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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5.10.07 .

찬건

카테고리 없음 2015. 10. 13. 23:22

찬건

백건의 열여덟 관례는 분명 집안의 경사스러운 일이었으나 이때까지와 달리 그 집안 식솔들은 사뭇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조심스레 그것의 예를 치루어야했다. 그날. 전례대로라면 정해진 예법에 따라 왕이 그 집 사람에게 대대로 제수되는 관직을 내리는 것으로 끝이 났어야 할 형식적인 하례가 이례적으로 지나치게 화려했던 까닭이었다. 하례물품을 실은 수레는 총 아홉이었고, 그 뒤를 따르는 수행원이 추가되어 제법 오랫동안 궐에서 그 집 저택 쪽으로 기나긴 행렬이 이어졌다. 

그날 이후 왕실 여인의 친영에도 감히 견주기 힘들었던 행렬의 끝에, 사람들 앞에서 백건은 제 가문과 이름과 관직 대신에 '총애하시는 그 분' 으로 불렸다. 왕께서 총애하시는 그분. 그러나 곧 뒤에서는 왕의 남창으로 불리며. 그것은 백건 본인 이전에 왕에 대한 대단히 무엄하고 참담한 이야기였으나 사람들은 권세 없는 젊은 왕을 헐뜯길 마다하지 않았다. 백건이 어린 날 왕의 동궁시절 그의 놀이 동무였던 것과, 이후에도 왕의 밀행과 백건의 궐 안 출입이 잦았던 사소한 모든 것들이 왕의 남색 취향을 헐뜯는 근거가 되었다.

-내가 준 것들을 하고 오지 않았구나.

처음 신하로서 은찬을 대면하는 자리였다. 편전이 아닌 침전 내밀한 곳에 불려간 백건은 정좌를 허락받지 못한채 무릎을 굽혀 앉은 채로 고개를 조아렸다. 

-무엄하게도 다시 돌려보내기까지 했지.

은찬은 면포로 난의 줄기를 닦아내며 백건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채로 여상스럽게 말했다. 그것이 심히, 과하다고 생각되어. 심기의 불편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어조에 백건은 육중하게 어깨를 짓누르는 압박감을 느끼며 백건이 대답했다. 여름인 탓에 침전은 문을 열어두어, 바람이 옅에 불어왔고 뜰에 풀어놓은 구관조가 뜰에서 뻔뻔스럽게도 조잡한 목소리로 백건의 말을 따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는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백건은 꿇어 앉은 채로, 은찬의 붉은 옷 끝자락을 불안하게 응시했다.

실제로 그날 수레에 담긴 것은 신하에게 내리는 물건은 아니었기 때문에. 하사품을 전달하는 행렬이 집 담장을 넘자마자 예를 갖추어 어떤 교지를 전달했고, 수레에 쌓인 궤짝들에 있던 것은 여인의 것에 가까웠고 간소하긴 하였으나 백건의 눈대중으로도 궁중의 물품이 분명한 것들이었다. 정확히는, 비를 맞이하는 법도에 모자람 없는 물품들. 그러니까 대례복을 위한 비단과, 패물같은 것들이 잔뜩. 

물론 말도 안되는 소문을 믿고 은찬을 의심하고 경계해야하는 것이 스스로도 달갑지는 않았다. 그 모든 참담한 소문이 전부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하례품과 함께 전해진 교지를 중간에서 먼저 낚아챈 아비가 그대로 낯빛이 검게 물든 채 그것을 태워버렸던 것이 자꾸 떠올랐다. 어머니도 하사품을 마다하지는 않았으나 그것들 중 관과 조복을 위한 최소한의 것들을 빼놓고는 아랫것들을 시켜 곧장 창고로 향하게 하였고, 그것을 오늘 백건이 입궐하는 편에 함께 돌려보내지 않았던가. 말 없이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백건은 감히 말을 올리지 못했고 은찬은 말이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 대로 한식경 가량을 있다, 은찬이 하문 했다. 마음에, 마음에 들지! 구관조 녀석은 또 그 말을 방정맞게 따라했고, 백건은 한층 낮아진 대화의 격에 경계를 푼다.

-그럼 비단이랑 패옥 대신 차라리 잘빠진 말이나 한마리 보내지 그러셨소?
-다 내게 어울리는 것들로 고르고 골랐는데.
-빌어먹을. 차라리 내 누이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하지 그래.
-뭐든 안 어울리겠냐만, 그래도 빨간색이 역시 잘 어울리겠다 싶어서.
-그래서 계집애 혼례복에, 관에. 홍화 연지까지 보내 사람을 놀리냐?
-입술 연지 바르고 찾아왔으면 좋았을텐데. 그렇지?
-개뿔.

그 엉뚱한 구석이 있어도 헡으로 행동하는 바 없이 조심스러우니 백건은 은찬의 그같은 행동에 무슨 의중이 있을 지 모른다고 믿었다. 가령,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단지 사람들 눈을 속일 필요가 있었다던가 하는 그런 것이.

-너 세간에 도는 소문을 모르지는 않겠지.
-...
-대체 무슨 생각이야?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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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멘

카테고리 없음 2015. 10. 11. 20:17


카르멘



 현우는 백건에게 총을 빼어들고 경고했다. 그것을 단순히 말뿐인 위협으로 여겼던 것은 백건이었다. 아직도 현우가 자신을 어쩌지 못하리라는 막연하고 근거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건은 현우를 뿌리치고 걸어갔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현우는 그를 쐈고, 건은 그대로 고꾸라져 층계를 굴렀다. 허무하리만치 손쉽고 아무렇지 않게 현우는 건을 쐈다. 자신을 등지고 걸어가는 백건이 어느 정도 거리까지 멀어졌을 때, 그래서 그에게 심각하진 않지만 발을 묶어둘만한 제약을 걸 수 있게 되었을 때 말뿐이던 경고가 정확히 백건의 오른쪽 다리를 명중시켰던 것이다. 


"너. 날 죽일 셈이지!"


 그대로 1층까지 굴러 떨어진 백건은 피가 흐르는 다리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고는 성난 얼굴로 재빨리 품 안의 권총을 꺼내 현우를 향해 갈겼다. 2층 난간, 그리고 층계를 재빠르게 타고 내려오는 그림자를 쫒아 분진이 무성하게 날린다. 픽-,픽-, 2층 계단 앞을 차지하던 도자기 하나는 완전히 박살이 났고, 비싼 원목 가구 몇개에도 탄환이 박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우는 여유롭게 그 난장판을 가로질러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미친놈, 정말로 미친놈!"

"닥쳐요."

"날.. 쐈어.네가 날 쐈다고. 개새끼. 개자식아! 네가, 네가 나한테! 윽..!"


 현우는 말없이 악소리를 내지르는 백건의 뒷머리를 그대로 잡아챘다. 억지로 몸이 일으켜지고 하염없이 벽으로 밀쳐진 백건이 현우에게 짓눌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습적인 완력에 눌린 채 등과 허리와 뒤통수가 쿵쿵 소리를 내며 벽과 아프게 부대낀다. 입술이 물어 뜯기고, 목이 졸렸다. 난폭함. 그것에서 백건은 익숙함을 느낀다. 오래 전에, 이런 식으로 마주했던가.


"욱...흐읍..,하윽..!"  


 입술 살같이 뜯어져나간 자리에선 계속 피가 났고 아프게 쓰라렸다. 그리고 바짝 목이 졸려  숨을 먹는 것이 무척이나 버거워 질 때 쯤, 아! 그리고 여전히 홧홧한 허벅지 위를 현우가 우악스럽게 움켜쥔다. 건은 소리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미쳐버릴 것 같다.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아. 붙잡혀서, 휘둘리고, 꿰뚫려서-


"당신, 왜 날 떠났습니까?"

"..."


 그러나 짐승의 것처럼 낮은 목소리에 담긴 감정의 절제에 건은 여전히 변함없는 관계에서의 우위를 확인한다. 글쎄, 왜 그랬을 것 같냐? 제 손톱이 할퀸 자리가 선명한 현우의 팔뚝을 어루만지며, 웃으며 건이 대답했다. 현우는 참고 기다리며 허락을, 아니면 어떤 대답을 기다린다. 그러나 내어줄 생각이 없다. 대신, 백건은 현우를 끌어 당겨 키스하는 시늉을 하다 복부에 재빠르게 주먹을 내리 꽂았다. 비틀거리며 현우가 물러나는 틈을 타 정확히 발로 정강이를 가격하고 그대로 뒤집어 바닥에 내리 꽂는다. 


"개자식."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백건은 현우에게 그간의 일을 해명하거나, 혹은 변명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현우에게서 몸을 숨길 수 있었고, 자신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아예 현우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우가 만주땅을 이 잡듯 뒤져 결국에 그를 찾아 내었을 때에도, 모든 수단이 여의치 않았을 때 재회의 키스 대신, 그가 바라는 대답 대신 거리낌없이 총부리를 대가리에 겨눌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현우는 언제나 어쩔 수 없어야했다. 사랑한다고 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러했듯 똑같이 자신을 배신하고, 미워하고 총을 겨누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여전히 내게 어쩔 수 없어야 했다. 언제나 사랑하고, 감내하고, 기다리고, 애태우며.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있어야했다. 건은 그렇지 않다는 것에 서러움을 느낀다. 물론 그것은 불합리하고, 이기적이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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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7.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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