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찬

카테고리 없음 2016. 6. 9. 22:59

사냥은 숲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요란하게 타악기를 두드리며 어지럽고, 그러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가장자리부터 불을 지른다. 정복에 앞서 화살을 쏴 첫 불을 내는 것은 족장의 역할이다. 주작의 정화 의식을 상징하는 부족의 오랜 전통이었다. 은찬은 족장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자 후계로서 모든 것을 참관해야했다. 그는 사람들 틈에 섞여 그의 이모를 바라본다. 그 순간에도 표정 하나 없는 조용한 얼굴이었다. 죽은 그의 어머니와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

끔찍하고 잔인한 여자. 그녀는 어머니를 죽였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의 새로운 가족을 쉽게 죽일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소중한 것들을 빼았아 간다. 마르고 낭창한 팔이 화살 하나를 집어 허공에 시위를 겨눈다. 은찬은 실의에 차 그 행동을 가만히 바라만 본다. 시위를 당긴다. 쏜다. 내려 꽃힌다. 땅엔 마법처럼 불이 타올랐다. 흥분한 구경꾼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발을 굴렸다. 그 소리가 너무 커 은찬은 잠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는 몇명인지 모를 사람들이 은찬의 어깨를 지나쳐 숲을 향해 달려갔다. 모든 게 다른 세계의 일같아서 은찬은 우두커니 서서 사람들의 등을 그냥 멍하니 쫒는다. 그 동안 그들은 숲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사람들은 혼란을 틈 타 그가 달아난다고 해도 알아차리지 못할만큼 흥분해있었다. 지금 도망쳐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가서 아저씨한테 알려야하는데. 백건. 건이 그 애가 저기 있는데! 그러나 은찬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친다. 차마 등을 돌릴 수는 없었다. 숯은 멀어질 수록 잘 보였다. 아까까지 별이 반짝이던 밤하늘엔 더이상 별이 보이지 않았다. 새벽 여명이 밝아오는 시간처럼 하늘이 밝았다. 불화살은 계속. 많이. 아주 많이 튀어오르고. 꼭. 어머니가 죽던 날 처럼. 그녀가 은찬의 가족들을 죽이던 날 처럼. 꼭 그날의 한 가운데 있었던 어린아이가 된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중한 것들은 사라지고. 유성처럼 떠오른 불꽃이 아래로 아프게 내려꽃히고, 불타오르고. 숲이 삽시간에 붉어진다. 아프다. 아직 가을이 아닌데도 이렇게 타오른다.

이번 가을엔 삼촌한테 널 가족으로 받아달라고 말할거야.

해에 그을린 얼굴을 하고 분명 그렇게 말해주던 네가 사랑스러웠는데. 왈칵. 까맣고 동그란 눈엔 가득히 방울이 맺히고. 그러나 눈에선 불을 끄지 못할 만큼의 눈물만이 흐른다.

세상이 온통 붉고. 아프고.

"괴롭니?"

그 때 뒷걸음질 치는 은찬의 뒤에서 처음으로 듣는 목소리가 들렸다. 은찬은 돌아본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이제까지와 달리 황홀한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였다.

"저 네발 달린 것들은 언제나 우리를 이렇게 괴롭히는구나."
"..."
"그래도 덕분에 끝을 낼 수 있었어."
"잘못했어요.."
"아마 이제 편하게 그 사람 목에 대고 사랑한다고 말 할 수 있겠지."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이모님 잘못했어요. 제발. 제 친구가, 아니 좋아하는 애가 거기 있어요. 이러지 마세요. 다시 돌아갈게요. 말 잘들을테니까, 시키는 거라면 뭐든 할테니까! 은찬은 몸을 웅크리고 엎드려 제 이모의 발 밑에 대고 빌었다. 아이는 그것 외에 용서를 비는 방법을 모른다. 빌고 또 빌고-

여자는 다시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이 아프니?"

꼭 위로하는 것만 같이 상냥한 목소리였다.

"아가. 어차피 끊어질 인연이었단다."

그러니 너도 더 이상 쓸데없이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도록 하렴.


불은 아귀처럼 숲을 뒤덮어 사흘 내내 타올랐다. 숲에 사는 모든 것들을 태우고, 더이상 태울 것이 없어진 뒤에야 불은 사라졌다. 그곳에 살단 것들은 형태 없이 사라졌다. 하나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건 건과 닮은 백호족 족장의 시신뿐이었다. 이모는 그의 목을 베었다. 이제 몇 년 동안은 아무것도 뿌리내리기 힘들거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은찬은 재만 남은 자리를 몇달동안 찾아 헤맸지만 백건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커가며 죽은 어미와 가족들을 잊었던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 백건을 잊을 수 있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은찬의 마음은 점점 매말라갔다. 그는 더이상 웃을 수 없었다. 웃음을 잃어가는 얼굴은 죽은 어미보단 어머니의 자매를 닮아갔다. 백건을 잊을 수 없었다. 잊을 수 없는 한 웃지 못할것 같았다. 백건은 영영 잃어버리게 된 사랑이었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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