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11.21 유곽 au
  2. 2015.11.21 엔드게임
  3. 2015.11.21 찬건

유곽 au

카테고리 없음 2015. 11. 21. 23:43

"그래서, 얘들을 뭐라고 부르는데? 숯댕이?"
"...기왕이면 보일러 요정이라고 해줘."
"벌레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 화낼텐데."
"어, 진짜네. 화났다 화났어."

 그것들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리를 이루어 백건을 향해 달려 들었다. 백건은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다, 곧이어 인상을 찌푸렸다. 하나 둘, 따로 보면 별 것 아닌 것들이 모여 어느새 위협적인 기세로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겁을 먹고 움츠라드는 어깨에 백건은 심술을 부리듯 갖고 놀던 녀석을 내던지다시피 그 무리 속으로 털어냈다. 깨끗했던 손바닥은 시커멓게 변해있었다. 백건은 손바닥을 털며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징그러."

 그 순간 숯덩이들이 말을 알아 들은 것처럼 더욱 발끈하며 검댕을 일으켰다. 백건은 당황해 뒷걸음질 치며 날리는 먼지를 털어냈다. 검댕은 털어내면 털어낼수록 들러붙어 얼룩이 곳곳으로 번져갔다. 매캐한 먼지에 코끝이 간지러웠다. 자꾸만 올라오는 기침에 기다란 속눈썹 끝에는 물기가 서렸다. 그러다 시커멓게 얼룩이 묻은 소매 끝을 발견했을 때, 백건은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다간 옷이 더러워질지도 모르는데. 옷을 더럽혔다고 혼이 났던 게 바로 며칠 전이었다.  한 번 더 옷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간 아예 발가벗겨 손님에게 보내버릴 테다. 꼬박 하루를 건을 굶긴 주인이 식은 밥덩이를 던져주며 했던 말이었다. 백건은 불현듯 두렵고 겁이났다.

"야! 이..이것들 좀 어떻게 해 봐!"

"그러게, 그러면 화낸다고 했잖아..."

 할 일도 많은데. 은찬은 한숨을 내쉬며 삽을 내려놓았다. 고개를 돌리자 숯덩이 틈에서 하얀 얼굴 한가득 검댕을 묻히고 있는 백건이 보였다. 

"세상에, 너 지금 우는거야?"

백건은 대답대신 빨게진 코를 훌쩍였다.

"얘들이 장난 치는 건데 ,, 왜... 울고 그래..괜찮아....?"
"옷, 더러워지면 안된단말야."

 은찬의 시선이 백건이 입고 있는 옷으로 돌아갔다. 화려하게 수가 놓인 옷은 언뜻 봐도 고가의 귀한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황한 은찬은 급한대로 목에 걸고 있던 수건으로 옷을 털어보았지만 묻은 얼룩은 좀처럼 사라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시꺼멓게 번져, 상황은 점점 위태로운 형국이 되어갔다. 백건의 얼굴은 점점 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이 옷...많이 비싸...?"
"말이라고 해?"
"그..그렇지...,"

은찬은 마찬가지로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백건의 눈치를 살피며 얼룩진 뺨을 수건으로 문질렀다. 얼룩을 닦아내자 하얗게 반짝이는 뺨이 보였다. 매일 불 앞에 앉아 그을리고 거칠어진 자신의 손과 달리 달리 새하얀 피부가 무척 보드라워서 자칫 잘못하면 까슬한 광목 수건이 그 뺨에 상처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조심, 얼룩을 닦아낼 때 마다 백건의 짧은 머리카락이 은찬의 코에 닿아 향기가 났다. 은찬은 침을 꼴깍이며 머리칼에 코끝을 자꾸만 부볐다. 향기는 달았다. 그러다 이리저리 불만스럽게 시선을 굴리는 두 눈이 어쩌다 제 쪽으로 향할 때면 백건이 자신을 눈치 챌까 가슴을 졸였다.  고운 얼굴도, 비싼 옷가지도 모두 하나 같이 알고 있는 세상의 것이 아니어서, 은찬은 꾹 다물린 백건의 옅은 분홍색 입술을 한 번 만져보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 하면서도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너 왜 자꾸 쳐다봐?"
"어,...어?"
"자꾸 보고 있잖아."
"아,냐...안 봤는데..."
"거짓말.내가 다 봤는데."
"...예뻐서."

은찬은 수건을 손에 쥐고 꼼지락 거리며 중얼거렸다. 너무 예뻐서. 신기해서. 그래서.



Posted by 세한(歲寒)
,

엔드게임

카테고리 없음 2015. 11. 21. 23:35

엔드게임

1.

하나, 둘, 셋. 어항 안에는 물고기 세 마리가 헤엄치고 있었다. 아침에 먹이를 주었을 때만 해도 분명 네 마리였는데, 이제 보니 꼭 한 마리가 모자란다. 이상하네. 은찬은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머지않아 은찬이 굽어 내려 본 어항의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죽어있는 놈이 보였다. 느긋하게 헤엄치는 다른 세 마리의 살랑거리는 붉은색 꼬리 사이로 보이는 그것은 허연 배를 내놓은 채 죽어있었다. 사람으로 치면 옆구리일까 싶은 부분이 터져 내장인지 뭔지. 아무튼 그 비슷한 게 밖으로 튀어 나와있는 채로 말이다.

곱게 죽지도 못한 몰골은 처참해서 은찬은 솔직히 불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부풀어 오른 하얀 배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터진 틈새로는 알 수 없지만 징그러운 것들이 튀어 나와있었고 그 치부를 가리기 위한 장막처럼 빛을 투과한 지느러미가 붉은색을 띠고 투명하게 너울거렸다. 그리고 뿌연 물살 사이로 또렷이 보이는 죽은 금붕어의 누우런 흰자위와 동공이 자신을 원망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금붕어는 키우기 쉽다고 그랬는데.

애초에 다른 관상 어종들을 다 제쳐두고 금붕어를 택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관리만 잘 해주면 수년씩 살 수도 있다고. 물론 그 정도로 귀찮게 긴 수명을 바라지야 않지만, 어쨌든 금붕어라는 게 다른 것들보다 훨씬 수월한 종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죽어버리다니. 크게 애정을 갖고 기른 것은 아니었지만 오래 두고 보살피던 것들이 막상 죽어버리자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건아, 너 혹시 금붕어 먹이 줬니?"

그러다 문득 짚이는 구석이 있어 묻자, 등 뒤에서 책을 읽고 있던 백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은 갈아줬고? 또다시 끄덕끄덕.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백건을 힐끗 바라본 은찬은 이윽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물 갈아 준 게 언제야?"
"...왜 그러는데?"

대답을 피하듯 되묻는 백건의 목소리는 작고 조심스러웠다. 돌아보면 불안을 감지한 듯 아몬드 모양의 노란 두 눈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은찬은 신음하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건은 얼마 전부터 은찬의 금붕어들을 맡아 기르는 중이었다. 은찬이 그렇게 하도록 했던 탓이다. 무엇이든 금방 싫증을 내고 변덕을 부리던 녀석이 유독 금붕어 어항에 오래도록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이 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다. 그래서 먹이를 주는 것도, 물을 갈아 주는 것도, 상태를 확인하는 것도 최근에는 모두 다 건의 몫이었다.

언제나 세상을 감정 없이 바라보던 눈이 저보다 약한 그것들을 돌볼 때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싹이 움트듯, 어린 새끼가 땅에 첫발을 내딛듯 설레고 조심스럽게. 그렇게, 주인보다도 더 그것들을 살뜰하게 보살폈을 텐데. 그것이 네 잘못으로 죽어버렸다고 선뜻 말 하기가 꺼려지는 것이었다. 어떡할까. 여전히 불안하게 얼어붙은 눈동자를 빤히 올려다보며 은찬은 고민했다. 백건은 자신이 바라보는 시선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죽었어."
"뭐?"

그래서 은찬은 입을 연 마지막 까지도 조금 뜸을 들이며 고민했다. 예상대로 놀란 백건이 앞으로 튀어나온다. 읽고 있던 책이 카펫 위로 나뒹군다. 은찬은 건이 설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서며 건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불안하게 어항 속을 헤매던 시선이 굳는다. 터진 배 위에 고정된 시선이 위태로워 몹시 염려스러웠다. 평소엔 제멋대로에 사납기만 한 녀석이 왜 이런 일에는 눈에 띠게 여려지고 약해지는 건지. 

"안되겠다, 그냥 보지 말자."

결국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을 보다 못한 은찬이 두 눈을 가려주고 나서야 건은 막힌 숨을 토해내듯 긴 숨을 뱉으며 안도하는 것이었다. 눈을 가린 손바닥 위를 기다란 속눈썹은 오래도록 불안하게 서걱거렸다. 그러다 백건은 눈가를 덮은 은찬의 손을 그것보다 큼지막한 제 손이 아플만큼 쥔다. 하얀 손등에는 핏줄이 시퍼렇게 올라와 있었다. 괜찮아. 굳어있는 어깨를 쥐고 누르며 은찬은 백건을 달랬다. 괜찮아. 가빠진 숨을 달래며, 거듭 토닥이며, 귓가에, 그리고 뺨에, 입술에 은찬은 제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달래는 동안에도 은찬은 혹시라도 건이 울음을 터트릴까 맘을 졸여야했다. 혹시라도, 저번처럼-

"나 때문이야?"
"...아냐. 금붕어는 금방 잘 죽는데. 건아, 괜찮아. 응? 괜찮다니까."
"그치만, 물. 나 생각해보니까 안 갈아 줬어."
"그럴 수도 있지. 그것 때문만은 아닐거야. "
"그래도-"

 다행이 은찬이 염려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건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핏기가 가신 입술이나, 새빨갛게 충혈 된 눈가가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은찬은 아직 눈가의 온기가 남은 손을 가져가 건의 손을 맞잡았다. 나 봐. 내가 괜찮다고 하고 있지? 다시 한 번 건을 안심시키듯 속삭이고, 손을 어루만지며 달랜다. 꽉. 무심코 힘이 건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은찬은 잡힌 손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낀다. 말없이 매달리며, 온몸으로 애원하고 갈구하며 불안하고 애처롭게.

"그건, 어쩔 수 없었어."


*



Posted by 세한(歲寒)
,

찬건

카테고리 없음 2015. 11. 21. 18:51



1.


 주은찬 스테파노 보좌신부를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깨운 건 때 아닌 빗소리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 너머를 바라보았다. 하늘과 땅이 경계없이 칙칙한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때아닌 찬바람이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공기또한 스산해서, 빗방울이 곤두박질치며 터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은찬은 이따금씩 그것이 어린 나뭇가지에 부딪칠때면  금방이라도 부러질듯 흔들리는 것을 보며 인상을 썼다. 어제지만 해도 햇살이 반짝이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분 나쁜 날씨였다.



2.


-스테파노 신부님?


 은찬이 여유롭게 준비를 마치고 사제관을 나섰을 때 현관 앞에는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그는 창백한 얼굴과 텅 빈 시선이 무언가 사연이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중년의 남자였다. 무슨 일이시죠? 은찬은 친절하게 물었으나 남자는 빨간머리 신부를 미심쩍게 바라보며 한참동안 눈치를 살폈고, 이윽고 땅에 고개를 처박고는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이따금씩 깊은 한숨을 내뱉는 것이었다. 은찬은 조용히 남자를 향해 우산을 기울이며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괜찮으니 뭐든지 말씀하세요, 형제님. 아니면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 할까요? 


남자는 은찬의 말에 슬며시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때 은찬은 남자가 이상할 정도로 겁에 질려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황망히 비어있는 시선에 은찬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남자는 덥썩 그의 손목을 잡아왔다. 그러더니 그는 별안간 마차가 세워진 곳으로 우악스레 끌고 가는 것이었다.


 은찬은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던 끝에 몇차례 몸싸움을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흙탕물에 젖어 더러워진 수단 자락을 털어내며 은찬이 다소 격앙된 어조로 외치자 남자가 방금 전과 같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은찬을 돌아보았다. 은찬은 남자에게서 좀 더 제대로된 대답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남자로부터 들을 수 있던 것은 대답대신 헐떡이는 숨소리였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 갈듯 깔딱거리는 숨소리, 은찬은 그 사이로 이건 아주 급한 일이라는 것만을 겨우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이보세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

-....

-제대로 말씀 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갈 수 없습니다, 형제님.  

-천사.

-네?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3.


 천사. 마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남자는 은찬에게 마을에 나타난 천사에 대한 이야기를 쉴새없이 늘어놓았다. 남자의 말에 따르면 천사는 한 달 전, 마을 부자의 집 정원에 떨어졌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이 신화에 나오는 천사와 같아 그들은 그것이 천사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천사는 땅에 떨어지며 날개를 다친 모양인지 커다란 깃을 펄럭이며 몇 번날아오르려는 시도를 하다가 결국엔 실패했다고. 마을사람들은  대화를 시도했지만 천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우선 그것이 달아나지 않게 그대로 짐승 우리에 가두어 놓기로 했지만 나중엔 천사를 함부로 대한 것에 벌을 받을까 두려워 여태껏 교단에 알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저는 용서받을 수 있겠지요?신부님께서 저를 도와주시겠지요?


 남자의 굳은 어깨를 토닥였다. 이윽고 그는 천사에 대한 몇 가지 추가적인 질문을 던졌는데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날개가 달렸는지. 사내인지 계집인지 등의 문제들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남자는 비교적 정확하게 성서에 알려진 천사의 모습을 그려냈다. 억새고 커다란 날개. 비단 같이 부드러운 깃털. 순결한 백색.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아름다움을 가진 그것은 분명 신의 대리자였다.


 그러나 남자의 거듭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은찬은 여전히 그것이 도무지 천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머릿속으로 몇 년 전 그가 신학교의 학생이었을 때 우연히 보았던 서커스 공연을 떠올리고 있었다. 학생시절 학교의 친구들과 함께 유랑 서커스단의 값싼 관람료에 현혹된 나머지 딱 한번 그것을 보러간 적이 있었고 거기서 박쥐 날개를 가진 여자를 만났다. 정확히는 가짜 날개를 붙이고 사람들을 속이던 사기꾼. 아마, 그 천사라는 작자도 그 비슷한 사기꾼일테다. 


천사라니 가당치도 않지. 그는 이제 막 사제서품을 받은 젊은 신부였고 그는 속세에 떠도는 마녀나 악령, 저주, 혹은 점성술 같은 미신을 단호하게 부정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믿는 것은 오직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성인들의 기적이나 예언, 그리고 성서가 전부였다. 남자가 초조한 얼굴로 말없이 가슴에 성호를 긋는다. 은찬은 그가 걱정하는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거짓으로 속삭이며 고개를 돌렸다.  마차가 숲길에 들어선 모양인지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작은 사각형의 유리창 너머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5.


 정오가 지나자 빗줄기는 더 이상 방울방울 떨어지지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하늘이 미치기라도 한 듯 비가 장맛비처럼 억수같이 쏟아져 내렸다. 은찬은 유리창의 물 벽 너머에 짙은 초록색 상이 맺히는 것을 보고 그들이 아직 숲길을 달리는 중임을 깨닫는다. 마을로 향하는 흙길이 진창이 되어 버린 탓에 마차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여정은 예상보다 길어질 것 같다. 튼튼한 쇠바퀴가 고랑을 치듯 진흙 속을 열심히 가로지르며 앞으로 나아갈 때 마다 차체가 튀어오르는 듯 덜컹거렸다. 이따금씩 하늘에선 번쩍이는 번개가 땅에 내리꽂혔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는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에 더욱 불안한 표정이 되어 무릎위에 주먹을 올린 자세로 경직되어 있었다. 그와 달리 은찬은 비교적 평온한 마음으로, 그러나 조금 무료함을 느끼며 두꺼운 교리 문답서를 무릎에 펼치고 있었다. 남자는 여전히 걺은 사제가 그의 불안을 해소해주길 바라며 은찬을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었으나 은찬은 몇 번의 위로 끝에 더 이상 그를 위로하는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였다. 조용히, 그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솔직히, 이제 저놈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마냥 받아주는데 싫증이 난 것이다. 


-정직한 양심을 가진 당신을 신께서도 용서하실겁니다.


 그래서 남자가 신에 대한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호소할 때 마다 은찬은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가 분명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그것은 신이라기엔 차라리 미신에 가까운 두려움이었으므로,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그런 사람들에겐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 법이었고 그러니 그같은 말로 안심시키는 게 은찬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것이다. 피곤을 무릅쓰고 남자를 상대하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곧 있을 마을 사람들, 그리고 사기꾼 천사와의 대면을 위해 교리 문답서를 한 번 훑어보는 쪽이 더 이로웠다.


 어서 서둘러 그 말도 안 돼는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가자. 그리고 돌아가면 기도를 드려야지. 그리하여 오늘의 불쾌한 일은 없던 일이었던 것처럼 잊고 다시 맡겨진 그의 소명에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도록.  짧은 기도문을 외며 은찬은 버릇처럼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6.


 그들이 마을에 도착한 것은 점심때가 한참 지나서였다. 마을 입구엔 마을 사람들 몇몇이 나와 있었는데, 그들 또한 남자와 같이 수심 가득한 잿빛 얼굴을 하고는 불안과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채 초조한 기색으로 은찬을 보자마자 피해 달아나는 것이었다.  정말 남자가 말한대로 천사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무슨 큰 잘못을 한것처럼. 설령, 정말 천사가 나타났다고 해도 무지한 신도들이 그것을 묶어두었다는 것이 큰 잘못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은찬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불어난 의문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며 그를 괴롭힌다. 대체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단지 천사일지도 모르는 사람의 존재를 교단에 알리는 것이 지금 이렇게 그들이 이토록 수심에 잠겨 있을 정도로 큰 죄란 말인가?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두려움은 단순히 무지에서 비롯된 막연한 것이라기엔 형체가 뚜렸했다.  분명 그가 모르는 비밀이 있다. 뭔가, 큰 잘못. 천사보다도 그들이 숨겨야만 하는. 


남자는 어색한 걸음걸이로 앞장 서 걸어가고 있었다.


-형제님.


천사. 마을 사람들. 그리고 겁에 질린 밀고자. 은찬은 모든 의문의 종점을 찍기 위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최대한 사려 깊은 이해자 흉내를 내며 호기심과 의문을 뒤로한 채 남자의 떨리는 손을 마주잡는다.


-전부 다 말씀 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답니다.



7. 


 남자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는 끔찍했다. 남자는 그들이 그 천사를 가두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 신비한 존재를 욕심내어 부정하게 탐하는데 이르렀으며 그 과정에서 천사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날개를 뽑고, 족쇄를 채우고, 순전히 호기심으로 신체를 훼손시키고 팔아먹고 강간하여 욕보이는 등의 숱한 학대를 자행했음을 탄식과 흐느낌과 무거운 날숨에 섞어 고백했다. 그러나 자신은 방관자였으며 마을 사람들의 행동조차 순수한 그들의 의지였던가 하면 분명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힘이 그들을 그렇게 이끌었노라고, 그 천사를 보면 누구든 그러할 것이라며 남자는 비겁한 양심을 고백하는 가운데 어떻게든 죄가 없음을 이해받고 용서받기 위한 변명을 눈물과 함께 끊임없이 늘어놓는 것이었다.


-그럼 왜 이제 와서 그 사실을 알리시는 겁니까?

-...그저, 저는 그저 용서받지 못 할 것이 두려워서.


 하. 은찬은 참을 수 없을것 같은 경멸과 혐오를 목구멍 너머로 삼키며 한숨을 뱉었다. 남자가 이야기를 믿어달라는 듯 어느새 발 밑에 엎드린 채 그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어디 있습니까? 그 천사. 




8.


 그것은 닭장 구석에 처박힌 채 젖은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날개는 혹사당한 흔적이 역력했고 깃털이 듬성듬성 빠져있었다. 본래 하얀 색이었을 그것은 구정물이 묻어 잿빛에 가까웠고 사람 아닌 것들이 먹는 과일 껍질과 음식 찌꺼기가 묻어있어 고약한 악취가 났다. 웅크린 채로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은찬은 좀 더 가까이에서 그것을 살펴보기 위해 몸을 숙였고 그것이 사람과 흡사한, 아니. 거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뭐 이런. 이딴. 어떻게 이런 짓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그 때 웅크리고 있던 그가 파드득 몸을 떨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짐승이나 가지고 있을법한 샛노란 눈의 반질반질한 시선이 은찬에게 박혀 떠날줄을 몰랐다. 은찬은 그것에서 눈을 때지 않은 채 조심스레 라틴어로 인삿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탈출을 시도하지도, 무어라 말을 하지도 않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붙박혀 은찬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Posted by 세한(歲寒)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