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현] Night & Day

2015. 2. 14.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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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리스크 나무 아래 1

2015. 1. 2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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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솥을 안치고 얼마 안 있어 고소한 밥 냄새가 났다. 칙칙 요란한 소리를 내며 솥이 끓는다. 뭉게뭉게 하얀 김이 퐁퐁 샘솟는 모양이 탐스러웠다. 가람은 밥 뜸을 들이는 동안 국을 끓이고 생선과 나물로 몇 가지 요리를 더 했다. 은찬이 잠에서 깨고, 욕실로 들어가자 손은 더욱 바빠졌다. 가람은 은찬이 씻는 동안 음식들을 그릇에 나눠 담았다. 


 그리하여 두 명 분의 밥상을 다 차렸을 무렵 동이 트기 시작했다. 햇빛에 비친 장지문이 하얗게 빛났다. 거슬리게 늘어지는 문살의 가느다란 그림자에 콧등을 찡그리며 가람이 장지문을 할짝 열어젖혔다. 차가운 공기와 따뜻한 햇살이 방 안으로 흘러든다. 햇살이 마당 위로 소담스럽게 내리쬐는 광경을 보며 가람은 기지개를 켰다.


"좋은 아침."


곧이어 밥상 앞에 앉은 은찬이 인사했다. 가람이 대답한다.


"좋은 아침 주은찬."


오늘도 어김없이.



주은찬X청가람

손끝의 연인



"오늘 무슨 일 있어?"


 저 좋아하는 것들로 반찬을 만들어주는 날이면 은찬은 말이 많다. 차려준 보람이 없게 밥은 먹지 않고 여기 저기 젓가락을 놀려 대면서 무슨 산해진미라도 눈앞에 둔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이건 맛이 어떠니, 저건 또 어떠니. 그렇게 한참을 답답하게 깨작거리는 것이었다. 가람은 으레 그렇듯이 밥이나 먹어 돼지야, 하고 말하며 은찬에게 수저를 건네주었다.


"이렇게 먹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난다. 기억나?"

"또 뭐가."

"가람이 네가 아침 밥 차릴 때 마다 백건이 시끄럽다고 매일 뭐라고 했잖아. 그러다 너희 둘이 싸우고,"

"주은찬."

"나랑 현우는 너희가 밥상 엎을까봐 밥상 붙잡고 밥 먹고......"

"나 다 먹었어."

"안 남기고 다 먹었지?"


 가람은 대답대신 빈 밥그릇을 내밀어 보였다. 그는 배고픔을 잊은 지 오래였지만 은찬은 가람이 밥을 함께 먹기를 원했다. 가람이 밥을 먹지 않으면 자기도 밥을 먹지 않겠다는 은찬은 막무가내였기에 가람은 매일 삼시세끼를 꼬박 챙겨먹어야했고 더불어 밥을 다 먹고 난 뒤엔 은찬에게 빈 그릇을 검사 받아야했다.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 것 같아 불쾌했지만 은찬의 고집은 대단했다. 


"당연히 다 먹었지 멍청아."

"그랬어? 잘했어 청가람."


가람은 더부룩함을 감추고 남은 반찬을 깨작거렸다. 은찬은 제 밥을 그릇에 덜어준다.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이렇게 잘했다 잘했다 칭찬 하며 머릴 쓰다듬는 것도 순 애 취급 하듯 하는건지. 어쩐지 모르게 얄미웠지만 묘하게 간질거리게 만드는 칭찬은 싫진 않다. 가람은 은찬이 덜어준 밥을 다시 돌려주며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었다. 집은 반찬을 은찬의 숟가락 위에 올려 주며, 많이 먹어 주은찬, 하고 말했다. 


2.


 설거지를 하는 동안엔 은찬이 늘 부른 배를 문지르며 거실 소파에 앉아 아침 드라마를 봤다. 목을 길게 빼고 TV를 보며 가람은 그릇을 닦았다. 늘 그렇고 그렇기 마련이듯 드라마는 그저 그랬다. 금세 TV에 흥미를 잃은 가람은 심드렁하게 눈길을 돌리다가 어쩔 수 없이 눈에 들어온 은찬을 보며 혀를 찼다.


"진짜 이제 아저씨가 따로 없다 주은찬."

"그럼 가람이 넌 아줌마야? 꼭 부부 같다."

"이게 또 헛소리야. 난 너같이 게으른 남편 필요 없거든."

"....내가 뭐 도와줄 거 없어?"


 가람의 삐죽한 한마디를 듣고 나서야 소파에 늘어져 있던 은찬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는다. 은찬은 끝끝내 일어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가람은 그런 주제에 목소리만 별이라도 따다 줄 듯 하염없이 다정스러운 그 뻔뻔한 꼬락서니에다 대고 뭐라 한마디를 해줄까, 아니면 화를 낼까 머리를 굴리며 잠시 생각을 하다가, 


"됐어. 설거지 다하고 청소할 거니까 그 때 도와주기나 해."


역시 그 게으르고 뺀질거리는 모습으로 능청을 부릴 걸 또 지켜보느니 차라리 이게 낫다. 그러나 웬 걸. 청소라는 이야기에 은찬은 단 번에 얼굴이 죽어서는 다 드러나는 표정으로다가 또 그 귀찮은 일을 어떻게 빠져나갈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인상을 썼다. 


그러고는 아주 비장한 결심이라도 한 듯 얼굴을 굳히며 한다는 말이


"가람아, 우리 청소는 좀 나중에 하자."

"주은찬 네가 그러니까 어디 가서 아저씨 소리나 듣는 거야."

"너무하다. 나 아직 아저씨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잖아? 나 아직 쓸 만 해."

"쓸 만하긴 개뿔이. 당장 일어나 이 게으름뱅이야. 얼른. 나 청소할 거란 말이야."

"에이......가람아, 그냥 내일 하면 안 돼? 내일 하자. 내일."

"멍청아. 오늘 아니면 안 돼. 일어나 빨리."


 결국 가람의 성화에 못 이긴 은찬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났다. 투덜거리지는 않아도 불만스러워 보이는 은찬의 얼굴을 깔끔히 무시한 채 가람은 가장 먼저 은찬의 방으로 향했다. 가람은 방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창문을 모두 연 다음 은찬에게 먼지 털이를 쥐어주고 청소를 시켰다. 은찬이 먼지를 털어 내면 가람이 빗자루와 걸레로 바닥을 청소했다.




3.


  낡은 집에선 전체적으로 마른 낙엽의 냄새 같은 것이 났다. 바싹 마른듯하면서도 어쩐지 기분 자체는 축축한 그런 냄새였다. 그것이 짙게 베인 구석구석에서는 오래된 잡동사니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굴러 나왔다. 제법 쌓인 그것들은 은찬의 물건이기도 했고 가람의 것이기도 했으며 백건이나 현우의 물건들이기도 했다. 꼭 무슨 창고 같아. 가람이 중얼거리자 그 순간 마당을 쓸고 있던 은찬이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창고 정리하는 걸 깜빡했어."


 부랴부랴 은찬이 방에서 창고 열쇠를 꺼내왔다. 은찬은 바로 몇 해 전 순이 할멈이 노환으로 돌아가신 후 자기가 대신해서 창고를 관리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제법 쌓인 잡동사니가 제 것만 있는 게 아니라 버려야할 지, 말아야할 지 고민하던 차에 잘 된 일이었다. 여차하면 거기다 다 쳐박아두면 되니까. 가람은 은찬과 함께 그것들을 비닐 봉투에 꾹꾹 눌러 담은 다음 창고로 향했다. 그러나 자물쇠를 풀고 창고의 문을 열었을 때 가람은 눈앞으로 훅하고 밀려드는 두터운 먼지바람과 쾌쾌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며 재채기를 했다.


"관리는 얼어 죽을, 너 대체 얼마나 청소를 안 한 거야?"


 한동안 손을 대지 않았던 탓에 창고를 정리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아무렇게나 쌓인 물건들은 전부 하늘나라에서 떨어진 보패들이었다. 정리를 하고 있으면 군데군데에서 추억어린 물건들이 튀어나왔다. 가람은 새삼 신기한 듯 그것들을 만져보다가 몰래 가져가면 안돼. 하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은찬에게 눈을 흘기며 빗자루를 들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가람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은 은찬이 청소를 했고 가람은 밑을 쓸었다.


 가람은 손을 꼬물거리다 선반 위를 청소하는 은찬을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이제는 새삼스러운 사실이었지만 은찬은 가람보다 아주 조금 키가 컸다. 사실 크지 않은 건 가람뿐이었다. 중앙에서 수련을 하는 동안, 성장이 멈춘 가람과 달리 나머지 셋은 조금씩 키가 더 자랐다. 은찬은 그 후에도 나이를 먹으며 키가 좀 더 자랐고 얼굴은 좀 더 갸름해졌다. 처진 눈매는 조금 더 가라앉아 어릴 때보다도 더 차분한 인상으로 변했다.


"왜 그래?"

"그냥 쳐다봤어."

"역시 잘생겼지?"

"미친 놈이 뭐라는 거야"


 가람은 새삼 낯설어진 은찬의 옆 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 옆 모습에서 햇빛에 투과되어 잘게 부서지는 듯이 반짝이는 붉은 색 속눈썹을 보고는 덥썩 은찬의 뺨을 감싸 쥐었다. 차가운 가람의 손에 가늘고 긴 속눈썹이 불씨처럼 파르르 떨렸다. 보통 사람보다 조금 높은 은찬의 따뜻한 체온은 손바닥을 통해 가람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제서야 사라져 버릴 지도 모른다는 비현실적인 걱정이 사라지고 안심이 되었다. 가람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친 은찬은 고개를 숙였다.


"가람이 너 손 무지하게 차다. 추워? 너 추위 많이 타잖아."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친 은찬이 코를 부벼대며 말했다. 추위 따위야 당연하게도 느끼지 않았지만 고개 숙인 은찬의 어느덧 새까매진 머리 뿌리를 바라본 가람은 은찬을 끌어안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좀 춥기는 하다. 너는 안 추워, 주은찬?"

"나야 뭐 추위 별로 안 타잖아. 추우면 이렇게 안고 있으면 되지."


 은찬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미소였다. 그렇게 서른을 훌쩍 넘긴 삼심대 후반의 아저씨가 된 은찬을 볼 때마다 가람은 늘 은찬을 아저씨라고 놀렸다. 하지만 사실 아저씨라고 부르기엔 조금 곤란한 것이 은찬은 나이와 달리 여전히 그 뺀질한 인상만은 어쨌든 간에 젊은 편이었다.


 옛날보다 게을러지기는 했지만, 은찬은 걱정하던 것처럼 머리가 벗겨지지도 않았고 주름이나 뱃살이 접히지도 않았다. 분위기 같은 것에서 나이 먹은 티만 좀 날 뿐 여전히 젊은 인상을 주는 얼굴은 문득문득 가람에게 그의 시간이 이십대 후반에서 멈추어 버린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난 괜찮아.청가람."

"이게 왜 뜬금 없이 헛소리야?"


 하지만 시간의 흐름마저도 느껴지지 않는 은찬은 가람을 기다리는 동안 오로지 그것을 위해 아마도 이때 껏 낙엽 냄새만이 가득해진 빈 찻집에서 혼자 수련을 하고, 나이를 먹어가며 시간을 보냈을 테다. 가람은 미안함과 서글픔을 느꼈다. 주은찬의 시간과 기다림은 어떻게해도 자신이 보답 해 줄 수가 없다. 이렇게 손을 잡는 것이 가람이 은찬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사과이자 위로고 보답인 것이다. 세월을 내색하지 않는 은찬이었지만 그  손가락만은 유일하게 옛날과 달랐다.


 거칠고  억센 마른 나뭇가지같은 손가락이 얽혀와 가람을 어루만졌다. 은찬에게 남기고 간 세월을 스스로에게 새기듯 가람은 은찬의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뒤늦게 그 흔적들을 가리듯 은찬이 빠져나가려 했다. 가람은 은찬의 손을 더욱 세게 붙들었다. 꽉.



"...배고프네."

"...라면 먹을래?"

"주은찬 네가 끓여주면.물론 별로 미덥지는 않지만."


 어느덧 점심 때를 훌쩍 놓친 시점에서 아침과 마찬가지로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가람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은찬이 슬며시 웃는 게 퍽 보기 좋았다.



 은찬은 분명 나이를 더 먹었고, 키가 조금 더 컸고, 머리엔 사실 이미 검정물이 든 데다 이 손 처럼 홀로 늙어가고 있는 아저씨지만 가람에게 은찬은 여전히 잘 웃고, 다정하고, 조금 뺀질거리기는 하지만 제 맘을 고스란히 품어주는 머리색 빨간 주은찬이었다. 


변한 건 없다. 가람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쭉. 단지 변하지 않는 둘이 있을 뿐이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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