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思春

카테고리 없음 2015. 9. 19. 12:38


사춘 思春


굳이 따지자면 계집애가 대신 전해달라며 제게 건내준 선생 앞으로의 편지를 멋대로 버린 것이 잘못이라지만, 그걸 가지고 꼰대질을 하며 혼을 내었던 것은 건이 생각하기에 명백히 선생의 잘못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잘못이라 그러는 것에 마음이 상하였다. 


 한 지붕 아래 살면 싫어도 얼굴을 마주치게 될 법도 하건만 백건은 일부러 선생이 머무는 사랑채 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종일 선생을 피해다녔기 때문에 둘은 학교에서만 얼굴을 볼수 있었다. 사이엔 한동안 냉기가 흘렀다.


선생은 그 틈을 타 자꾸 수업시간만 되면 백건에게 교과서 낭송을 시키려고 했다. 그게 얄미워 수업을 한 번 빠졌을 뿐인데, 수업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선생은 매일 그와 함께 나머지 공부를 할 것을 요구했다. 평소라면 가지 않았을 테지만 선생은 웃는 낯으로 말을 하면서 시덥잖은 협박을 했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겠다는 것이었다. 유치했지만 어느 정도 위력이 있는 협박에 백건은 그것을 받아들여야했다.

그러나 나머지 공부라고, 뭔가 귀찮을 것만 같은 이름과 달리 그 내용은 간단했다. 매일 한시간씩 그가 부르는 낱말과 문장을 받아쓰는 것이 전부였다. 받아쓰기는 누가 국어 선생 아니랄까봐 고리타분한 시 같은 것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같잖은 연애시가 주를 이루었다. 간혹 선생이 말을 걸기도 했지만, 백건은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글을 받아쓰는 데만 열중했다. 


선생 놈은 도대체 어떻게하면 세상에 많고 많은 시 중에서도 그딴 낯간지러운 것들만을 쏙쏙 찾아내는건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화다닥 달아오를 것만 같이 간지러운 것들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부끄러워졌다. 또한, 그러다가도 그걸 또 어딘가 어느 계집애들에게 읽어주고, 계집애들이 사탕발림에 완전히 녹아내려 선생님 나 죽네 하며 매달릴 것이 생각나서 한없이 짜증이 솟구치곤 했다.


-미소는 나의 운명의 가슴에서 춤을 춥니다 새삼스럽게 스스러워 마셔요. 
-그런 거 말고 야한 시는 없냐? 왜, 그런거.

 한 번은 반항이랍시고, 아니. 그냥 저도 나처럼 좀 곤란해져봐라 하고 일부러 그렇게 물었다. 언제 쯤 사과를 할까 기다리고 있는데, 그럴 기미는 없고 오히려 제 하는 짓을 즐기면서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구는 게 못내 얄미워서였다. 그런데도 선생은 별로 당황한 기색도 없이 그저 빤히 백건을 바라보더니 별안간 손을 뻗어 학란 옷깃을 매만지며 말하는 것이었다. 

-야한 게 뭔지는 알고? 

이게 또 어디서 애새끼 취급이야.

-...나도 알건 다 알거든.

백건은 오갈 데 없는 시선의 끝을 실쭉 웃는 입술 밑 점에다 할 수 없이 걸어두고, 딱 그 또래 남자아이의 쑥스러운 대답을 하는게 고작이었다. 백건 다 컸네, 그런 것도 알고? 선생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웃으면서 말을 했다. 


아. 


머릿속이 빨갛게 물이 드는 것 같았다. 목은 따끔거렸고, 얼굴도 분명 새빨갛게 물들었으리라. 웃고 있는 걸 볼 때마다 자꾸만 기찻길 옆 샛길에서 선생과 입을 부비던 것이 떠올랐다. 멍하게, 그 때와 비슷하게 쿵쾅거리는 떨림을 느낀다. 그때도 이렇게 빤히 보던거 같았는데. 빨간 속눈썹이, 그러다가 입술이 닿고, 혀가, 근데 그 때 눈을 감았던가?


툭, 툭, 학란 단추가 두어개쯤 벌어지고 나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더랬다. 백건은 두 팔로 선생의 가슴팍을 세게 밀치고 일어났다. 우당탕탕, 밀려난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에 교무실의 다른 선생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릭 백건을 쳐다보았다. 씩씩거리며 백건은 선생을 노려봤다. 안 봐도 시뻘게져 있을 것 같은 제 얼굴을 두고도 선생은 그저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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