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찬X청가람

끝에는 끝없이 너와 나만이





고전AU

소년 황제 청가람과 주은찬

사망소재 주의





울어?


 먹먹한 하늘 사이로 햇빛이 힐끔거리매 눈으로 뒤덮인 땅이 온통 새하얗게 빛났다. 백옥을 빻아 가루를 낸 듯, 햇살에 녹아내린 눈발은 보드라웠다. 따스한 햇살과 폭신한 눈발은 잠들어 가는 이의 몸을 다정히 어루만져 감싸 안았다. 희다 못해 색이 싹 가신 창백한 얼굴. 무(無)에 가까운 빛깔 속에 붉디붉은 입술 하나.


 티 한 점 없이 맑은  피부와 수줍었던 장밋빛 뺨을 가진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매화같이 곱고 생기 넘치던 소년 대신 꽃잎이 떨어지듯, 봄이 채 오기 전에 힘없이 모가지를 떨 구고 마는 동백처럼 마지막 생명줄을 간신히 쥐고 있는 작은 소년이 있을 뿐. 그렇게 소년의 삶의 흔적은 조금씩 하나하나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안 울어.

울지 마. 멍청아.



 아예 모든 걸 쏟아 붓고 갈 듯 피를 토해내는 모습에 은찬은 작은 손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가람 또한 야속했다. 울지 말라며 끝까지 단호한 그 모습이 죽도록 밉다. 너는 알까? 내가 너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내 가슴에서 피를 토하는 것을. 붙잡고 매달리어 가지 말라 울고 떼를 쓰고 싶은 것을.


 설원 위로 난자한 핏자국이 우련 붉었다. 누군가의 생을 빼앗아 발하는 붉은 도료는 그럼에도 화선지에 흩쳐 그려놓은 꽃잎 같다. 지독하게 어울리는 모습에, 그 순간 쓰러진 이의 몸에선 다시 한 번 선혈이 솟구쳤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색이었던 붉은 색이 지금만큼은 죽도록 싫다.


 다시금 꽃잎이 하나 둘 진다. 가람의 위로 붉게 흩어진다. 핏방울이 튀고, 번지는 핏자국에 정신은 아찔해져갔다.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혈을 해 보지만 손가락 사이로 울컥울컥 새는 뜨뜻미지근한 핏물이 그칠 줄을 몰랐다. 그 때, 돌연 가람이 한층 파리해진 얼굴로 웃었다. 울지 말라고 했잖아. 

꾹 깨문 제 입술에, 차가운 손가락이 닿는다. 

짓이겨진 입술을 느릿하게 어루만지는 그것은 슬픈 온정이다.



울지마 주은찬.



 웃어. 그 말에 깊은 상실감이 솟구쳤다. 아, 이제 마지막이구나. 울컥 올라오는 서러움에 눈물이 방울졌을 때 공기를 가르고 기침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아니. 아니야. 나 안울어. 봐, 이렇게, 웃고 있잖아. 은찬은 혹 제 눈물이 보기 싫어 가람이 짖굳은 농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희망을 걸고 있는 것처럼 가람을 향해 필사적으로 웃어보였다. 가람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바스라질 듯 희미한 가람의 미소에 은찬은 막연한 상실감이 뼈와 살을 덧대어 완전한 형체로 거듭나는 것이 느껴졌다. 더욱 창백해지는 그의 얼굴에서, 핏물 가득한 채 곡선을 그리는 입술에서, 야트막해진 숨소리에서. 그가 숨을 쉴 때마다 내 쉬는 숨에선 피비린내가 났다. 죽음이 한 풀 가까워 진 것이다. 



이제는 쉬어야지.



  겨우 뱉어낸 말에 은찬은 마지막을 느꼈다. 작은 몸에 지워졌을 짐들을 더 이상 가람에게 차마 지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의 정점.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절대 지존의 자리. 부모와 형제조차 허용치 않아야만 지킬 수 있는 군자의 패도(覇道). 그것이 가람의 슬픈 인생이었기에 은찬은 차마 마지막 순간까지 가람에게 그것을 지고 가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은찬에게 가람은 늘 그저 작고 작은 아이었을 뿐이다. 황제의 심장은 얼어붙어있다는 세간의 소문과 달리 가람은 유리로 만든 검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도 아비의 정에 목말라 속으로 울부짖고 기댈 곳을 찾는 여린, 그래서 곁에 있고 싶고 지켜주고 싶은 이였다.


 해서 약조 하지 않았던가. 내게는 그러지 말라. 나는 너를 내몬 것들로부터 너를 지키겠다. 몇 번을 부탁하고 받아낸 약조가 참으로 헛되다. 끝까지, 그렇게 홀로 서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외로워. 하여 너를 놓지 않겠다고 약조 하였는데, 네가 나를 버린다면 나는 어찌하나. 여기에, 이 하늘 아래 너를 잃고. 



살아야지....나랑...



 남쪽으로 가자. 따뜻한 곳으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너와 나 둘이서만. 차라리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 된다면, 당신이 나를 위해서라도 살아달라고 은찬은 가람에게 빌었다. 스스로 죽지 못하는 모진 목숨을 살려놓고, 자신을 위해 살라 가람이 제게 말하였듯 이번에는 너 또한 저를 위해 살아달라고.



주은찬



 허나 돌아오는 이 봄에는 저 혼자일 테다. 은찬은 그것을 안다. 그러면, 그러면 자신은 혼자가 되어 꽃이 피고 지길 반복하는 그 무수한 시간들을 홀로 또 얼마나 흘려보내야 할까. 그러나 자신의 목숨은 가람의 것이었다. 허니 그 없인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닌 무력하고 허무한 삶일 뿐일 테지.


 뇌리를 관통하는 섬뜩한 발상에 그는 그것을 떨쳐내듯 힘없이 늘어진 이의 차가운 손을 붙잡았다. 덜덜덜 손이 떨린다. 매달리듯, 간청하듯, 나를 버리지 말라고. 그렇게.  앳된 얼굴이 안쓰럽게 웃는다. 결국 은찬은 왈칵 울음을 터트리며 가람을 부둥켜안았다.



미안해.

죽지마, 청가람. 죽지마 제발.

아버지 한테 죽기는 싫어.



 마지막 진심에 목이 막혔다. 떠나는 이는 단호하다. 가지 말아. 나를 두고 가지마. 차마 할 수 없는 말은 오열이 되어 뚝뚝 굵은 눈물이 방울져 쉴 새 없이 떨어지고 흐른다. 젖은 뺨 위로 아직 따뜻한 손이 닿는다. 바보야, 웃으라니까. 은찬은 그 손을 부여잡으며 재빨리 피 묻은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부탁할게.



 너밖엔 없어. 가람의 실없는 웃음소리가 기침과 함께 들려왔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이의 그것과는 달리 가벼운 웃음이었다. 그것이 그의 것인가 자신의 것인가. 흐느낌인지 환희인지 알 수 없는 웃음소리가 공간을 메운다. 아마도, 서로를 향해 웃음 지음이다. 



바다가 좋겠지?

제발- 



 가람의 손은 잔인하게도 은찬에게 검을 쥐어주면서 은찬의 뒤통수를 감쌌다. 가람의 팔이 자신을 끌어 당긴다. 입술은 금세 사뿐히 맞닿았다. 꽃잎이 떨어지듯. 은찬은 핏물 가득한 가람의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식어가는 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입안의 온기가 혀와 입술을 적셨다.


 숨결에 섞여 올라오는 피냄새가 짙다. 은찬은 제 입안으로 피가 흘러들기에 그것을 남김없이 핥아 삼켰다. 마지막인듯, 절박하고 간절히. 가람의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그것은 제게 주어지는 생의 의지였다. 허나 기어코 모양을 갖추어 완성된 상실감에 입을 맞추는 내내 은찬은 울었다.


 가람 또한 우는 건지 비릿한 피 냄새와 짭짤한 물 내음이 한데 섞여 얼굴을 뒤덮었다. 위로하듯 끌어안은 목덜미를 가람이 부드럽게 문질렀다. 안녕. 다정한 작별에 은찬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다잡았다. 최대한 고통없이, 가람을 보낼 수 있도록.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다못해 더디게 흘렀으면. 억겁의 시간이라도 이 순간엔 찰나이건만.




*





 눈이 씻겨나간 자리는 보드랍고 기름진 흙으로 충만했다. 평화로운 파도소리가 귀를 적셨다. 은찬은 무릎을 꿇어 어미의 품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황갈색 흙더미를 손에 쥐어 보았다. 흙은 부드럽게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흙구덩이 위로는 철모르고 피어난 매화를 이미 한껏 쏟아 부은 참이었다. 



이 곳이면 될까. 꽃이 충만한 동쪽 바다. 이곳이면, 한 평생을 살얼음판 속에 살다간 가람을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을까. 슬픔도 괴로움도 없이 그가 편히 쉴 수 있을까. 



 은찬은 고개를 들었다. 서(西)로 기우는 주홍빛은 포근했다. 그러나 허락 되지 않은 자의 시선을 차단하듯 눈이 시려와 은찬은 지는 해 너머 서방의 낙토를 볼 수는 없었다. 서글픈 금빛에 은찬은 시선을 옮겨 가람이 그렇게 원하던 바다를 내려 보았다.


 절벽 아래의 바다는 환희의 순간을 맞이하듯 반짝인다.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에 모든 것이 사무치게 서글프게만 느껴졌다. 네가 살라 해서 나는 갈 수 없는 곳. 바다를 건너 내달려 가람이 다다를 끝을 상상하자 가슴이 먹먹히 미어져왔다.


안녕 청가람.


 마지막으로 차갑게 식어 버린 이를 다시금 어루만져본다. 결국 채 봄을 맞이하지 못하고 떠나버린 가람의 몸은 더 이상 어제와 같지 않다. 작은 새같은 몸을 하고 강하게 버티던 가람만의 생기도,부드러웠던 뺨도, 따뜻했던 두 손도 없이 가람은 그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제 손으로 감긴 눈은 뜨일 생각이 없다. 그나마 붉던 입술마저 색을 잃고 질린 그것은 완벽한 상실이었다. 그것에, 은찬은 다시 한 번 입을 맞춘다. 딱딱하고 차갑게 굳은 입술에 제 입술을 부비며 파묻는다. 여즉 남은 피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을 스쳤다.



 그렇게 나는,붉은 비단 위에 너를 두고 걸어간다. 대신에 너 없이는 두 번다시 살아서 봄을 맞이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니 너를 여기에 묻어두고, 너와 함께 나의 봄 또한 묻는다. 나는 그리 할래. 죽음으로서 나를 떼어 놓는 다면 그것은 단지 잠깐의 겨울기고 이별이겠지. 그리하여 너를 다시 만날 날 봄은 찾아오면-



 꽃으로 메운 구덩이 위로 식은 몸을 누이며 은찬은 무릎을 꿇어 제 상체를 기대었다. 작은 몸에서는 익숙한 온기와 박동대신 시리고 낯선 적막이 흘렀다.



그러면 괜찮아, 나는 다시 널 만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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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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