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거처



1.

 

 건은 오늘 선주로부터 밀린 임금을 모두 지불 받았다. 항구에 배가 정박했을 때 미리 기다리고 있던 선주의 심부름꾼이 건을 포함한 뱃사람들의 임금을 그들에게 전달했다. 그가 지난 번의 체불을 말 없이 참고, 묻은 소금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훌쩍 바닷길에 오른 때로부터 정확히 3개월 만이었다.

 

덕분에 목돈을 거머쥔 건의 바지 주머니가 오랜만에 두툼하게 차올랐다. 소금과 바람에 거칠어진 손을 주머니 깊숙히 종이 쪼가리들과 함께 찔러 넣은 채 건은 세어보지 않았지만 제법 손에 잡히었던 돈의 액수를 가늠해본다. 매번 정체를 알 수 없는 화물을 실어 나르고, 서너시간이 고작인 수면시간을 제외하면 깨어 있을 때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던 고생을 생각하면 돈은 터무니 없는 액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번 배에 오를 때 까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거기에 선장이 수고했다면서 덤으로 그의 젖은 손에 무언가를 얹어주었기 때문에, 매번 힘없이 질질 끌리던 발걸음에는 평소보다 무게가 실렸다. 선장이 항상 그것을 저보다 짬밥 높은 것들과 비밀스럽게 나누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마도 마약이나, 아니면 그에 준하는 밀수품 같은 거겠지.몰래 들여오는 물건들은 제 값을 쳐서 받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건의 손에 조금의 푼돈이나마 더 쥐어 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 번 배가 뜰 때 까지, 이번엔 생활이 조금은 더 윤택해질 지도 모르는 일이다.


2.

 

배를 댄 항구에는 새벽과 함께 뭍으로 올라온 뱃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파도의 포말처럼 흩어져 부서지고 있었다. 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선창가엔 아침이면 열릴 시장을 위해 어선들이 미리 불을 밝혀놓아 어두운 끄트머리까지 길게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건은 하얗게 백열하는 등불의 빛을 등지며 걸음을 옮겼다. 

 

 소란스러운 선창가 바닥은 물에 잔뜩 젖어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그럼에도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바다 안개 너머의 희미한 빛줄기를 피해, 엉성하게 포장된 콘트리트 도로와 짧은 모래밭, 그리고 방파제 위를 가로지른다. 그리고 마침내 제대로된 뭍으로 들어서는 경사로를 타고 오를 쯔음, 귓가에 메아리처럼 따라붙던 바닷가 소음이 잠잠해졌다. 그쯤해서 경사로 중간 쯤에 잠시 멈추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거리 위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고요했다. 

 

건은 그대로 슬그머니 손에 쥔 것을 품안에 갈무리하고, 마저 걷는다. 비스듬히 경사진 언덕을 넘으면 보이는 것은 해안가 구시가지의 빈민 주거 지구였다. 거미줄 같은 골목이 낡은 가로등 불빛 하나를 미끼로 걸쳐두고 건을 맞이 하고 있었다.

 

  

3.


 건은 그 구시가지 안에 위치한 빈민 지구의 가장 낡은 건물 꼭대기층에 살았다. 처음 그가 이곳에 자리를 잡을 때 가지고 있던 돈으로 그가 들어가 살 수 있는 곳은 방세가 싼 꼭대기층 뿐이었고, 마저도 아래층은 죄다 사창가로 사용되는 건물이었지만 형편이 나아지지 않은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집이라고는 해도 그가 배 위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곳에서 제대로 생활을 한 적은 없었다. 처음 이곳에 내던져 졌을 땐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었고 기억조차 나지 않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결국 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체념했을 쯤에도 건은 매일 낮이면 잠에 들고 밤이면 빨갛게 불을 밝히고 하루를 시작하는 그 곳의 유령같은 삻을 견디지 못했다. 배를 타게 된 것도 그곳에서 잠을 자며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건물 아래층에 그와 함께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이웃사촌과 건은 제법,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진 사이었는데, 주은찬, 그 이웃사촌은 어느날 술에 취해 옥탑방 문을 두드린 불청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취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건은 빼꼼히 열린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건을 마주한 은찬이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웃던 것을 기억한다. 입술 밑의 점이 헤픈 웃음이었다. 그러고는, 계집애들 다리 밑으로 돈이나 긁어모으는 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문을 닫으려고 하니 대뜸 제 이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결국 건은 얼떨결에 놈이 건내는 술을 대가로 그 자리에서 은찬의 굴곡지고 장황한 인생사를 들어주게 되었다. 은찬은 이곳 부랑자들에게서 들려오는 각양각색의 혀가 꼬부라진 외국어, 천박한 사투리와 욕설 대신 제법 건에게 익숙한 언어를 구사했다. 점잖고, 깔끔한. 어렴풋이 구석에 쳐박아둔 기억이 두둥실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날이면 잊어버릴 이야기를 차곡차곡 귀에 담았던 건지도 몰랐다.

 

은찬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내내 헤프게 눈웃음을 쳤다.

 

웃었고, 웃다가, 또 웃고, 웃더니, 마지막엔 키스를 했다.

 

-외로우니까 키스 한 번만 해보면 안돼요?

-미친놈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변덕스러웠던가? 고작 몇시간 만에도 뒤집힐 수 있을 만큼? 그러나 건은 곧 이해했다. 이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똑같이, 펄럭일 날개조차 꺾여 아우성치고 있는 삶인 것이다. 갑자기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 사이 은찬은 키스를 하고 있었다. 얇은 입술의 표면과 젖은 혀가 톡톡 두드린 자리가 뜨겁게 달아올라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숨을 받아 먹는 그를 적당히 마르고 살집이 맺힌 손가락이 더듬어 내려갔다. 

 

달이 뜬 밤이었다. 가빠진 호흡과, 싸구려 술의 깔끔하지 못한 뒷마무리로 올라오는 독한 기운에 취한 채 건은 그날, 밤보다 새카만 은찬의 두 눈을 봤다.

 

 

4.

 

아직 시커먼 하늘 위로 고개를 처들고 건은 익숙한 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불빛 한 점 없었지만, 이미 그런 것쯤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곳에 익숙해졌다. 건은 빈민가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걷다 보면 비릿한 살 냄새가 깊은 한을 선명히 아로새기듯 가시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 위로, 위태롭게 위로 쌓아올려진 낡은 건물의 그림자가 작은 빛줄기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짙게 드리워있었다. 그것은 해가 뜬 낮시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림자는 구석구석 스며들어 사람들을 짓누른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절망은 그냥 삶의 일부였다.


건물 앞까지 다다랐을 때 건은 때마침 물건을 바깥으로 옮기고 있는 은찬과 마주쳤다. 1층의 불만 켜져 있는 걸 보니 가게 마감을 치는 중인 듯 했다. 건은 은찬을 그대로 바라본다. 은찬은 눈치 채지 못한다.


"왔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 와중에 등 돌린 은찬이 그렇게 말을 하고, 건은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 입술을 비죽였다.


"어."


대수롭지 않게 툭 던지는 말을 기다렸던 것 같기도, 그런데 고작 그 뿐이라 서럽다.



5.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겨우 몸을 지탱하는 낡은 골목의 유일한 출구는 바다였다. 사람들은 매일 바다를 바라 본다. 그러다 견딜 수 없어질 때 쯔음, 그 바다의 푸른 수평선 너머에 지푸라기처럼 매달려 뛰쳐나간다. 그러나 결국 갈곳 없이 떠돌다 이곳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건은 매번 더 절망하고 더욱 지쳐 버린 채로 이 골목에 온전히 몸을 맡긴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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