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가람]

카테고리 없음 2015. 7. 13. 03:01

"늘 이 시간에 오시네요."


 분명 호루라기 소리 비슷한 걸 들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남자의 목에는 구조용 호루라기가 걸려있었다. 얇은 저지 사이로 언뜻 보이는 가슴팍 부근에서 호루라기가 반짝거렸다.


"얼른 올라와요."

"...."


 가람은 발갛게 그을린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자는 친절한 사람 같이 웃고 있었다. 그러나 가람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대신 멀리 떨어진 벽에 설치된 계단 까지 일부러 헤엄쳐 갔다. 계단은 제법 턱이 높아 층을 오를 땐 거의 기다시피 올라가야 했지만 평소처럼 벽을 짚고 올라가기엔, 그건 보기 좋은 모양이 아니니까.


 그러나 물길을 어렵사리 헤집으며 계단을 밟고 오를 때마다, 가람은 등을 핥는 집요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익숙하지만 불쾌한 종류의 시선이었다. 아마도 여전히 지켜보고 있겠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훑어보는 남자의 시선을 상상하다, 가람은 어쩐지 불편해졌다. 불편함은 젖은 등에 습기처럼 축축이 들러붙어 떨어지는 물방울을 따라 스며들고, 발목에 진득하게 감겨왔다.


 물속에 잠겨 있는 발이 부자연스러운 무게감에 뻣뻣해지는 순간, 긴장이라도 한 것처럼 이제는 괜히 입고 있는 수영복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머리를 틀어 올려 드러난 목 위로 바람이 닿을 때면 목 주변이 자꾸만 화끈거렸다. 대체, 그게 뭐라고. 가람은 뒷목을 손으로 세게 문질렀다. 어느새 목에선 물 대신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묻어났다. 보일까. 봤을까. 봤겠지. 보고 있을 거야. 달아올랐을 목덜미를, 그 남자가 본다. 그 순간 젖은 몸에서 열이 화르륵 피어나는 것 같더니 현기증이 아찔하게 몰려드는 것이었다.


"앗...!"


 뒤로 중심이 쏠리고, 그 순식간의 아득함을 인지하기도 전에 가람은 머리부터 시작해 그대로 물에 빠졌다. 몸이 그 무게대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부력에 의해 부드럽게 떠올랐다. 가람은 그대로 물속에서 눈을 꾹 감은 채 몸을 웅크렸다. 차가운 물속에서도 몸에 자꾸만 열이 올랐다. 창피한 모습을 보인거야. 온 몸이 빨게 져 있을 것 같았다. 열이 가라앉지 않는다면 이대로 푹 가라앉아버리는 게 좋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웅크린 몸을 누군가 단단히 받치고 있다는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허우적거리는 몸의 허리에 단단히 둘러진 팔을 느낄 때쯤, 물 밖으로 끌려진 가람은 태아처럼 숨을 토하며 수영장 바닥 위를 딛고 있는 자신의 두 발을 느꼈다.


"괜찮아요? 놀랬잖아."

"...헉..."

"그러게, 내 손 잡으라니까. 혹시 다쳤어?"

"지,금 뭐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잠겨 떨리는 것을 알아차린 가람은 고개를 숙였다. 바닥이 그대로 비춰 일렁거리는 수영장의 새파란 물 위로 이따금씩 물비늘이 어른거렸다. 어지러울 만큼 새파란 물과, 코를 간지럽게 찌르는 소독제 냄새에 숨이 찬다. 좀 전의 현기증은 다시금 열기와 함께 가람에게로 몰려들고 있었다. 남자는 여전히 팔로 허리를 감싸 안은 채였다. 가람은 그의 손위로 손을 겹쳐 잡았지만 손을 떨쳐낼 생각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열이 잔뜩 올라 새빨간 얼굴로 마주하고 싶지 않았고 잠긴 목소리를 다시 한 번 들려주어 여지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몸이 잔뜩 떨리고 있었다. 그걸로 충분하잖아.


"많이 놀랬나보네. 떨고 있잖아. 빨리 올라가요."

"...잠깐만요, 괜찮..!"


 남자는 그대로 가람을 안아 들다시피 허리를 들어 올려 풀의 위로 걸터앉혔다. 그대로 다리 사이로 남자의 상반신이 파고들고 이내 자리를 잡았다. 물 밖의 온도차에 한기를 느끼며 가람은 몸을 떨었다. 바싹 당겨 붙은 그의 빨간 머리카락이 턱 밑과 가슴 언저리를 스칠 때마다 가려움에 열이 올랐다. 무릎 부근에선 풀장의 물이 찰박거리고 있어 단단히 허리를 잡은 남자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어지럽게 흔들리는 새파란 물결을 보고 있으면 다시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아찔함이 일었다. 막연한 공포에 가람은 남자의 어깨를 무심코 꽉 움켜잡았다. 괜찮아. 잡아 줄 테니까. 기다렸다는 듯, 끌어당기는 건지 받쳐주는 건지 모를 손길에 힘이 실렸다.



"매일 이 시간에 오던 것 같던데."

"...."

"이름이 뭐에요?"

"..놔줘요."


 도망갈 수 없게 붙잡혀서, 밀어내지 못한 채. 그렇게. 남자는 이번에도 친절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깨를 잡고 있던 자신의 손 사이로 어느새 남자가 깍지를 끼고 허벅지를 눌러 오고 있었다. 차가운 허벅지 위로 닿는 남자의 뜨뜻한 체온에 무기력함을 느끼며 가람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랫배에 선연한 감각에 다리를 움츠리고 밀어내자 남자는 조금 더 다리 사이를 파고들며 얼굴을 가람의 가슴에 부볐다. 응? 말해줘요. 이름 궁금해. 남자의 젖은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이마가 반듯했다. 웃고 있는 얼굴은 여전히 친절하고, 다정하게 가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름은 주은찬이에요. 여기서 강사로 일하고 있구요."

"...청...청가람이에요."

"예쁜 이름이네."


그 순간 가람은 다시 한 번 추락하는 아득함을 느꼈다. 몸이 당겨지고, 그대로 떨어졌다. 하얀 물거품이 부서지며 새파란 물이 몸으로 밀려들었다. 거센 물살에 소독약의 냄새와, 끌어안는 품의 습한 땀 냄새가  물에 녹는다. 가람은 발끝까지 열이 올라 허우적거리면서, 가람은 그대로 안겨 벽으로 밀려 짓눌렸다.



"걱정마요, 이 시간엔 아무도 안 오니까."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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