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춘 세부 설정

2014. 11. 15.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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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春 : 늦게 오는 봄
01





『하늘과 땅이 서로 붙어 떨어지지 않고 해도 달도 두 개였을 때, 동쪽 바다의 끝에서 번개와 비바람이 몰아치니 그것이 곧 위대하신 청룡이 나셨음이었다. 청룡께서는 나신 후에 곧바로 창을 들고 일어나 천지를 가르고 해와 달을 베어 내니, 이에 해 하나 떨어져 동방의 빛나는 별이 되고, 달 하나 떨어져 무수한 잔별이 되었다.

 천지 만물이 비로소 조화를 이루자 그 높으신 덕이 사방에 뻗치어 청룡께서는 나라를 세우셨다. 백성들은 칭송하고 기뻐하며 나라를 받들었다. 그리하여 날로 그 자손이 번성하니, 그것이 바로 오늘의 제국 한(韓)이다.』


 한 제국사 성조 효명제 기(韓諸國史 孝明帝 本記) 中에서

 




 사도(徒;왕을 보필하고 정치를 살피는 재상) 문성공(文成公) 현무가 가주 현 승상(丞相)은 채신 없이 달려가는 자신을 알아보는 주변의 눈과 귀가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나 그들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보다는 성미가 급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다 무슨 일을 겪게 될 지 두려웠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유일한 황손이자 부황(父皇) 의 적장자로 태어난 지금의 황제는 부황과 모후를 제외하면 위로는 사람이 없는 유아독존으로 자라왔고, 그 탓에 태자시절부터 침수며 수라, 옷 입는 것 에서부터 가리지 않는 것이 없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뿐이랴, 낯가림과 경계가 심해 모시는궁인들조차 1년을 버틴 적이 없었으며 태자전의 스승들과 친위대마저도 밥 먹듯이 갈아치우던 일들도 궁 안에서는 유명한 사실이었다.


 물론 현 승상은 그 까다로운 성미가 황실의 내력임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까다롭고 예민하기가 만만찮은 그의 부황을 능가할 정도로 황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미의 소유자였다.


 더욱이, 부황을 몰아내다 시피 하며 즉위를 하고 나서부터 그 성질이 더욱 심해진 황제는 신하들의 피를 말리고 있었다.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가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는 듯이 거침없이 휘두르는 시작한 인사권에 하루아침에 지방과 한직으로 내몰린 이들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고, 상참(參;매일아침 임금이 대신들과 하는 조회)과 경연(經筵;임금의 공부)을  멋대로 취소한다거나, 회의 도중에 신하들의 언행을 걸고넘어지며 신하들에게 무능하기 짝이 없다는 비판을 쏟아 붓는 것도 예사였다.



 황제의 그러한 행보는 하나같이 조정의 실권을 진 현무가를 겨냥한 것이었는데, 현무가 세력의 삼분지 일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주작과 백호가의 인물들을 채워 넣은 것이 바로 이틀 전이었다. 어제는 한림원(翰林院) 학사 하나가 실수를 한 것에 황제가 역정을 내며 업무에 차질을 빚었다는 이유로 그를 내쳐 버리지 않았던가? 



 청룡전(靑龍展) 근처에 당도한 현 승상은 숨을 고르며 의관을 바로했다. 대대적인 인사행정에 신병(身甁)을 핑계로 등청을 거부했던 현 승상은 황제가 즉위와 함께 조정의 현무가 세력을 몰아내며 파격적인 인사행정을 선보이는 만큼, 그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현무가의 가주된 자로서 당연히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관의 안내에 따라 입구를 지나 청룡전안으로 들어서자 황제의 편전(便殿;왕이 업무를 보는 곳)이 아닌 내전(內殿)임에도 불구하고 두터운 담장과 몇 겹의 문으로 둘러싸여 있는 청룡전의 남다른 위용을 현 승상은 체감할 수 있었다. 황태자는커녕 왕후와 비빈들조차 허락 없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엄중한 궁중의 법도가 지배하는 황제의 가장 은밀한 공간, 황제의 내전이자 침전인 청룡전. 



 그곳을 둘러싼 거대한 구룡벽(九龍甓)은 청동으로 된 오조룡(五爪龍;다섯 발톱을 가진 용.) 아홉 마리의 부조가 장식된 담장으로 황제가 기거하는 건청궁(乾靑宮)의 어느 구조물보다도 빼어난 화려함을 자랑했고 동시에 견고하기로도 유명했다.  담장 안 또한 그 규모와 화려함에서 결코 구룡벽에 뒤지지 않았는데, 담장 너머 내전의 뜰은 실상 온갖 잡상(雜像)들의 공간이었다.



 입구에서 시작해 월대로 이어지는 어도의 양 옆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월대(月臺)를 오르는 답도(道)와 청룡전 입구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세 개의 청룡조각이 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청룡전 처마 끝에는 사방신상이 작게 장식되어 있기까지 했다.


하늘 아래 가장 존귀한 이라는 황제를 받들어 모시기에 가장 적합한 공간,

그것이 바로 황제가 기거하는 청룡전이었다.



 두터운 담장과 세 개의 문, 십이 신상이 지키는 어도를 눈앞에 두고 현 승상은 황제의 침전까지 얼마 되지 않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고 월대가 하염없이 가파르게만 보였다. 잰 걸음이 느리게만 느껴질 정도로, 승상은 걱정스러웠다.


 도대체 이른 아침부터 입궐을 명한 황제의 의중이 무엇이란 말인가? 현무가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을 펼치는 황제가 자신의 정적인 현무가의 수장을 편전도 아닌 내전으로 은밀히 부른다. 그것이 과연 현무가에 득이 될 것인가 해가 될 것인가. 어느 쪽이든 심상치 않은 일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문 하나를 두고 황제의 앞에 서게 되자 현 승상은 걱정보다도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무모한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제 아무리 날고 긴다고는 하나 황제는 아직 열여덟의 덜 자란 아이에 불과했고 그에 비해 그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이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황실을 제외 하고는 제국에서도 견줄 이가 없다는 세 공신 집안 중에서도 정치적 영향력을 무시 할 수 없는 현무가의 명실상부한 수장이었다.



"고하시게."



 그래.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자. 황제도 자신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리라. 확신이 들자 현 승상은 이른 아침부터 내조(內朝)의 전갈에 걱정하며 청룡전가지 달려온 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황제의 침전에 들 수 있었다.



"늦었군."



 승상은 이제 나이가 들어 걸음도 아주 거북이 같이 느려진 모양이지? 상소문을 펼쳐보며 눈길조차 주지 않는 황제의 신랄한 옥음을 듣는 순간 현 승상은 마음을 다잡으며 공손히 두 손을 배 위로 모았다. 그러나 허리를 숙여 인사하려는 순간, 시야에 들어온 인물에 승상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곁에 시립한 이는 백호가의 장자이자 호국공(護國公) 태위(太尉;군사부분을 담당하는 재상;대장군)  백훈의 질자(姪子) 백건이었다. 오로지 직위로만 본다면 장군에 해당하는 백건보다 승상인 자신이 높은 직위에 해당하여 인사를 받아야 할 처지였으나 황제의 직속 친위대인 백중위(白中衛)의 수장인 백중령(白中令)은 오로지 황제만을 보필하는 자리였다.


 아무리 그래도 상관의 인사를 받는 다는 것에 난처해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당당히 황제의 옆에 서 있는 모습은 과히 불쾌했다. 전날까지도 병부(兵府)의 사인(舍人;각 부서의 중간 정도의 관직)에 불과했던 주제에 가문의 비호와 황제의 태자시절 배동(陪童;명문가 자제 중에서 뽑아 5세부터 태자와 함께 어울리게 끔 하는 놀이친구)이었다는 이유로 벼락 출세를 한 햇병아리가 아니던가?


 그러나 상소문에서 눈을 때고 자신을 바라보는 황제의 재촉에 현 승상은 마지못해 허리를 숙였다. 제 나이의 반절에도 이르지 못한 어린 황제와 그 측근에게 굴욕을 당했다는 기분에 현 승상은 황제가 가까이 와 좌정하라 허락을 하였음에도 멀찍이 떨어져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황제는 호의는 한번으로 족하다는 듯이 그를 세워 둔 채 자신의 업무를 이어나갔다. 탁자 위에 쌓인 상소문 주지(周紙;두루마리)를 다 읽을 때 까지 황제는 현 승상에게 한마디 말도 없었고, 현 승상 또한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현무가의 놈들이 하나같이 이리 오만불손하고 재미없음은 전부 승상에게서 배웠음이야?"

 결국, 이식경(二食頃;약 두시간)이 지나고서야 현승상은 황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황제의 말은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다. 또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아 꼬투리를 잡는 것인지. 가감 없이 솔직하고 신랄하기가 그 재위 시절의 부황과 다를 바가 없는 모습에 현 승상은 다른 의미로 감탄을 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오늘도 상참을 거르셨다 들었습니다."

"그리고 승상은 이틀 째 등청(廳)을 거부했지."

"그것은 신의 몸이 온전치 못하여-"

"무얼. 가주가 이 모양이니 그 식솔들도 나를 우습게보는 것 아니겠어?"

"폐하! 그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까.



"승상의 아들만 보아도 그러해."



  순간 자신을 타박하면서 아들을 걸고넘어지는 것에 현승상은 의아함을 여겼다. 성정이 유약해 가문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겨우겨우 출사를 시켜 자리보전이나 하게 둔 아들이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다니,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의 아들이 어찌."

"아니. 문하사인(下舍人; 문하성의 중간 정도 관직)말고. 승상의 아들은 둘이잖아?"

"..."


"세 공신 집안의 장자들은 무릇 태자의 배동이 되어 태자를 보필하는 것이 나라의 지엄한 법도이거늘 그대의 아들은 어려서는 그것을 거절하고, 자라서는 세 번이나 장원을 하고도 고작 국자감(國子監;국가 최고 교육 기관) 조교나 하고 있다지. 과인이 그것이 안타까워 몇 번이고 현무가에 사람을 보내었는데도 출사를 마다하니, 겸양이 지나치면 해가 되는 법인데 그대의 아들은 어찌 과인에게 이런 불충(不忠)을 저지르나 몰라."

"...송구하기 짝이 없사오나 폐하. 신의 차남은 조정에 출사할 만한 자질이 못되옵니다."

"그거야 두고 보면 알 일이지."

"폐하!"


"중서령(
中書令; 황제의 비서실격인 중서성의 수장)은 들라."

 황제의 명에 문이 열리자 붉은 머리칼을 가진 청년이 비단으로 된 주지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다름아닌

황제의 칙서(勅書)였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알아차린 현승상은 황공하다는 듯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대의 차남을 한림학사(翰林博士; 학자이자 황제의 고문이며 기밀문서를 관리)에 임명하는 과인의 친서야."

"폐하, 거듭 말씀드리겠사오나 신의 자식은 재주와 학식이 부족하여 폐하를 모실 위인이 되지 못하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과거에 낙방한 전적이 있는 중서령은 아주 울고 싶겠군. 그대도 알다시피, 나라의 인재를 찾아 등용하는 것 또한 황제의 도리다. 이번에 각 가문의 장자들이 한자리씩 차지했는데 승상의 아들만 문하시중이 되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 등청을 거부한 듯 싶으니 이참에 두 아들 모두 조정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으면 승상도 든든하지 않겠어?"

"폐하!"

"이것은 황명
(皇命)이다. 그리 알고 더 이상 과인을 거스르지  말라." 



 황명(皇命). 그것은 곧 마지막 기회라는 황제의 경고였다. 한림학사 하나를 파직한 것은 이 때문이었나. 조정에서 현무가 세력을 축출하는 데 혈안이 된 황제가 비록 방계의 양자라고는 하나 현무가의 일원인 차남을 자신의 측근에 해당하는 관직에 출사토록 하는 의중을 현승상은 알 수 없었으나, 지엄한 두 단어가 가진 힘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칙서(勅書) 를 받아 들고 청룡전을 밖을 나섰다.


  문 너머로 사라지는 승상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황제는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흥. 속으로는 좋아 죽겠으면서 한사코 거절하는 꼴 좀 보라지. 그런다고 누가 속아?"

"꼭 그렇지만은 않지요."

"주은찬, 너 내가 네 얘길 좀 했다고 저 능구렁이 편을 드는 거야?"

 채근하는 황제의 말에 중서령 주은찬은 말없이 웃으며 문방구와 상소 주안으로 어지럽혀진 황제의 책상을 정리했다. 낙방에 대한 이야기를 끄집어 낸 것에 대한 작은 시위였다. 

굳이 승상의 편을 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그렇고 아까 그 눈 봤어? 날 아주 죽일 기세로 노려봤다고."

"누구나 너한테 고개 숙여 인사하라고 하면 그럴 걸."

"하여튼 뱀들이란 하나같이 기분이 나쁘지."

"지금 나보고 뱀이라 그랬지? 맞지? 백건?!"

"왜이래? 용이 왜 뱀이야. 현무가 뱀 맞잖아 뱀이랑 거북이 합친 거."

"너!! 누가 하대하라고 그랬어, 간이 부었지?!"

"왜이러십니까. 폐하. 신은 그저 옳은 말을 했을 뿐입니다."

"이게 진짜..!"

 한 나라의 황제와 장군의 대화라고는 믿기지 않는 두 사람의 대화 같지도 않은 싸움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런데 왜 하필 현무가 놈이야?"

"신동이니 천재니 소문은 자자한데 조용히 지내는 게 수상하니 곁에 두고 봐야 될 거 아냐. 잠자코 있다가 덜컥 출사라도 해버리면 골치 아파. 아예 눈에 보이는 데 두고 부려먹으면서 정치에 질리게 만들 면 더 좋고...이게 하니라, 하대하지 말라고 했지!"

"그냥 네가 꼬장꼬장한 늙은이들을 스승으로 두고는 경연을 빠질 수 없으니까 적당히 만만한 놈 하나 앉혀놓고 놀려는 수작은 아니고?"

"그깟 고리타분한 늙은이들의 지루한 수업 같은 거 안 들어도 다 알아!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승상의 차남은 경학에 밝기로 국자감에서도 유명하니, 다른 현무가 사람들이나 연로한 학자들과 달리 폐하와 맞을 지도 모르지요. 비록 작금의 현무가가 권력에 눈이 멀었다고는 하나 가주에게 대대로 문성공의 시호가 내려질 만큼 본디 지(知)를 숭상하고 학식이 뛰어난 학자 집안이 아니었습니까."


"흥. 그래봐야 글이나 읽는 고지식한 샌님일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권력을 멀리한답시고 국자감 조교 따위에나 머물러 있어?"

"사람 일은 모르는 법입니다, 폐하."

"그리고 그깟 이름뿐인 호(號). 백건이 나중에 물려받을 이름이 호국공(護國公)이라는 것만 봐도 답 나오지."

"왜 날 걸고 넘어져? 우리 황상(皇上)께서 어디 남 말 할 처지신가?"

 다시금 실랑이를 시작한 황제와 백중령을 바라보며 은찬은 황제의 남은 업무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오늘도 상참은 거르고 말았으니 윤대와 경연에는 나가야 할 터인데, 어느새 내기로 이어지는 두사람의 대화를 보니 그것도 글러먹은 듯싶었다.


 사실 황제가 자신과 백건을 승진 시켜 곁에 두는 것은 편하게 놀고먹기 위해서 이러기 위해서는 아닐까. 정말 말 그대로 황제의 수족이 된다면 그것은 심히 곤란했다.



"오늘에야 말로 결판을 내고 말겠어."

"그래놓고 또 토끼나 열댓마리 잡으시겠지!"

"주은찬, 오늘 경연은 취소야. 늙은이들한테 그리 전해."

"허면 윤대(輪對;신하들과 대담하는 자리, 매일 5섯명 정도와 동시에 행한다)도 연기시키겠습니다, 폐하."



  우려낸 녹차를 마시면서, 자신에게 향할 온갖 비난을 떠올린 은찬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러다가 나중엔 정말 황제의 태만에 간언할 줄 모르는 불충한 사람으로 실록에 기록되는 것은 아닐까. 


 결국, 조정 대신들에게 전달할 그럴싸한 변명을 또다시 쥐어 짜내며 은찬은 부디 새로 입궐하게 될 현무가의 둘째 아들이 일단은 자신의 바람과 같이 황제의 마음에 들어 자신의 고충을 조금이라도 덜어 줄 수 있었으면하고 간절히 바랐다.










사진이 월. 답도는 궁궐가면 깔린 돌바닥 길 중에 중앙에 난 길.
궁궐 전각에 깔린 포장도로(..)는 세갈래로 되어서 삼도(三道)라고 하는데 
중앙은 황제가, 좌우는 문무신료들이 걸어갔다고 해요


궁중용어는 간혹 틀릴 수 있습니다ㅠ

관부, 관직명과 역할은 당나라 3성 6부에서 참고해서 자의적으로 변형한것. 실제와는 조금 많이 다릅니다.
아마도 찬가람?
생각이 날 때마다 손 이가면 쓸 계획. 설정짜느라 낭비한 시간 아까워서라도 써야 될 것만 같다.



Posted by 세한(歲寒)
,

주은찬X청가람

끝에는 끝없이 너와 나만이





고전AU

소년 황제 청가람과 주은찬

사망소재 주의





울어?


 먹먹한 하늘 사이로 햇빛이 힐끔거리매 눈으로 뒤덮인 땅이 온통 새하얗게 빛났다. 백옥을 빻아 가루를 낸 듯, 햇살에 녹아내린 눈발은 보드라웠다. 따스한 햇살과 폭신한 눈발은 잠들어 가는 이의 몸을 다정히 어루만져 감싸 안았다. 희다 못해 색이 싹 가신 창백한 얼굴. 무(無)에 가까운 빛깔 속에 붉디붉은 입술 하나.


 티 한 점 없이 맑은  피부와 수줍었던 장밋빛 뺨을 가진 아름다운 소년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매화같이 곱고 생기 넘치던 소년 대신 꽃잎이 떨어지듯, 봄이 채 오기 전에 힘없이 모가지를 떨 구고 마는 동백처럼 마지막 생명줄을 간신히 쥐고 있는 작은 소년이 있을 뿐. 그렇게 소년의 삶의 흔적은 조금씩 하나하나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안 울어.

울지 마. 멍청아.



 아예 모든 걸 쏟아 붓고 갈 듯 피를 토해내는 모습에 은찬은 작은 손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가람 또한 야속했다. 울지 말라며 끝까지 단호한 그 모습이 죽도록 밉다. 너는 알까? 내가 너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내 가슴에서 피를 토하는 것을. 붙잡고 매달리어 가지 말라 울고 떼를 쓰고 싶은 것을.


 설원 위로 난자한 핏자국이 우련 붉었다. 누군가의 생을 빼앗아 발하는 붉은 도료는 그럼에도 화선지에 흩쳐 그려놓은 꽃잎 같다. 지독하게 어울리는 모습에, 그 순간 쓰러진 이의 몸에선 다시 한 번 선혈이 솟구쳤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색이었던 붉은 색이 지금만큼은 죽도록 싫다.


 다시금 꽃잎이 하나 둘 진다. 가람의 위로 붉게 흩어진다. 핏방울이 튀고, 번지는 핏자국에 정신은 아찔해져갔다.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혈을 해 보지만 손가락 사이로 울컥울컥 새는 뜨뜻미지근한 핏물이 그칠 줄을 몰랐다. 그 때, 돌연 가람이 한층 파리해진 얼굴로 웃었다. 울지 말라고 했잖아. 

꾹 깨문 제 입술에, 차가운 손가락이 닿는다. 

짓이겨진 입술을 느릿하게 어루만지는 그것은 슬픈 온정이다.



울지마 주은찬.



 웃어. 그 말에 깊은 상실감이 솟구쳤다. 아, 이제 마지막이구나. 울컥 올라오는 서러움에 눈물이 방울졌을 때 공기를 가르고 기침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아니. 아니야. 나 안울어. 봐, 이렇게, 웃고 있잖아. 은찬은 혹 제 눈물이 보기 싫어 가람이 짖굳은 농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희망을 걸고 있는 것처럼 가람을 향해 필사적으로 웃어보였다. 가람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바스라질 듯 희미한 가람의 미소에 은찬은 막연한 상실감이 뼈와 살을 덧대어 완전한 형체로 거듭나는 것이 느껴졌다. 더욱 창백해지는 그의 얼굴에서, 핏물 가득한 채 곡선을 그리는 입술에서, 야트막해진 숨소리에서. 그가 숨을 쉴 때마다 내 쉬는 숨에선 피비린내가 났다. 죽음이 한 풀 가까워 진 것이다. 



이제는 쉬어야지.



  겨우 뱉어낸 말에 은찬은 마지막을 느꼈다. 작은 몸에 지워졌을 짐들을 더 이상 가람에게 차마 지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의 정점.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절대 지존의 자리. 부모와 형제조차 허용치 않아야만 지킬 수 있는 군자의 패도(覇道). 그것이 가람의 슬픈 인생이었기에 은찬은 차마 마지막 순간까지 가람에게 그것을 지고 가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은찬에게 가람은 늘 그저 작고 작은 아이었을 뿐이다. 황제의 심장은 얼어붙어있다는 세간의 소문과 달리 가람은 유리로 만든 검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도 아비의 정에 목말라 속으로 울부짖고 기댈 곳을 찾는 여린, 그래서 곁에 있고 싶고 지켜주고 싶은 이였다.


 해서 약조 하지 않았던가. 내게는 그러지 말라. 나는 너를 내몬 것들로부터 너를 지키겠다. 몇 번을 부탁하고 받아낸 약조가 참으로 헛되다. 끝까지, 그렇게 홀로 서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외로워. 하여 너를 놓지 않겠다고 약조 하였는데, 네가 나를 버린다면 나는 어찌하나. 여기에, 이 하늘 아래 너를 잃고. 



살아야지....나랑...



 남쪽으로 가자. 따뜻한 곳으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너와 나 둘이서만. 차라리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 된다면, 당신이 나를 위해서라도 살아달라고 은찬은 가람에게 빌었다. 스스로 죽지 못하는 모진 목숨을 살려놓고, 자신을 위해 살라 가람이 제게 말하였듯 이번에는 너 또한 저를 위해 살아달라고.



주은찬



 허나 돌아오는 이 봄에는 저 혼자일 테다. 은찬은 그것을 안다. 그러면, 그러면 자신은 혼자가 되어 꽃이 피고 지길 반복하는 그 무수한 시간들을 홀로 또 얼마나 흘려보내야 할까. 그러나 자신의 목숨은 가람의 것이었다. 허니 그 없인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닌 무력하고 허무한 삶일 뿐일 테지.


 뇌리를 관통하는 섬뜩한 발상에 그는 그것을 떨쳐내듯 힘없이 늘어진 이의 차가운 손을 붙잡았다. 덜덜덜 손이 떨린다. 매달리듯, 간청하듯, 나를 버리지 말라고. 그렇게.  앳된 얼굴이 안쓰럽게 웃는다. 결국 은찬은 왈칵 울음을 터트리며 가람을 부둥켜안았다.



미안해.

죽지마, 청가람. 죽지마 제발.

아버지 한테 죽기는 싫어.



 마지막 진심에 목이 막혔다. 떠나는 이는 단호하다. 가지 말아. 나를 두고 가지마. 차마 할 수 없는 말은 오열이 되어 뚝뚝 굵은 눈물이 방울져 쉴 새 없이 떨어지고 흐른다. 젖은 뺨 위로 아직 따뜻한 손이 닿는다. 바보야, 웃으라니까. 은찬은 그 손을 부여잡으며 재빨리 피 묻은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부탁할게.



 너밖엔 없어. 가람의 실없는 웃음소리가 기침과 함께 들려왔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이의 그것과는 달리 가벼운 웃음이었다. 그것이 그의 것인가 자신의 것인가. 흐느낌인지 환희인지 알 수 없는 웃음소리가 공간을 메운다. 아마도, 서로를 향해 웃음 지음이다. 



바다가 좋겠지?

제발- 



 가람의 손은 잔인하게도 은찬에게 검을 쥐어주면서 은찬의 뒤통수를 감쌌다. 가람의 팔이 자신을 끌어 당긴다. 입술은 금세 사뿐히 맞닿았다. 꽃잎이 떨어지듯. 은찬은 핏물 가득한 가람의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식어가는 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입안의 온기가 혀와 입술을 적셨다.


 숨결에 섞여 올라오는 피냄새가 짙다. 은찬은 제 입안으로 피가 흘러들기에 그것을 남김없이 핥아 삼켰다. 마지막인듯, 절박하고 간절히. 가람의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그것은 제게 주어지는 생의 의지였다. 허나 기어코 모양을 갖추어 완성된 상실감에 입을 맞추는 내내 은찬은 울었다.


 가람 또한 우는 건지 비릿한 피 냄새와 짭짤한 물 내음이 한데 섞여 얼굴을 뒤덮었다. 위로하듯 끌어안은 목덜미를 가람이 부드럽게 문질렀다. 안녕. 다정한 작별에 은찬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다잡았다. 최대한 고통없이, 가람을 보낼 수 있도록.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다못해 더디게 흘렀으면. 억겁의 시간이라도 이 순간엔 찰나이건만.




*





 눈이 씻겨나간 자리는 보드랍고 기름진 흙으로 충만했다. 평화로운 파도소리가 귀를 적셨다. 은찬은 무릎을 꿇어 어미의 품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황갈색 흙더미를 손에 쥐어 보았다. 흙은 부드럽게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흙구덩이 위로는 철모르고 피어난 매화를 이미 한껏 쏟아 부은 참이었다. 



이 곳이면 될까. 꽃이 충만한 동쪽 바다. 이곳이면, 한 평생을 살얼음판 속에 살다간 가람을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을까. 슬픔도 괴로움도 없이 그가 편히 쉴 수 있을까. 



 은찬은 고개를 들었다. 서(西)로 기우는 주홍빛은 포근했다. 그러나 허락 되지 않은 자의 시선을 차단하듯 눈이 시려와 은찬은 지는 해 너머 서방의 낙토를 볼 수는 없었다. 서글픈 금빛에 은찬은 시선을 옮겨 가람이 그렇게 원하던 바다를 내려 보았다.


 절벽 아래의 바다는 환희의 순간을 맞이하듯 반짝인다.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에 모든 것이 사무치게 서글프게만 느껴졌다. 네가 살라 해서 나는 갈 수 없는 곳. 바다를 건너 내달려 가람이 다다를 끝을 상상하자 가슴이 먹먹히 미어져왔다.


안녕 청가람.


 마지막으로 차갑게 식어 버린 이를 다시금 어루만져본다. 결국 채 봄을 맞이하지 못하고 떠나버린 가람의 몸은 더 이상 어제와 같지 않다. 작은 새같은 몸을 하고 강하게 버티던 가람만의 생기도,부드러웠던 뺨도, 따뜻했던 두 손도 없이 가람은 그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제 손으로 감긴 눈은 뜨일 생각이 없다. 그나마 붉던 입술마저 색을 잃고 질린 그것은 완벽한 상실이었다. 그것에, 은찬은 다시 한 번 입을 맞춘다. 딱딱하고 차갑게 굳은 입술에 제 입술을 부비며 파묻는다. 여즉 남은 피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을 스쳤다.



 그렇게 나는,붉은 비단 위에 너를 두고 걸어간다. 대신에 너 없이는 두 번다시 살아서 봄을 맞이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러니 너를 여기에 묻어두고, 너와 함께 나의 봄 또한 묻는다. 나는 그리 할래. 죽음으로서 나를 떼어 놓는 다면 그것은 단지 잠깐의 겨울기고 이별이겠지. 그리하여 너를 다시 만날 날 봄은 찾아오면-



 꽃으로 메운 구덩이 위로 식은 몸을 누이며 은찬은 무릎을 꿇어 제 상체를 기대었다. 작은 몸에서는 익숙한 온기와 박동대신 시리고 낯선 적막이 흘렀다.



그러면 괜찮아, 나는 다시 널 만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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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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