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가람

카테고리 없음 2016. 6. 10. 16:38

아가씨의 이름은 청가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마을을 지배해왔던 어느 유서 깊고 대단한 가문의-옛날부터 대대로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이름 깨나 있는 집안으로, 현재 마을 일대의 전답과 산림 대부분이 가문의 것일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지요-마지막 일원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죽은 후 슬픔에 빠진 아버지가 새로이 장가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댁 무남독녀 외동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곧 둔덕 위에 자리 잡고 대대로 마을을 굽어보던 대저택과 그들 가문의 완전한 몰락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모여들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으로 인해 온 마을이 떠들썩해졌습니다. 노인. 중년, 젊은이들. 그리고 어린아이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는 사람들이 장례식을 마치 오랜만의 축제인 양 기다리며 덩쿨에 감긴 그 집 높은 담장 주변을 기웃거리고는 하였습니다. 그 가문의 찬란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이들은 그것이 마치 그들의 것이었던 것처럼 여겼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한탄했습니다. 젊은 남자들은 그림처럼 예뻤던 젊은 아가씨의 죽음을 슬퍼했고, 마을 처녀들 또한 그 죽음을 입에 담았지요.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그 젊은 아가씨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던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오랫동안 감히 넘볼 수조차 없었던 담장 너머의 세상이 궁금했던 것이지요. 저택을 둘러싼 소문은 오랫동안 무성했습니다. 오래 전, 그녀의 아버지가 죽고 난 뒤 아름다운 아가씨가 집 대문을 걸어잠근 바로 그 때부터요. 사람들은 스스로의 막연한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그 소문들을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설마 그럴 리 있겠냐고 스스로 허황되었음을 알면서도 그것이 사실이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최근 아가씨와 추문이 돌았던 젊은 남자 의사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댁 아가씨와 어떤 관계인지 모르나 의사는 저택과 연줄이 닿아있었고, 또 다른 도시의 꽤 큰 가문의 도련님이었습니다. 그 가문은 대대로 아가씨 가문과 연줄이 있던 집안이고, 아버지가 죽은 후 가문의 저택과 전답 모두를 그 가문 어른들이 대신 관리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허울 좋은 이야기일뿐 실상 힘없는 어린 여자아이 앞으로 딸린 재산에 눈이 멀어 그것을 빼았나 간 것이었죠. 남자는 청가람 아가씨와 결혼해서 그 재산을 합법적으로 자기 가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내려온 사기꾼이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니 아가씨가 죽자 한 때 마을 사람들은 아가씨의 주치의로서 유일하게 그 저택을 들락거리던 외부인이였고 한 때는 죽은 아가씨와 혼인을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던 남자에 대해 사람들은 그가 필시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가씨의 유언장이라고 공표된 그것에도 모든 재산을 주은찬 그 사내에게 주겠노라 적혀있었고 실제로 그가 재산을 현물로 바꾸기 시작한든 소문이 장물아비들 사이에서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의심은 커져갔습니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이 남자가 큰 도둑질을 하게 되는 지 흥미롭게 기다리는 듯 했습니다.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남자를 닥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번번히 그들의 기대를 빗나갔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죽은 아가씨에 대해 물을 때면 친절한 얼굴로 웃으며 자기는 아는 게 없노라고 더이상 무례하게 캐묻지 말라며 사람들을 쫒아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애매한 태도는 이윽고 의심의 불씨가 되어 또다시 저택에 대한 소문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축제처럼 기다려온 죽은 아가씨의 장례식 날, 사람들은 소문의 진상을 직접 확인하고자 모여들었지요. 개중에는 오랫동안 이 지역 유지였던 가문에 대한 이유모를 향수와 충성심을 불태우며 후안무치한 남자와 그 가족들이 어떤 뻔뻔한 짓을 하는지 지켜보겠노라 성을 내는 이들도 있었고, 가십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또한 그 대단한 집의 문턱을 한번 넘어 보고자 했던 순박한 방문객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척이라고는 한명도 없는 그녀의 장례식은 참으로 쓸쓸했지요. 그 젊은 의사만이 그나마 조용히 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벌써부터 남자의 가문 사람들이 몰려와 재산을 두고 목소리를 높이는 광경도 볼 수 있었습니다. 낯선 사람들에 의해 서둘러 형식뿐인 장례가 마무리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아가씨를 불쌍해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이 끝날 무렵 분위기가 이상해졌습니다. 사람들이 헌화를 끝내고 관뚜껑에 못질을 할 무렵에, 어디선가 나타난 아가씨와 꼭 닮은 소년 때문이었습니다. 유령처럼 나타난 소년을 보고 처음엔 아가씨로 착각한 사람들이 겹을 집어먹고 장내가 소란스러워졌습니다. 거들먹거리던 남자의 가족들도 당황한 눈치였지요. 소년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사람들 가운데로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소년의 걸음걸이를 지켜보며 호기심을 불태우며 조용해졌습니다. 누구인지 모를 이 소년의 얼굴도, 신경질적이고 꼿꼿하고 자태가 참으로 죽은 아가씨와는 물론 이전에 죽은 그녀의 아버지와도 많이 닮아있었가때문입니다. 모두가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가운데 조용히 있던 남자가 다가와 소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다정하고 상냥한 얼굴로 소년의 어깨를 쥐고 친근함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소년이 죽은 아가씨의 먼 친척이라는 이야기를 했지요. 그 순간 사람들이 뒤집어졌습니다. 웅성거림이 끊이질 않았죠. 그러다 째지는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남자 뒤에 있던 그들의 가족이 이건 말도 안된다며 소리쳤습니다. 탐욕에 눈이 뒤집힌 이들이 작은 소년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했습니다. 소년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아니. 할필요가 없었지요. 소년을 향한 상스러운 욕을 남자가 나서서 잠재워주었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소년이야말로 이 가문의 일원으로서 아가씨가 남긴 가문의 모든 유산에 적법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앞장서서 자기 가문으로 재산을 빼돌린다고 믿던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어찌되었든 소년은 이 위대한 가문의 일원임이 너무나도 틀림없어 보였고, 사기꾼인 줄 알았던 남자가 소년의 곁에서 다정한 보호자가 되어 그를 비호하고 나섰으니까요. 결국 남자의 가족들은 물러나야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소년을 향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며 탐욕스럽게 재산에 눈독을 들이던 그들의 모습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들의 이야기는 아주 오랫동안 이 지역 사람들에 의해 두고두고 놀림거리로 회자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출신만은 확실한 그 소년이 도련님이 되어 모든 권리와 의무를 되찾으면서 가문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거기엔 남자의 공이 컸지요. 사람들은 여전히 남자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어찌됐든 이 집안의 땅을 빌어 먹고 살던 이들은 남자의 양심있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꼴사납게 거들먹거리돈 경성 부자들이 이 가문을 채가지 않아 다행이라며 안도했습니다. 사람들은 아가씨를, 그리고 그 가문을 동경하고 그것의 오랜 영광이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여겼던 것처럼 그 도련님을 호의로 환대했습니다.

소년. 도련님은 얼마 있지 않아 동경으로 유학을 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느 화창한 여름, 무더위가 찾아오기 직전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역사에서 말단으로 일하던 청소 직원이 도련님이 큰 가방을 들고 떠나는 걸 보았다고 했습니다. 곁에는 빨간머리 남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일등칸에 탔고 같은 칸에 탄 누가 행선지를 묻자 동경으로 갈거라고 이야기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건 기차는 부산행 상행선이 아니라 경의선 방향의 하행선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날 이후 도련님은 남자와 함께 저택을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소식은 들을 수도 없었지요. 그리고 그 큰 저택은 점점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한 채 과거의 영광스러운 역사와 함께 조금씩 시간과 함께 바스라져 그 누구도 찾지않는 쓸쓸한 폐허로 남아 자리를 지키고 딨답니다.


에필로그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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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우백건

카테고리 없음 2016. 6. 10. 15:46

잊혀진 계절에는 달이뜬다.



나는 계속 네 꿈을 꿔.

꿈은 언제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시작돼. 우리가 같이 저녁을 먹고, 주은찬 몰래 네 방에서 이불을 깔고 누워 있으면 너는 아무 말 없이 내 손만 잡고 있고 나는 네 품에 기대서 한복 옷자락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부드럽게 밀려오는 졸음에 취하던 바로 그 시간이야. 그래. 겨울. 바로 그날 말이야. 겨울이라 바깥엔 눈이 내려. 겨울밤은 참 차갑고 춥지. 사정을 봐 주는 법이 없어서 문을 꼭 닫아놔도 낡은 찻집 바깥에서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소리가 문틈을 찢고 들어와. 그래서 추운 걸 싫어하는 나는 언제나처럼 널 안고 같이 이불을 덮고 따뜻한 바닥에 배를 깔고 나른한 기분으로 누워있어. 그대로 우린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다 또 스마트폰을 뒤적이며 게임에 빠져 키득거리며 웃지. 아주 평화롭지? 그렇지만 그 날은. 그 꿈에선 잘 시간이 되면 내 옆에 누워있는 네가 조용히 중얼거리는 거야.

잊혀 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나는 꿈에서 계속 그런 질문을 받아. 하지만 처음엔 그 말을 듣지 못해. 아마 그때도 똑같이 나는 제대로 듣지 못했을거야. 네 목소리가 워낙 작기도 작았거니와, 혼잣말을 하는 듯해서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말을 듣지 못한 나는 꾸벅꾸벅 졸면서 내 할 일만을 하고 있지. 네가 다시 한 번 내게 물어와. 그러면 나는 이상하게 낯선 기분이 들어서 일어나 너를 쳐다봐.

일어나서 너를 보며 무슨 소리냐고 묻지. 너는 조용히 이불 위로 두 손을 단정하게 포개고 베개를 베고 누워 있어. 아주 얌전히. 네가 늘 잠드는 바로 그 자세 그대로. 드리고 또렷하게 뜨고 있는 까만 눈으로 조용히 나를 봐. 그리고 대답해 달라고 하지. 너는 언제나 그 눈을 통해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말해주지만 그때 네 눈은 언제나 너무나도 불안하고, 내가 미처 알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해. 왠지 네가 울것 같다고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러다보니 나는 조금 불안해져. 눈앞에 네가 선명하게 있는데도 너는 이상하게 흐릿하고, 너의 목소리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같아. 아니 그것보다 훨씬 멀어. 넌 꼭 유령이나 연기처럼 아주 희미하게 느껴져. 내 옆에 누워 있는 네가 사라질것만 같다는 걱정을 하지.

그래서 왜 그런지 고민하기 시작해.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 하루를 곰곰히 되짚어보는거야. 사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짓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러다가 문득, 평소 같지 않던 오늘 네 행동들이 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떠올라. 너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하던 수련도 하지 않고 무작정 내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왔지. 날 끌어안고선 학교에 가지 말라며 이상한 투정도 부렸어. 결국 같이 잠들어버려서 청룡한테 잔소리를 들었고 결국 난 아침에 학교를 안 갔어. 하루 종일 너랑 있었지. 생각해보니 그때도 넌 좀 이상했어. 평소처럼 멍청한 소리나 얄미운 말은 하나도 하질 않았거든. 기억은 잘 안나지만. 어쩌면 네가 나한테 뭔가 이야기 하고 싶었던걸지도 모르는데.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걸. 그리고 내가 멍걸이 데리고 너한테 장난 친 거 기억해? 근데 개라면 질색하고 눈길도 안 주던 네가 멍걸이를 안고 쓰다듬었단 말이야. 심심해서 같이 수련하는데도 자꾸 실수 하고, 멈칫거리면서 먼 곳만 바라보고. 나랑 대련할땐 때리지도 못하더라. 결국 내가 재미 없다고 관둬버렸지만. 그리고 너. 지겹도록 챙겨 보던 우리 누나 드라마도 안 보고 저녁 먹기 전에 산책이나 하자면서 동네 한바퀴를 다 돌았지. 날이 무지 춥고 바람도 많이 불고 했는데도 말이야. 걷는 동안 네가 내 손을 계속 잡고 있어. 평소에 그런 간지러운 짓은 하지 않는 게 우리 사이인데 말이야. 까무잡잡한 네 손은 나 못지 않게 크고, 뜨겁고. 게다가 하도 꽉 잡아서 땀으로 미끌거렸어. 생각해보니까 너는 계속 뭔가 말 할고 했던거 같아. 결국 하지 않았지. 대신 골목 앞에서 나한테 키스 했어. 아주 짧게. 이건 꿈에서도 자꾸 생각나더라. 좋았나봐. 아무튼. 이것저것 생각 해보니 하루종일 네 행동이 이상했다는 걸 깨달아. 그러니 네가 했던 이상한 질문과, 이상하게 흐릿하고 멀게 느껴지는 네 모습과 그것들이 겹쳐져서 나는 당장이라도 네가 사라질 것만같다는 불안을 느끼는거야.

도대체 그딴 걸 왜물어봐?

그래서 불안한 나머지 난 조금 화를 내면서 물어봐. 너는 말없이 날 바라보지. 여전히 네 눈은 새카매. 너무 까매서 내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너는 나를 바라보다, 천장 위로 고개를 돌려.그리고 이렇게 말해.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줄까요.

그건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야. 너는 그냥 네가 할 말을 계속하지. 그렇게 끝도 전혀 올라가지 않은 단조로운 어투의 물음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해. 물론 꿈속에서. 아마도 그 당시엔 그것보단 조금 짜증나고 답답했을 뿐일거야. 초조해진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네 어깨를 잡아.

갑자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데 그래? 무슨일인지 말을 하란 말이야. 그때 새카맣고 깊은 네 눈동자가 그런 나를 바라봐. 반질반질한 네 눈동자엔 다급해하는 내 모습만이 비쳐. 나는 너랑 눈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네 시선은 미묘하게 빗겨나가 좀처럼 맞닿지를 않아

그러면 나는 갑자기 아아, 이건 이별이구나 하고, 슬픈 기분을 느껴. 너는 여전히 내 옆에 누워 있었지만 그런 확신을 하는거야. 엇갈리는 시선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우리 사이에 완고하게 둘러쳐진 벽의 존재를 느껴. 네가 나한테 벽을 치큰 거지. 그게 참 쓸쓸해.

그렇게 꿈이 진행이 되면 그 시점에서 내가 꼭 떠올리는 기억이 하나 있어. 아주 오래 전, 너랑 같은 방을 쓰는 주은찬이 내게 말해주었던 일이지. 주은찬은 네가 가끔 집에 간다고 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한참동안 찻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 앞에 서있는 걸 봤다고했어. 머뭇머뭇 거리던 너를 자기가 한 번 안으로 데려 온 적이 있었대. 그리고 그런 날이면 잘 시간이 훌쩍 넘었는데도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마루에 앉아 있노라고. 나는 그 이야기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너한테 물어보지는 않았어. 가끔 그런 밤에 네가 내 방문 앞에 서성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도 있지만 한번도 나와 본 적은 없어. 알다시피 우리 사이가 그렇게 다정하고 간지러운 건 아니었잖아? 나는 그게 네 문제라고 생각했어.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고. 우리는 그럴만한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가끔 보이는 너의 어둡고 지친 모습은 너네 집안 문제라고 짐작했을 뿐이고. 우리 같은 입장에 있는 아이들이 으레 집안과 겪는 그럼 문제들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는 누워있는 네 앞에서 그렇게 후회를 해. 한 번이라도 내가 너에게 너를 괴롭게 하는 것들에 대해 물었더라면. 네가 지쳐 돌아온 그날 밤 먼저 널 부르고, 네 손을 잡고. 너를 안아 줄 수 있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수 만 가지 가정과 상상이 밀려들어. 변명은 그만 할게. 그냥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게 나는 낯설고 부담스러웠을 뿐이야.

그렇게 행복하게 시작하던 평화로운 내 꿈은 모든 걸 내려놓고 이별을 결심하는 네 앞에서 산산히 부서져.

내가 기억해줄게. 거북이같이 오래 걸리면 좀 짜증나긴 하겠지만. 어쨌든.

그리고 붙잡을 자격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말해. 정작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걸 알아. 나는 니가 답답해서 그냥 짜증을 냈고, 너는 내게 잘자라고 했어. 그렇지만 꿈에선 너한테 꼭 그말을 해야할거 같아서 나는 네 꿈을 꿀때마다 너한테 그렇게 말해. 기억 하고 있을게. 잊지 않을 게. 내가 기다리고 있을 게. 너한테 꼭 그말을 해야할거 같거든. 그렇게 내가 약속을 하면 조금 안심이 돼. 네가 웃거든. 그렇지만 네 얼굴을 아까보다 훨씬 슬프고 쓸쓸해. 나는 그렇게 꿈에서 매번 네가 이미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곳에 있음을 깨달아. 너는 그냥 내 손을 잡는다. 같이 자요. 그렇게 말하지. 나는 네 손을 깍지 껴 잡아. 너는 일찍 눈을 감아. 나는 계속 눈을 뜨고 네 얼굴을 하나하나 내 눈에 새겨 넣으려고 해. 널 기억하는 연습을 하는 거야. 까만 머리카락, 단정한 눈매와 속눈썹, 시원하게 뻗은 콧날과 다물어진 입술. 어느 것 하나 놓치기 싫어 샅샅이 살피는데 그러다 갑자기 네 목소리가 기억이 안나. 차마 널 깨울수는 없어서 네 목소리가 어땠는지 생각하는동안 아까운 시간은 계속 흐르고, 하늘에 뜬 달이 기울고 달에 비친 내 그림자가 점점 짧아져 가. 나는 불안해져. 내가 널 기다리는 동안 네 목소리를 잊어버려 네가 나를 불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아닐까?


백호공자.


그 때 어김없이 네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가 잠들어버린 줄 알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란다. 너를 바라보면 깊이 잠든 네가 어느새 네가 눈을 뜨고 그 까만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네 목소리가 기억이 난다. 너는 이 밤, 드디어 처음으로 나와 눈을 맞춘다. 어긋나가지 않고 마주치는 시선이 기뻐서 나는 처음으로 네 이름 두 글자를 불러.


정말 나를 기억해 줄 건가요?


네가 묻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기억하고 있을게. 절대 잊지 않을게. 계속 그렇게 약속한다.

나의 달. 그렇다면 기다려주세요. 시간이 얼마나 흐르더라도 돌고 돌아 곁으로 돌아올테니.

그러면서 네가 내게 키스해. 꿈은 너와 함깨 조각조각 흩어져 공간이 갈라지고 네가 멀어져. 검은 눈동자에 가득 비치던 내 모습은 흐려지고 너도 흐려지지. 물살이 일어 조각배가 흐트러지듯 눈앞이 잠시 일렁이다, 검은 파도가 밀려와 모든 것을 집어 삼켜. 나는 눈을 떠. 다시 눈을 뜨면 익숙한 내 방 천장이 보여.


그런 꿈이다.

약속을 했기때문에 나는 너를 기다려. 하지만 꿈속에선 선명히 기억이 나는 얼굴도, 목소리도, 이름도 전부 다 꿈에서 깨어나면 기억이 안나. 그런데도 너를 기다리고, ‘너’를 내가 잊지않고 기다리겠다 약속하는 그런 꿈을 매일 꿔. 그런 꿈이야.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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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찬백건

카테고리 없음 2016. 6. 10. 13:19

"수아누나, 너 좋아하는 것 같더라."

그 목소리는 어딘가 음침한 구석이 있었다. 백건은 깜짝 놀라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반짝거리던 눈으로 은찬을 살핀다. 그러나 기분이 나쁜건가 싶어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은찬은 더이상 뭐라 말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잠시 청소하던 것을 멈추고선 대걸레를 받쳐 잡고는 턱을 괘고 있었다. 새카만 두 눈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창고 안을 반쯤 물들여놓은 어둠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로 은찬의 눈은 몹시 검었다. 아래로는 그늘이 져 있어 백건이 아무리 애를 써도 나머지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백건은 한발자국 떨어져 주은찬을 본다. 그림자에 뒤덥힌 주은찬은 형태가 또렷하지 않았다. 꼭 어둠에 녹아있는것 같다.

"뭐, 그런가보지..."

불안했다. 불안해서 괜히 수선을 떤다. 평소라면, 자주 그렇게 하듯이 조금은 밋밋한 그 외모를 놀리면서 잘난 척, 장난을 걸어 볼 텐데, 그는 이제 은찬에게 어떤 식으로 대답하는 게 좋은 지 알 수 없다. 단지 그런 것은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찬은 아주 잠시 고개를 돌려 건을 바라본다. 건은 간신히 은찬의 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은찬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르는지는 알 수 없었다. 꼭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다가, 은찬은 다시 밀대를 잡는다. 바닥을 닦는다. 질척하게 젖은 물소리가 바닥에 부딪쳤다. 철퍽철퍽. 앞뒤를 오가는 움직임은 묘하게 절도있고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후덥지근했던 창고 안이 물걸레질로 더 습해진다. 축축한 기분이. 불안하고 불편한 감정이 천천히 발밑에 휘감긴다. 은찬은 역시 화가 난 게 분명하다.

"유나비한텐 왜 그렇게 말했어?"

이번엔 도대체 뭐가 문제야? 백건은 당장에라도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은찬의 입술을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을것처럼 일자로 다물려있다. 바닥에 문대어 지는 젖은 물소리는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걷어붙인 셔츠 소매 아래로 은찬의 각잡힌 팔뚝이 보인다. 힘이 실려 앞으로 뻗어가다 다시 뒤로 물러난다. 그때마다 대를 쥔 손과 팔에 얕게 힘줄이 돋는다. 큼지막하고 마디가 깔끔한 손과 오목한 팔목과 직선으로 뻗은 팔을 지나쳐 그 어깨에 이르는 곧은 선은 굵지 않지만 비실비실 하진 않았다. 오히려 남자다웠다. 백건은 남자다움으로 빚어진 그 선에 잔뜩 힘이 실리던 때를 기억한다. 은찬의 팔은 거침없이 뻗어와 언제든지 그가 백건을 끝장낼 수 있다는 걸 알려줬다. 조금 예민하고, 섬세하고, 그래서 질투를 하지만 결국 다정한 줄로만 알았던 주은찬이 목을 조르던 때 백건은 그것을 깨달았다. 단 한 번도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던 것들이 사실 가장 위험한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주은찬이 그에게 달려들어 짓눌리고 잡아채여 숨이 막혀 아찔했던 순간.


"너무 예뻐서 그런가."
"...."

너무 예뻐서. 두둥실 떠오른 목소리가 부드러웠지만 더이상 백건은 안심할 수가 없었다. 하긴, 어쩔 수 없을 법도 하다. 네가 이렇게 생겼으니까. 은찬이 그렇게 말하며 넓적한 손으로 백건의 뺨을 더듬는다. 손은 뜨뜻했고 땀으로 젖어 미끌거렸다.

"차라리 이렇게."

쿡. 은찬이 손톱으로 뺨을 누른다. 손톱은 아프게 파고 들어 금방이라도 살을 후벼 팔 기세였다. 백건은 굳은 얼굴로 은찬을 내려다 보았다. 은찬은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백건을 보지는 않는다. 은찬의 눈은 아까와 같이 초점 없는 까만눈이았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이 은찬의 눈동자 속은 까마득한 어둠으로 가득했다. 여기서, 여기까지. 조금 보기 흉해지면 괜찮을까? 은찬은 그렇게 말하며 건의 뺨, 그리고 입술. 목. 어깨. 얇고 단단한 손톱으로 긁고 내려간다. 송곳처럼 낙인을 새겨넣는듯한 움직임으로 천천히 내려간다. 그리고 목을 쥔다.

"...주은찬"

백건은 더듬더듬 은찬을 불렀다. 응, 건아. 아직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목을 쥐며 은찬이 대답했다. 백건은 작게 숨을 뱉으며 몸을 떨었다. 그러지마. 은찬은 백건의 목소리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은찬이 발 뒷꿈치를 들어 부릅뜬 눈가에 입을 맞추고 안경알 위를 핥는다. 도수없는 유리알이 침으로 질척하게 젖는다. 키스할때처럼 유리알을 닦아대는 혀가 징그러웠지만 백건은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간 성난 은찬에게 눈알 하나가 통째로 파먹힐 것 같았다. 주은찬이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괴한 공포가 백건을 짓눌렀다.

"앞으로 또 헤프게 흘리고 다니면 가만 안 둘거야."

은찬은 연인처럼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내며 말했다. 눈은 더 이상 생각에 잠겨있지 않아고, 오히려 기쁨과 행복에 겨워 반짝이며, 백건을 향해 은찬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답 해."
"응..."
"착하다."

백건은 겁을 먹은 채 대답한다.

"사랑해."

이번엔 꼭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이 먹먹한 목소리였다. 동시에 축축한 입술이 침을 흘리며 건의 입술을 짓눌렀다. 다음엔 혀가 들어와 입안을 온통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백건이 숨을 토해낼 때마다 은찬이 게걸스럽게 그것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숨이 막히고, 아. 숨을 쉬려고 하면. 숨을 쉬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도록 단단히 끌어안고 키스해버려서. 백건은 몸부림 쳤다. 둘의 몸이 미끄러은 바닥 위를 구른다. 우당탕탕. 창고 선반 물건들이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를 부딪친 백건은 가벼운 뇌진탕 같은 걸 느끼며 은찬을 올려본다. 머리는 멍한데 은찬이 허겁지겁 옷을 벗기고 있었다. 은찬은 빠르게 건의 옷을 벗긴 다음 백건의 엉덩이에 자신의 성기를 가져다 댔다. 백건은 몸을 꿈틀거리며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이미 반쯤 젖어있는 것이 엉덩이엔 질척하게 문질러지고 있었다.

"잠..잠깐만 갑자기 왜이러는-악. 싫어. 싫어 주은찬!"
"그런게 어딨어. 사랑한다고 했잖아"
"미친. 하지마!하지말란 말이야! 아악!"

백건은 비명을 지른다. 잘 짜여진 전신의 근육들도 한꺼번에 뒤틀리며 같이 비명을 질렀다. 은찬은 쉴새없이 움직였다. 등허리가 뒤틀리고, 휘고. 그러는 동안 뜨겁고 좁은 공간은 조금씩 넓혀지더니, 어느새 씹어 먹을 것처럼 깊은 안쪽으로 살덩이를 끌어 당기고 있었다. 싫어. 싫은데. 아. 그렇지만 기분은 좋고.

그 짓을 하는 동안 몸의 자세는 몇번씩 바뀌었다. 은찬은 백건의 뒷목을 잡고 누르며 숨을 쉬듯 움찔거리는 그 구멍의 틈새로 성기를 박아 넣고 있었다. 백건의 허리가 잘게 떨리며 짐승처럼 앞으로 쭉 뻗는다. 몸이 밀리고, 젖은 살덩이가 잔뜩 주름 진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밀려나고 하얀 등이 뒤틀렸다. 은찬은 허리만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성기가 쉬지 않고 몸 안을 드나들고 있었다. 까슬한 털이 엉덩이에 비벼질 때 마다, 퍽퍽 치대는 소리가 날때마다 거품이는 소리가 나서 백건은 견딜 수가 없었다.

"흐응,아..아읏. 윽. 아앙! "
"어떡..흐,누나가, 너, 진짜로...좋다 그러면,...아. 나믄 어떡해...하아..기분 좋아.. "
"아니,..아흐,,,으...나..나는...아..힉..!응...!"

삐걱삐걱 흔들리던 몸이 바닥에 무너진다. 씨발, 은찬이 그렇게 욕을 하며 허리를 부여잡고 허릴 찧어댔다. 이렇게 예쁜데,응, 함부로 흘리고 다니면 어떡해.

"아, 아아...흐...주은차아안...!"

절정으로 치닿을것 같은 순간에 은찬은 백건의 목을 졸랐다. 백건은 숨이 막혔다. 은찬은 그의 굵은 손가락 마디마디 모두 힘을 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몸부림치면 칠수록 은찬이 허리를 흔들며 박혀들어와 몸이 밀렸다. 사랑해. 너무 좋아. 하고 은찬이 자꾸 말하는 것 같았다. 백건은 계속. 계속 흔들렸다. 안경이 비스듬히 흘러 내려 렌즈와 맨눈의 시야가 섞여 보이는 세상이 이상했다.이상하다. 전부. 전부 다 이상해. 은찬은 더이상 주은찬이 아닌 것만 같았다. 자신도 더이상 자기 자신이 아닌것만 같았다. 은찬은 이렇게 하기 싫은 짓거리를 하고. 또 이렇게. 어쩌면 정말로 그를 죽일지도 모르는데. 그런데도 은찬은 좋았다. 은찬은 계속 사랑한다고 말해준다. 죽일만큼 사랑한다고. 무섭고 괴롭지만 싫지 않은걸. 아. 어떡하면 좋아. 백건은 때때로 은찬이 이럴 때마다 백건은 알 수 없는 뭔가가 있어서. 그건 어쩌면 나쁜 주술이나, 못된 귀신같은 것인데 바로 그것이 은찬을, 아니면 두사람 모두를 집어 삼켜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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