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은 가시덤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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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씨의 이름은 청가람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오랫동안 마을을 지배해왔던 어느 유서 깊고 대단한 가문의-옛날부터 대대로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이름 깨나 있는 집안으로, 현재 마을 일대의 전답과 산림 대부분이 가문의 것일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지요-마지막 일원으로,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후 슬픔에 빠져 새로이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댁 무남독녀 외동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곧 둔덕 위에 자리 잡고 대대로 마을을 굽어보던 대저택과 그들 가문의 완전한 몰락을 의미했습니다.


 이윽고 소식을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모여들었지요. 마을이 떠들썩해졌습니다. 노인. 중년, 젊은이들. 그리고 어린아이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는 사람들이 장례식을 마치 오랜만의 축제인 양 기다리며 덩쿨에 감긴 그 집 높은 담장 주변을 기웃거리고는 하였습니다. 그 가문의 찬란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이들은 그것이 마치 그들의 것이었던 것처럼 여겼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한탄했습니다. 젊은 남자들은 그림처럼 예뻤던 젊은 아가씨의 죽음을 슬퍼했고, 마을 처녀들 또한 호들갑을 떨며 그 죽음을 입에 담았지요.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그 젊은 아가씨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던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오랫동안 감히 넘볼 수조차 없었던 담장 너머의 세상이 궁금했던 것이지요. 저택을 둘러싼 소문은 오랫동안 무성했습니다. 오래 전, 그녀의 아버지가 죽고 난 뒤 아름다운 모녀가 집의 대문을 걸어잠근 바로 그 때부터요.사람들은 스스로의 막연한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그 소문들을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설마 그럴 리 있겠냐고 스스로 허황되었음을 알면서도 그것이 사실이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제일 먼저 눈독을 들인 것은 젊은 남자 의사였습니다. 어떤 관계인지 모르나 저택과 연줄이 닿아있는 또 다른 도시의 꽤 큰 가문의 도련님인 그는 빨갛게 머리를 물들이고 웃음을 흘리곤 하는 젊은 의사선생님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한 때 아가씨의 주치의로서 유일하게 그 저택을 들락거리던 외부인이였고 한 때는 죽은 아가씨와 혼인을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던 남자였지요.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그가 필시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번번히 그들의 기대를 빗나갔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여주인과 죽은 아가씨에 대해 물을 때면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웃으며 얼버무렸고, 자기는 아는 게 없노라고 더이상 캐묻지 못하게 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애매한 태도는 이윽고 의심의 불씨가 되어 또다시 저택에 대한 소문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축제처럼 기다려온 죽은 아가씨의 장례식 날, 사람들은 소문의 진상을 직접 확인하고자 모여들었지요. 개중에는 그 대단한 집의 문턱을 한번 넘어 보고자 했던 방문객도 더러 있었을 것입닏다. 그러나 식의 구색을 갖춰놓고도 그 의사는 물론이거니와 먼젓번 남편의 죽음 이후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던 그녀의 어머니조차 장례에 얼굴을 비치지 않은 채로 낯선 사람들에 의해 서둘러 형식뿐인 장례가 마무리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어떤 범상치 않은 예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함부로 입 밖에 꺼낼 수도 없으며 그 정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모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 죽은 청가람 아가씨에게 어떠한 비밀이, 그것도 아주 치밀하게 관여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입니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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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

燦爛



붉은색 무성한 해를 등지고 길을 걸을 때면 발끝에 달라붙은 기다란 그림자가 저녁까지 끈질기게 뒤를 따라오고는 했다. 건은 바짝 고개를 숙인 채 도보 블록 위를 칸칸히 어설프게 쫒으며 길을 걸었다. 함께 걷고 있는 은찬과 다른 장난을 치기에 둘은 너무 지쳐있었고, 날씨는 너무 더웠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은 지루했기에 건은 혼자 할 수 있는 놀이에 제법 열중해 있었고, 때문에 처음 은찬이 부르는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자신은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는데, 건은 매일 지나쳐 가버린다. 은찬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다시 한 번 백건, 하고 불러본다. 건은 이번에도 듣지 못했다. 은찬은 그것이 못내 서운했다. 혹시 따라가지 않으면 뒤를 돌아 봐 줄까? 길 한복판에 오도카니 멈춰 선 은찬의 운동화가 건을 기다리며 수줍게 발끝을 들썩인다. 그러나 기다림은 오래가지 못한 채로 끝이 났다. 점점 멀어지던 건의 그림자가 자신을 지나쳐 이윽고 하얀 운동화 앞코에 아슬아슬하게 걸리고야 말았기 때문이었다. 은찬은 급하게 손을 뻗었다. 건아, 백건.


"...뭐야?"


 멀어진 어깨가 닿지 않아 옷자락을 쥐었다. 들린 티셔츠 자락 아래로 살짝, 곧게 뻗은 하얀 등이 보였다. 맨살에 닿는 더운 바람에 놀란 건이 곧바로 은찬이 쥔 제 옷자락을 획 낚아채며 몸을 움츠렸다. 동그란 두 어깨가 놀란 나머지 조금 숨 가쁘게 위아래로 들썩이고 있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나 은찬은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넋을 놓고 건을 쳐다 보기 바빴다. 미술관에 걸린 수채화의 주인공처럼 예쁜 백건이 바로 가까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자기 인형같이 하얀 건의 얼굴이 발간 해에 물들어 빛났고, 드물게 두 뺨이 붉었다. 그자리에서 도톰한 입술이 삐죽이는 앙증맞고 귀여운 모양을 본다면 누구라도 사랑스럽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체 뭔데?"

"...아냐..."


 그것은 그 자리에 단 둘이 동행하고 있던 어린 은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건의 얼굴이 낯설었고 예쁘게만 보여 가슴이 설레었다. 은찬은 구슬 같은 노오란 두 눈에 붙잡혀 움직이는 것은 커녕 제대로 말을 할 수 조차 없었다.


 건은 은찬의 뺨이 제 머리색만큼이나 붉어진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찬은 무언가 말을 할 듯 입을 달싹이더니,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건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해버렸기 때문에 건은 은찬에게서 아무말도 들을 수 없었다. 건은 제법 오랫동안 은찬을 기다려주었다.그러나 여름 해가 여전히 등 뒤에서 건의 여린 피부가 따끔거릴 만큼 뜨겁게 내리쬐고 있었고 때문에 건의 인내심은 그리 강하지 못했다. 더이상 길 위에 서있고 싶지 않았다. 휴, 한숨을 쉬며 건이 말했다.


"할 말 없으면 그냥 간다?"


 바로 그 때 은찬이 덥석 건의 손을 붙잡아 당겼다. 으으, 있잖아...! 은찬의 손바닥은 뜨뜻했다. 고개를 든 은찬이 건을 바로 보고 말한다. 


"전에 그거, 지금 해도 될까....?"

 

 조심히 허락을 구하면서도 은찬은 불안했다. 만약 거절당한다면 잔뜩 서운해질 것만 같다. 불현듯 올라오는 영문 모를 먹먹함이 있었다. 뺨이 붉어지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울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순간, 은찬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뜻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건은 대답없이 입술을 도톰히 부풀리고 있었다. 은찬의 손아귀에는 무심코 힘이 실렸다.


 대답을 피하며 건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심홍색으로 불타오르던 하늘은 어느새 맑은 보라색으로 변해있었고, 신비로운 색의 하늘은 불어오는 더운 바람과 함께 비밀스러운 일을 제안 받은 건의 어린 마음을 들뜨게 했다. 비스듬히 내리쬐는 골목은 개미새끼 한 마리 없이 조용하다. 그것은 둘만의 대화를 더욱 은밀한 비밀로 만드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은찬도 마찬가지여서, 둘은 조금 부끄러운 기억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그날. 한 풀 깊어지기 시작한 무더위에 더운 바람이 불고, 골목에선 우아하게 해가 지고. 그 때도 지금처럼 함께 걸어가던 와중에 불현듯 은찬이 고개를 내밀었다. 허락없이 들어온 살덩이가 입안을 누볐고, 한입 베어 문 아이스크림의 자취가 남아 있었던 탓에 시원하고 달콤했다. 그러나 조금씩 뜨거워졌다.가벼웠던 열기가 점점 버거워지고 어린 둘은 부끄러워졌다.


"...싫어?"

"싫은 건 아냐."


 건은 그 때와 비슷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손을 꼼질거렸다. 파르르, 은찬의 붉은 속눈썹이 해에 부딪쳐 투명하게 반짝이는 게 보인다. 건이 늘 거절하기 힘들게 만들곤 했던 것은 지금처럼 새카만 눈동자에 담긴 순수함 때문이었지만 건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순진한 건은 거절하는 방법도 모른다. 그래서 순하게 꼬리를 내린 은찬의 두 눈을 마주하고 선채, 붉어진 눈시울 앞에서 그저 그것이 꼭 제 잘못인 것만 같이 느끼는 것이다. 


"건아.응?" 


 어린 은찬은 그런 건을 알지 못했지만 조금은 영악했다. 꿈을 꾸듯, 울먹이듯, 둥글게 오므린 빨간 입술로 이름을 부른다. 손을 매만지며 애타게 부르고 매만진다. 


부끄럽고, 간질거리는 이름은 제 것 같지가 않다. 막연한 죄스러움에, 건은 눈꺼풀을 닫는다. 


그 순간 감은 눈꺼풀 안 쪽에서는 빨간 불빛 같은 것이 반짝였다.


"...대신, 빨리 하는 거다?"

"응."


 말갛게 하얀 얼굴 위로 비스듬히 햇살이 내리쬔다. 희고 섬세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은찬은은 조심히 발뒤꿈치를 들었다. 


먼젓번에 코끝이 서투르게 부딪쳤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수월하게 입술이 맞닿았다. 둘은 기억을 더듬듯 주름진 겉 입술을 서투르게 빨고, 이를 부딪치며, 안쪽 깊은 곳의 숨을 파먹었다. 몇번 입술을 부딪친 후 둘은 열에 달뜨기 시작했다. 숨이 차오를 무렵엔,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분홍색 혀가 서로의 틈새를 헤매며 엉키고 있었다. 입 속에서 뜨겁게 달구어진 침방울이 포슬포슬 흘러 넘쳐 턱을 적시고, 숨결이 하나로 섞인다. 그 때마다 둘은 아랫배 부근에서 올라오는 기분 좋은 뒤틀림을 느꼈다.


 그 이상야릇한 떨림은 둘의 입맞춤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어린 둘은 착각 속에서 허기를 느끼며 실제로는 고작 1분 남짓했을 시간 동안 허겁지겁 입술을 부딪쳤다. 땅을 딛고 곧바로 서 있던 발목이 서로 엉켰고, 볼록한 배가 우연히 맞붙었다. 파드득, 몸을 떨며.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 건은 어쩌면 눈을 떴을 때 해가 져버려 밤이 되어 버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걱정과 달리 하늘엔 여전히 해가 떠 있다. 다만 끄트머리에 검푸른 어둠을 걸친 채 어느새 짙어진 보라색으로 변한 하늘이 둘의 머리 위에서 서서히 식어가는 햇빛과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




"이상해."

"나는 좋은데...."


하늘을 두고 말한 것이었는데, 은찬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손을 놓고 말한다. 미안해. 동그랗게 두 눈을 뜬 채, 건은 불그죽죽하게 달아오른 은찬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은찬이 울먹이고 허둥지둥 거리는 것을 본 적 없는 건에게 눈앞의 은찬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건은 그것이 조금 전 처럼 순전히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순진하게, 그것이 이미 휘둘리기 시작한 것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아직 어린 건은 서투르게 은찬을 달랜다.


"그....다음에 그거 또 하자."

"....진짜?"

"응."


 배고프다. 은찬의 손을 잡으며 건이 말했다. 밝아진 얼굴로 은찬이 손에 깍지를 낀다. 나는 네가 싫어할까봐. 건은 대답없이 걸었다.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은찬이 다시 자기가 아는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으니 다행이었다.


둘이 걸어가는 눈 앞에는 식어가기 시작한 노란 햇살이 비스듬히 비추는 광경이 사진처럼 선명하게 들어왔다. 푸르게 변한 하늘이 서편으로 붉은 해를 밀어내고 있었다. 밀려나는 노을과 함께 어느덧 완전히 그림자에 묻혀가기 시작하는 골목을 둘은 등진다. 소년들은 아주 느리게 걸었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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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카테고리 없음 2015. 8. 10. 17:24

"...삼촌 안 준다."

"안 먹는다. 안 먹어."

"진짜 안 줄 거야."



 발음조차 부정확한 어린 목소리와 달리 노오란 짐승의 눈은 백훈을 향해 살기를 띠고 번쩍이고 있었다. 아직 떼지 못한 꼬리가 발칙하게도 적개심을 빳빳하게 세우고 있는 것을 보며 백훈은 코웃음을 쳤다. 위계를 아직 모르는 어린것은 이빨과 손톱을 숨기는 법을 몰랐다. 다만 제 몫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아주 당연한 욕심만을 안다. 어린놈은 그래서 백훈이 제 먹이에 손대지 않을 것을 알고도 한참 동안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참다 못해 제 몫을 허겁지겁 물어뜯는다. 이번에도 놈이 가져간 것은 손이었다. 놈은 언제나 잡아온 먹이의 손이나 발 같은 것을 채어갔다. 어미젖을 일찍 떼었다더니, 그것이 못내 한이 된 것처럼 뜯어먹을 살도 별로 없는 것들을 가져다가 웬 종일 깨물고 빨아대는 것이다.


살점을 이빨로 깨물어 뜯어내고 입술로는 빨아물며 한가득 입에 물고도 샛노란 눈동자에선 허기가 가실 줄을 몰랐다. 침을 질질 흘리며 기어코 오도독 소리를 내며 먹이를 뼈 채로 씹어대기 시작했을 때, 백훈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살점이 뜯겨나간 자리에 하얀 뼈대가 보인다. 그러다 더 이상 취할 뼈조차 다 먹어버리면, 녀석은 어미의 젖을 빨듯 제 손가락을 빨며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다 결국엔 애타게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다.


서러운 울음소리는 좁은 동굴 안을 가득 채우고 울려 퍼졌다. 어린놈은 그렇게 울고, 또 운다. 몇 일 밤낮을 울고, 그러다 제풀에 쓰러져 발작하듯 사지를 뒤틀면서도 울며 어미를 찾는다. 목소리는 못내 서럽고 억울했다. 백훈은 차마 외면하지 못한 채 손을 뻗어 우는 아이를 안아들었다.


"이놈아. 그러게 왜 그리 미련하게 굴어. 울지마라, 응? 울지 마."


멍청한 놈이, 저가 버려진 것도 모르고선. 그저 제멋대로 울고, 깨물고, 할퀴면서 성화다. 백훈은 그래서 이 어린것이 무척 싫었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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