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가람] 入夏

2014. 11. 15. 00:31

[은찬가람] 入夏

미래날조AU
사신이 된 이후 이야기 망상
처음으로 쓴 둥차 연성.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자신의 나무람을 도리어 책망하듯 훈훈한 봄바람이 새침하게 불어와 붉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제 본래 주인을 아는 새들도 소란스레 날아와 은찬을 반겼다. 은찬은 그 간지러운 애교를 적당히 받아주는 척,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았다. 밟기 조차 가녀린 풀들과 어리디 어린 신록, 수줍은 빛깔을 띠고 흔들리는 매화 무리. 봄처녀 마냥 만개한 풀들과 매화의 진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고 파릇함으로 뒤덮인 숲길은 작은 새들의 지저귐과 멀리서 들려오는 시냇물 소리로 인해 생기마저 넘쳐 흘렀다.

그야말로 봄의 절정. 하늘의 동쪽 끝, 청룡의 권역. 생명의 땅이라 불리우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의 정원은 세상과는 동떨어진 듯이 벌써 싹이 움터 꽃이 피고 진 끝에 곡식을 뿌리는 계절이 다 지났음에도 변함없이 그 주인을 닮아있었다. 



주은찬 x 청가람
入夏



​ 곡우(穀雨)마저 지나 여름이 찾아올 때면 은찬은 여름의 사신문을 열기에 앞서 동쪽에 있는 가람의 거처를 방문했다. 가람이 매번 여름이 오기 전에 사신문을 닫아야 하는 것 조차 잊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어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신들이 자신의 계절이 끝나면 그에 따라 휴식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였다.

 사신문을 열고 자신의 계절을 관장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단순한 계절의 순환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음양오행에 따른 세계의 질서를 지키는 막중한 일이었고, 때문에 사신들은 자신이 가진 거대한 힘의 대부분을 한 철에 쏟아부으면서 세상이 제대로 운영되도록 세심한 노력과 관심을 기울어여 했다.

 게다가 가람이 관장하는 봄은 특히나 힘의 소모가 심할 수 밖에 없는 계절이었다. 계절이 순환한다고는 하지만 봄은 나머지 세 계절과는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이다. 여름이 봄을 바탕으로 기운을 얻고, 가을이 그 생기를 끊어내어 만물을 재우는 겨울이 찾아오는 것이었지만 봄은 겨우내 잠든 만물을 깨워 일구는 시기였다. 심지어 청룡이 가진 목(木)의 기운은 유일하게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으니, 가람이 봄 동안 하는 일은 자신의 생기를 덜어내어 만물에 불어 넣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문제는 가람이 다른 셋과는 달리 사신강림에 빨리 성공했던 만큼 일찍 멈추어 버린 몸의 성장으로 인해 청룡의 몸을 하고서도 봄을 온전히 버텨내질 못한다는 것이었다. 과거 중앙에 있을 때 부터 유난히 봄을 타던 것이 그 징조였다. 또한 그것이 봄이 끝나갈 때 쯤이면 가람이 문을 닫는 것도 잊고 깊이 잠들어 버리는 이유였고, 매번 은찬이 여름을 맞이하기에 앞서 가람을 찾아와 봄의 마무리를 돕는 까닭이었다. 

 숲길로 들어서자 사방에서 매화 향이 진동했다. 은찬은 기분이 들뜨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떤 꽃을 좋아하느냐는 물음에, 가람에게 매화를 가장 좋아한다고 대답했던 적이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람은 잊지 않았다는 뜻에서인지 사신이 된 이후 가람은 언제나 거처에서 매화를 흐드러지게 피워놓고 은찬이 여름을 마무리 짓고 찾아오길 기다렸다.

 다른 이들은 만끽하는 봄, 여름을 다 보내고 가을이 되서야 겨우 만나는 처지에 무늬뿐인데다 짧은 가짜 봄이었지만, 기분이라도 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길고 긴 사신의 시간을 보내는 은찬의 몇 없는 낙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진짜 봄에는 이렇게 가람을 깨워 주기 위해 잠시나마 들르는 것이어서, 은찬에게 봄이란 반갑고 그립지만 아쉬움 가득한 계절임은 틀림없었다.


 그래도 발은 점점 빨라져간다. 풋풋한 소년기의 사랑처럼 가슴이 간지러웠다. 가람을 떠올리자 가슴 속에선 그리움과 설레임이 가득히 차올랐다. 어느새 뜀박질로 변한 다리로 은찬은 작은 냇가의 돌다리를 훌쩍 건너 뛰며 걸음을 서둘렀다.

 풀숲이 끝나고 박석으로 된 다듬어진 길이 나오자 은찬의 걸음은 더욱 빨라져만 갔다. 이윽고 커다란 문과 함께 청룡을 상징하는 푸르른 비단 장막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깊숙히 들어 갈 수록 더욱 많이 걸려있는 게 보이는 비단 천은 청명한 햇빛을 받아 나부끼며 신비스러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은찬에겐 구조마저 익숙해진 청룡의 공간이었다.

 은찬은 멈추는 법 하나 없이 복도를 가로 질러 가람이 잠들어 있을 곳을 찾아 갔다. 청룡 거처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전각. 바로 가람이 잠들어 있을 공간이었다. 몇개의 장막과 문을 헤치고 들어가다 확연해지는 매향에 은찬이 속도를 늦추며 발소리를 줄였다. 가람을 소란스럽게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내 마지막이라는 듯 문 하나를 두고, 은찬은 두 마리의 용이 음각된 양쪽의 기둥을 잠시 쓸어보다 조심스럽게 장지문을 열어 젖혔다. 


"으이구, 내가 못살아."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은 따스하고 훈훈했지만 은찬은 가람에게 다가가 먼저 창부터 닫았다. 사신인 가람에게 턱도 없는 소리지만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저러나 하는 걱정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잠시 낮잠을 자는 것도 아닌데 한참을 저런 자세로 잠들어 있었을 게 분명했으니- 조심히 가람을 안아 들어 침대 위에 눕히면서 은찬은 대체 왜 멀쩡한 침상은 버려두고 왜 창틀에 기대어 잠을 자는 건 지 모르겠다며 푸념했다. 


"가람아."


 살살 어깨를 흔들며 가람을 불러도 대답이 없다. 가람이 저희들을 깨우던 시절, 일어나지 않으면 던저 버리겠다며 난리를 피우던 것이 잠시 생각나 은찬의 입에서 작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워낙에 잠귀가 어두운 데다, 기력이 쇠해 든 잠이라 그런지 몇번을 흔들어 깨워도 가람의 감긴 두눈은 고요했다. 은찬은 말끔한 가람의 얼굴을 조용이 훑어 보다, 성장이 멈춰 소년 같은 가람의 모습에 은찬은 쓰게 웃었다. 


 옛날엔, 백건이 학을 뗄 만큼 고약한 잠버릇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젠 잠꼬대나 몸부림을 치는 일도 없다. 그저 조용히 늘어져 잠든 모습을 하고 있을 뿐.


"청가람. 일어나야지"

"...."


 작은 뒤척임 조차 없이 잠들어 있는 가람을 볼 때면 은찬은 이상한 상상이 들었다.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듯 걱정이 앞섰다, 이대로 가람이 눈을 뜨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언젠가 부터 가람은 은찬에게 강하지만 여린 아이처럼 느껴졌다. 단단하지만 쉽게 부서져 버리는 유리알 같이.​ 그래서 매번 이렇게 직접 찾아와 가람을 깨울 때면 오랜만에 보게 되는 가람을 기대하면서도, 막상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면 은찬은 마음은 불편했다. 마음 같아선 깨우지 않고 가람을 편히 쉬게 하고 싶었다.

 자신이 조금 더 자라면서 더 작게만 여겨지는 가람이 잠든 모습을 보고 있으면 봄 한철 동안 덜 자란 몸으로 애썼을 가람이 안쓰러웠고, 행여 무슨 일이 없을까 염려스러웠다. 여전히 열여섯 소년의 몸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옛날 부터 누구보다 꼼꼼하고, 제 앞가림이 철저한 것이 가람이었지만.

 더욱이, 목생화(木生火) 라고 했던가. 나무를 태워 불을 일으키는 것 처럼, 봄의 끝에 잠든 가람을 마주할 때면 은찬은 꼭 제가 가람을 제물 삼아, 제 힘을 얻고 그것으로 여름을 꾸려 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면, 여름이 한없이 두렵고 싫어지고야 만다. 사명이고, 책임이고 간에 필요없다는 생각. 다가올 길고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견딜 지 엄두가 나지 않기도 했다. 

 일어나 청가람. 은찬은 손을 가져가 가람의 뺨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대답없는 가람의 숨결을 확인 하듯 가슴팍에 얼굴을 묻자 더의상 인간의 것은 아니었지만 생의 기운이 가람의 그 성격 처럼 부드럽게 주변을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은찬은 무심코 안도하듯 가람을 끌어 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은찬?"

"아. 깼어?"

"왜 한숨을 쉬고 앉아있어."

 일어나자 마자 보이는 게 보이는 얼굴이 왜이렇게 궁상 맞은거야. 잠이 덜깬 얼굴로 가람이 투덜거렸다. 마치 은찬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안다는 듯한 어투에 은찬은 멋쩍게 웃어버리며 얼버무렸다. 네 덕에 내 일이 밀려버리니까 그러지. 내가 알게 뭐야. 잠에서 깨어나도 특유의 새침스러운 반응은 여전하다

. 그러려니 받아주던 은찬은 골려줄 생각이 난 모양인 지 올해는 절대 자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느냐며 가람에게 넌지시 물음을 던졌다. 절대 자지 않을 거라며 봄에 문을 열면서 모두에게 호언장담한데다, 백건과는 내기까지 했으니 가람 스스로도 충분히 멋쩍고 창피한 듯한 모양인지 빨개진 얼굴로 가람은 모른다며 소리쳤다. 덩달아 날아오는 배개를 피하며 은찬은 침대에서 일어나며 가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야지. 벌써 여름이야."

"주은찬, 조금만 더 있다 가."

"나중에, 가을이 오면."

"멍청아, 매실 담가 뒀으니까 그거라도 마시고 가. 챙겨도 줄테니까 갖고 가고. 너 여름에 몸 상해."


가람이 말없이 은찬이 내민 손을 잡으며 서운한 듯이 하는 말에 은찬은 거절할 수 없어 그러겠노라 대답하며 가람을 당겨 일으켰다.

 
 여름은 길다. 봄이 남긴 자취를 쓸어모아 그것들을 마저 가꾸고 길러내 가을이 올 때 까지의 그 무더운 시간을 아마도 은찬 자신은 가람이 봄 한철 그랬던 것 처럼 가람을 기다리고, 생각하며 보낼 터였다. 이 손을 놓고, 그렇게 기다리는 시간은 얼마나 길까. 

 그러나 시간이 촉박한 걸 알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람의 뒷모습을 보며 은찬은 올해도 짧게나마 봄을 느끼고 여름을 맞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안도를 느낄 수 있었다.

 여름은 길다. 그 길고 무더운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은 돌아올 가을에 맞이하게 될 따뜻한 저만의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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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세한(歲寒)
,

[찬가람] 꽃과 나무

2014. 11. 15. 00:26

주은찬X청가람

꽃과 나무



나무는 불을 살린다. 네가 나에게 목생화(木生花)를 아느냐 물었을 때, 나는 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누군가를 온 힘을 다해 끌어 안고 싶다는 기분도 뭔지 알 것 같았다. 망설이는 내게 묻는 네 눈이 오래된 나무처럼 곧은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며는 붉게 타올랐기 때문이다. 눈 속에서 가장 먼저 핀다는 봄의 꽃들보다도 네 눈은 선명하고 붉었다. 꽃보다도 붉고, 불꽃보다도 선명하게 타오르는 네 눈동자에는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나는 이렇게나 변변치 못한 녀석인데, 너에 비하면 그 어느 것도 나을 것 하나 없는 녀석인데, 너는 끝까지 나를 믿어주었다. 불은 나무를 태워 솟구치는 게 아니라 나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했던가. 그래서 나는 꽃이라고. 네가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피는 꽃이라고.

 나무에서 늦되게 피어오르는 불꽃은, 그만큼 더욱 환하게 타올라 빛난다고 그랬지.​ 그저 기다리겠다고 말하며 준비되지 않은 나를 널 배웅하는 길로 이끄는 네 손은 평소 네 모습과 달라 너를 의지하고 싶게 만들었다. 결국 야속할 만큼 활짝 열린 문 앞에서 나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네 표정을 마주하고 혼자서 서럽게 울었다.

 마지막 겨울, 너와 나만이 남아 보낸 밤. 보름달을 등지고 작별이 아닌 재회를 약속하는 너 때문에, 나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 했음에도, 동시에 모두 포기 할 수가 없어 네가 가고 떠난 자리에 남아있는 네 발자국을 핥고 또 핥으며 울었다. 

아아, 나는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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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세한(歲寒)
,

개시

카테고리 없음 2014. 11. 15. 00:24

세한

@rseun64

천사같은 보일라님의 덕택으로 티슷을 열게 되었습니다.

네이버 웹툰 둥굴레차! 의 2차 창작 글 연성과 썰이 올라옵니다.

비밀번호는 0000 양심에 맞깁니다...ㅠㅠ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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