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찬x백건

기담 奇談

01



백건의 장례식 절차는 간소했다.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임종이 없어 초혼이나 곡도 없었다. 시신이 없어 문중 선산에도 묻히지 못하게 되었다고. 다만 백건은 그 집안의 유일한 장손이었기에 먼저 간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나마 신위와 향불이 놓였다. 그러나 첫째 날 아침 병풍 너머 관 속에는 백건의 시신 대신 산에서 발견된 백건의 술띠가 들어있었다.


얼마 전 돌아온 백건의 생일날 은찬이 그에게 선물했던 황벽색 노란 술띠였다.


-은이 누나.

-...은찬이 왔구나.


손수건에 눈물을 찍어 누르는 백은이 낯설었다. 화사한 봄같이 맑은 인상의 그녀는 언제나 백건보다도 더 단단한 구석이 있었는데, 오늘은 토끼같이 새 빨간 눈을 하고 삼배로 얽은 상복을 걸치고 있었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건이한테, 인사해야지...


붉게 옻칠 된 나무패에 쓰인 백건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 지. 백은이 코를 훌쩍이며 자신을 백건의 빈소 앞으로 이끌 때 까지도 은찬은 깨닫지 못했다. 백건. 제 이름보다도 익숙했던 그 두 글자가 읽히지가 않았다. 난생 처음 본 것 같이. 너무나도 단촐한 죽음 앞에 울컥 화가 솟구친다. 무슨 소리야, 누나. 시신이 없는데 어떻게 장례를 치른단 말이야. 백은이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살아있을지도 모르는데...


백건이 죽었을 리 없다. 꼬박 한 달을 헤맨 산속에서 발견한 것은 피 묻은 술띠뿐이다. 은찬은 향불 너머의 병풍을 막무가내로 젖혔다. 백은은 은찬을 말리지 않았다. 병풍 뒤에는 우두커니 놓인 백건의 관이 있었다.


수북이 쌓인 하얀 종이 꽃과, 그 하얀 무덤 위로 검붉은 색, 길쭉한 자국이 하나.


끝끝내 부정하고 싶은 진실을 머리가 인정하기 시작한다. 두 다리가 휘청, 벽으로 기운다. 은찬은 아득해진 정신을 부여잡고 탄식을 내뱉었다. 피에 절어 검붉은 색이 된 술띠는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백건의 죽음을 은찬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장례는 땅에 묻는 대신 불에 태우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네가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백건 어머니의 부탁이 있었기에 백건을 떠나보내는 것은 은찬이었다. 가족이 아닌 친구가 상을 치르는 것이 예법에 어긋나지 않을 까 걱정되었으나 어차피 앞세운 자식의 장례를 치르는 것부터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백건의 어머니가 말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담담한 목소리였다.


은찬은 착잡하게 술띠를 집어들었다. 백건에게 주었던 생일 선물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몰래 담은 마음에 하늘이 벌이라도 내리는 것만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건이 너를 좋아한다고, 말이라도 해볼 걸 그랬다.


술띠 끝에  불길이 치솟았다. 비명에 간 백건처럼 삽시간에 타오른 불길이 붉은색 술띠를 삼켰다. 매캐한 냄새가 났고, 불씨가 풀풀 휘날렸다. 백은과 백건의 부모님은 울지 않았다. 죽음 앞에도 담담히 자신을 떠나보내는 그 모습에 백건이 미련 없이 떠나버릴 것만 같아 은찬은 때를 쓰듯, 더운 바람에 눈물이 말라가는데도 불구하고 하염없이 흐느끼며 울었다.


나는 아마 평생 너를 잊지 못하고, 너를 찾으며 울고,


그러면 네가 찾아와 줄까 싶어서.



*



“그 소문 들었어?”

"아, 저 사람이 그...."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은찬은 갓을 고쳐 쓰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백씨 집안, 백건, ...달빛 아래 길게 이어진 길을 따라 발걸음이 스치는 족족 듣기 싫은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술에 잠긴 귀에도 그 소리만은 지독하게도 선명했다.


마을에서도 유명했던 백씨 집안 도령의 실종은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누군가는 백건이 죽음을 가장해 사귀던 처녀와 달아났다는 추문을 입에 담았고, 사실은 그의 가족들이 그를 죽인 것이라는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하기도 했다. 백건의 가족들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백건을 둘러싸고 오르내리는 많은 말들을 담담히 무시했지만 소문은 무성해져 갈 뿐이었다.


은찬은 그 소문들을 들을 때 마다 견딜 수가 없었다. 무수한 이야기들이 백건을 둘러싸고 그를 더럽히고 있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점점 사람들이 싫어졌고, 지겨워졌다. 동시에 자신만의 백건을 떠올리는 날들은 더욱 많아져갔다.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날도 늘어났다. 그러지 않은 날엔 기방에서 여자들과 어울리며 술을 진탕 마셔댔다.


"나 왔어, 백건."


장지문을 밀어젖히며 은찬이 빈 방에 대고 속삭였다. 대답없는 방 안에 은찬의 조용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밤낮으로 은찬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방 한켠에 놓인 백건의 유품에 대고 그에게 하듯 인사를 건내는 것이었다. 언젠가 간지럽다면서도 함께 주고받던 서찰들과 자잘한 선물들이었다. 백은이 전해주기를, 백건은 은찬에게 받아온 선물들에 투덜거리면서도 함부로 하는 법이 없었다고. 그러다 가끔은 주은찬이 준 거라며 누이를 붙잡고 넌지시 자랑하기도 하며 소중히 보관했다고 했다.


 은찬은 그것들을 곱게 갈무리 해놓고 백건이 생각날 때면 꺼내보곤했다. 준 보람도 없이 다시 제 품으로 돌아와버린 것들이었지만 백건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방에 틀어박혀 백건의 유품들을 품에 끌어안고 혼자 대화하는 주인 도련님의 이야기는 하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 은찬의 집 대문 밖으로 퍼져갔다. 


미쳤다느니, 귀신에 홀렸다느니. 사람들은 이제 은찬이 나타날 때면 쉬쉬하면서도 그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오늘도 몇 번째 계집아이들이 속닥거리는 이야기들을 들었는지 모른다.


백 도령의 친구 도령이 미쳤다는 소문.


그리고 소문은 또 다시 이상한 소문을 만들었다.


범이 백건을 물어갔다는 이야기였다. 호환이라고, 사람들은 쑥덕였다. 그 쯔음 해서 마을의 가축들이 짐승에 물어뜯긴 채 발견되는 일이 많아지면서 생긴 새로운 소문은 사람들 사이로 빠르게 번져갔다.


사람들은 백건이 호환을 당한 게 틀림없으며 창귀가 되어 은찬에게 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마다 은찬은 자신의 두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범은 산신이 아니라 요물이다. 호환虎患을 당해 시체를 찾을 수 없게 된 귀신은 창귀가 되어 요망한 범의 종자가 된다고 들었다. 범은 그 창귀를 부려 그것이 생전에 알고 있던 이들의 이름을 캐내 그들의 혼을 빼어먹고 육신을 잡아먹을 생각을 한다고. 


곧고 맑게 빛나던 백건이 사람 고기를 탐하는 요괴가 되어 버린다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 구석에는, 사람들 말터럼 그런 모습으로라도 백건이 자신을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추잡한 마음이 언제나 남아 있었다. 백건을 두번 죽이는 일이었지만, 꿈에라도 한 번 나타나지 않는 백건을 기다리는 은찬의 마음은 병들어가고 있었다. 



"보고싶다...."


나는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모습, 어떤 형태든 좋다. 만나고 싶다. 그를 만나 끝내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구름이 달을 가리자 방에 조용히 어둠이 내려앉았다. 은찬은 까무룩 눈을 감았다. 바스락, 서찰이 손 끝에서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다시 달빛이 흘렀다. 어느새 문 밖에선 달을 등진 하얀 그림자가 잠이 든 은찬의 위로 드리우고 있었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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