밝은 눈빛처럼 제가 생각한 대답이 그 입에서 거침없이 나올 것을 생각하면 두려웠다.




대답을 감당할 자신은 없다.




"간다."

"...안녕히가세요."




 나는 나이를 먹고 늙어갈겁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영원이나 순환하는 세상의 이치 따위는 알지 못해요. 갖지 못한 나머지를 찾으며 헤매는 것이 당신이 말하는 인생이라면, 영원을 쫒는 건 너무 고통스러운 걸요. 당신은 변하지 않을 테고 영원 속에 있겠지만 나는 변해가고, 사라지겠죠.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도 겹치지 않는 평행선처럼.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가 지듯, 해가지면 달이 뜨듯, 시든 꽃과 썩어버린 열매처럼 나는 그렇게 저물어 갈 거예요.




"그렇지만 좋아해요."



 파란 새벽빛으로 가득찬 방안에서 백훈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현오는 중얼거렸다. 현무가로 부터 벗어날 수 없다. 현우를 버릴 수도 없다. 그건 스스로 했던 약속이었다. 각오이기도 했다. 언제까지라도, 어떤 형태라도, 자신은 현우를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지상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존재에게 어떠한 말도, 약속도, 기대도 영원이 될 수 없다.

무쓸모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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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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