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선의 끝에



-오후 쯤에 사람이 갈겁니다. 주문이랑 최대한 비슷한 걸 구하기는 했는데.
-알았어, 땡큐. 매번 신세가 많아.
-그럼 이번에는 좀 오래 쓰던가요. 매번 성가시니까.
-어쩔 수 없는 거 알면서 또 그런다.

현우가 아침 일찍 전화로 물건의 도착을 은찬에게 미리 알렸고, 그것은 당일 오후 곧바로 은찬의 집에 도착했다. 은찬은 잠시 부재중이었기 때문에 애꿎은 택배 회사 직원이 두 번 씩 이나 이고 나르느라 고생을 좀 했다. 때문에 택배 회사 직원이 무척 불친절한 태도로 은찬에게 수령인 사인을 요구했고 은찬은 이걸, 컴플레인을 걸까 말까. 거슬리는 말투와 태도에 몇 번이나 택배 회사 홈페이지의 고객 센터 란에 컴플레인을 걸 지 말 지 고민했는지 몰랐다. 그러던 은찬은 남자를 곁눈질하며 의외의 사실을 깨닫는다. 푹 눌러쓴 캡 아래의 남자의 얼굴이 궂은 일을 하는 직업답지 않게 새하얬다. 색 밝은 머리카락이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하얀 피부에, 챙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또렷한 실루엣의 이목구비가 단박에 시선을 끈다. 좀 더 자세히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은찬은 고개를 숙이며 수령인 체크란에 사인을 했다. 치켜뜬 시야에 보이는 남자의 눈은 보기 드문 노란색이었다. 

"근데 대체 뭐가 들어서 이렇게 무거워요?"

은찬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물건이 무겁다는 핑계를 대 남자를 집 안에 들였다. 남자는 군말없이 그것을 집 안까지 옮겨주는 듯 하더니 또다시 작게 불만을 표했다. 남자가 물었을 때, 은찬은 굵은 목줄기에서 남자의 팔뚝으로 시선을 옮기던 중이었다. 별건 아니고, 그냥...가구같은 거.., 은찬은 얼버무리며 눈알을 굴린다. 현우가 물건을 보낼 때 그것은 항목상 가구로 분류되어 은찬에게 배달되었다. 그러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배달 품목에 버젓이 '사람' 이라고 써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그런것 치고도 좀 많이 무겁네."

남자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여기다 놔 주시면 되요."

은찬은 듣지 못한 척 적당한 위치를 가리켜 말했다. 남자가 은찬이 말한 위치에 물건을 내려놓는 순간에 시선은 어느새 허리춤에 내려가 있었다. 허리가 굽혀지며 맨살이 살짝 드러났다. 동시에 굵은 어깨선과 달리 잘록해지는 허리 부분때문에 몸이 굉장히 역동적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다 딱 붙는 바지의 옷감에 감싸인 허벅지 부분이 터질듯이 팽팽해서 그대로 시선이 멈춘다. 그리고는 등을 돌리고, 땀에 젖은 티셔츠 너머로 보이는 등에서 마지막까지 시선을 거두지 못한채 현관 문이 닫기는 순간 탄식과도 같은 은찬의 목소리가 나지막히 터져나왔다. 와, 씨발년이 진짜. 




그대로 포장을 뜯고 지퍼백을 열었다. 지퍼백 안에는 각종 처리를 해 썩히는 걸 늦춘 남자 시체 한 구가 들어있었다. 그런대로 나쁘지 않다. 방금전 남자를 떠올리며 은찬은 망설임 없이 그대로 그것을 처리했다. 이윽고 새로 현우에게 전화를 했을 때, 당연스럽게도 수화기 너머에선 현우의 짜증스러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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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거처



1.

 

 건은 오늘 선주로부터 밀린 임금을 모두 지불 받았다. 항구에 배가 정박했을 때 미리 기다리고 있던 선주의 심부름꾼이 건을 포함한 뱃사람들의 임금을 그들에게 전달했다. 그가 지난 번의 체불을 말 없이 참고, 묻은 소금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훌쩍 바닷길에 오른 때로부터 정확히 3개월 만이었다.

 

덕분에 목돈을 거머쥔 건의 바지 주머니가 오랜만에 두툼하게 차올랐다. 소금과 바람에 거칠어진 손을 주머니 깊숙히 종이 쪼가리들과 함께 찔러 넣은 채 건은 세어보지 않았지만 제법 손에 잡히었던 돈의 액수를 가늠해본다. 매번 정체를 알 수 없는 화물을 실어 나르고, 서너시간이 고작인 수면시간을 제외하면 깨어 있을 때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했던 고생을 생각하면 돈은 터무니 없는 액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번 배에 오를 때 까지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돈이었다.

 

거기에 선장이 수고했다면서 덤으로 그의 젖은 손에 무언가를 얹어주었기 때문에, 매번 힘없이 질질 끌리던 발걸음에는 평소보다 무게가 실렸다. 선장이 항상 그것을 저보다 짬밥 높은 것들과 비밀스럽게 나누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마도 마약이나, 아니면 그에 준하는 밀수품 같은 거겠지.몰래 들여오는 물건들은 제 값을 쳐서 받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건의 손에 조금의 푼돈이나마 더 쥐어 줄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 번 배가 뜰 때 까지, 이번엔 생활이 조금은 더 윤택해질 지도 모르는 일이다.


2.

 

배를 댄 항구에는 새벽과 함께 뭍으로 올라온 뱃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파도의 포말처럼 흩어져 부서지고 있었다. 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선창가엔 아침이면 열릴 시장을 위해 어선들이 미리 불을 밝혀놓아 어두운 끄트머리까지 길게 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건은 하얗게 백열하는 등불의 빛을 등지며 걸음을 옮겼다. 

 

 소란스러운 선창가 바닥은 물에 잔뜩 젖어 발자국이 남지 않는다. 그럼에도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바다 안개 너머의 희미한 빛줄기를 피해, 엉성하게 포장된 콘트리트 도로와 짧은 모래밭, 그리고 방파제 위를 가로지른다. 그리고 마침내 제대로된 뭍으로 들어서는 경사로를 타고 오를 쯔음, 귓가에 메아리처럼 따라붙던 바닷가 소음이 잠잠해졌다. 그쯤해서 경사로 중간 쯤에 잠시 멈추어 주변을 살펴보았다. 거리 위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고요했다. 

 

건은 그대로 슬그머니 손에 쥔 것을 품안에 갈무리하고, 마저 걷는다. 비스듬히 경사진 언덕을 넘으면 보이는 것은 해안가 구시가지의 빈민 주거 지구였다. 거미줄 같은 골목이 낡은 가로등 불빛 하나를 미끼로 걸쳐두고 건을 맞이 하고 있었다.

 

  

3.


 건은 그 구시가지 안에 위치한 빈민 지구의 가장 낡은 건물 꼭대기층에 살았다. 처음 그가 이곳에 자리를 잡을 때 가지고 있던 돈으로 그가 들어가 살 수 있는 곳은 방세가 싼 꼭대기층 뿐이었고, 마저도 아래층은 죄다 사창가로 사용되는 건물이었지만 형편이 나아지지 않은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집이라고는 해도 그가 배 위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곳에서 제대로 생활을 한 적은 없었다. 처음 이곳에 내던져 졌을 땐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었고 기억조차 나지 않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결국 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체념했을 쯤에도 건은 매일 낮이면 잠에 들고 밤이면 빨갛게 불을 밝히고 하루를 시작하는 그 곳의 유령같은 삻을 견디지 못했다. 배를 타게 된 것도 그곳에서 잠을 자며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건물 아래층에 그와 함께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이웃사촌과 건은 제법,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진 사이었는데, 주은찬, 그 이웃사촌은 어느날 술에 취해 옥탑방 문을 두드린 불청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취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건은 빼꼼히 열린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건을 마주한 은찬이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웃던 것을 기억한다. 입술 밑의 점이 헤픈 웃음이었다. 그러고는, 계집애들 다리 밑으로 돈이나 긁어모으는 놈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문을 닫으려고 하니 대뜸 제 이름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결국 건은 얼떨결에 놈이 건내는 술을 대가로 그 자리에서 은찬의 굴곡지고 장황한 인생사를 들어주게 되었다. 은찬은 이곳 부랑자들에게서 들려오는 각양각색의 혀가 꼬부라진 외국어, 천박한 사투리와 욕설 대신 제법 건에게 익숙한 언어를 구사했다. 점잖고, 깔끔한. 어렴풋이 구석에 쳐박아둔 기억이 두둥실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날이면 잊어버릴 이야기를 차곡차곡 귀에 담았던 건지도 몰랐다.

 

은찬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내내 헤프게 눈웃음을 쳤다.

 

웃었고, 웃다가, 또 웃고, 웃더니, 마지막엔 키스를 했다.

 

-외로우니까 키스 한 번만 해보면 안돼요?

-미친놈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변덕스러웠던가? 고작 몇시간 만에도 뒤집힐 수 있을 만큼? 그러나 건은 곧 이해했다. 이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똑같이, 펄럭일 날개조차 꺾여 아우성치고 있는 삶인 것이다. 갑자기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 사이 은찬은 키스를 하고 있었다. 얇은 입술의 표면과 젖은 혀가 톡톡 두드린 자리가 뜨겁게 달아올라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숨을 받아 먹는 그를 적당히 마르고 살집이 맺힌 손가락이 더듬어 내려갔다. 

 

달이 뜬 밤이었다. 가빠진 호흡과, 싸구려 술의 깔끔하지 못한 뒷마무리로 올라오는 독한 기운에 취한 채 건은 그날, 밤보다 새카만 은찬의 두 눈을 봤다.

 

 

4.

 

아직 시커먼 하늘 위로 고개를 처들고 건은 익숙한 걸음으로 길을 걸었다. 불빛 한 점 없었지만, 이미 그런 것쯤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곳에 익숙해졌다. 건은 빈민가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걷다 보면 비릿한 살 냄새가 깊은 한을 선명히 아로새기듯 가시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 위로, 위태롭게 위로 쌓아올려진 낡은 건물의 그림자가 작은 빛줄기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짙게 드리워있었다. 그것은 해가 뜬 낮시간에도 마찬가지다. 그림자는 구석구석 스며들어 사람들을 짓누른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절망은 그냥 삶의 일부였다.


건물 앞까지 다다랐을 때 건은 때마침 물건을 바깥으로 옮기고 있는 은찬과 마주쳤다. 1층의 불만 켜져 있는 걸 보니 가게 마감을 치는 중인 듯 했다. 건은 은찬을 그대로 바라본다. 은찬은 눈치 채지 못한다.


"왔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한 와중에 등 돌린 은찬이 그렇게 말을 하고, 건은 잠시 대답을 망설이다 입술을 비죽였다.


"어."


대수롭지 않게 툭 던지는 말을 기다렸던 것 같기도, 그런데 고작 그 뿐이라 서럽다.



5.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겨우 몸을 지탱하는 낡은 골목의 유일한 출구는 바다였다. 사람들은 매일 바다를 바라 본다. 그러다 견딜 수 없어질 때 쯔음, 그 바다의 푸른 수평선 너머에 지푸라기처럼 매달려 뛰쳐나간다. 그러나 결국 갈곳 없이 떠돌다 이곳으로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건은 매번 더 절망하고 더욱 지쳐 버린 채로 이 골목에 온전히 몸을 맡긴다.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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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류石榴

카테고리 없음 2015. 8. 25. 00:19






석류 




껍질의 건조한 금빛이

어떤 힘의 요구에 따라

과즙의 빨간 보석들을 터뜨릴 때



*


나는 최근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호텔 1층에 자리 잡은 카페 창가에서 매일 해변에 나타나는 남자 아이 하나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는 이방인의 건조하고 밝은 색을 가진, 성숙과 미성숙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애매한 나잇대로 짐작되는 아이였다.  


막 각이 지기 시작한 얼굴과 몸에서는 어중간한, 그러니까 과도기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그것도 막 시작된 성장의 낌새다. 그래서 그 애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농익은 것을 보는 것보다 더 미묘한 충동을 일으키게한다. 그 아인 자기가 그렇다는 것을 잘 알았다. 


 매일 해가 질 때면 어김없이 해변에 나타나던 그 아이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약 한 시간 가량 해변을 맴돈 이후엔 어디선가 나타난 남자와 함께 사라지고는 했기 때문이다. 동행은 날마다 다르다. 또래의 남자 아이일 때도 있었고, 나같은 청년일 때도 있었으며 중년 혹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기도 했으며 여러명일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마 모두 같은  것을 원했을 거다. 그랬음이 분명하다. 누구든 그러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애의 하얀 얼굴이나 물 오른 가을의 황금빛 밀밭 같은 두 눈, 그리고 붉게 익은 팔다리와 모래밭을 꼼지락거리는 맨발이 사람을 미치게 했으니말이다. 


 나는, 아마도, 그애를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아이와 시선을 주고 받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 아이는 그 누구에게도 먼저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그 아이가 물가에 발을 찰박이며 일행과 함께 해변을 거슬러 사라질 때면 그 기다란 그림자와 함께 건조한 껍질같은 색을 한 샛노란 시선을 꼭 나를 향해 던져두곤 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나는 내가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착각이라고 생각했던 그 아이의 시선은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믿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가 그렇게 느꼈다. 나는 그 애의 시선을  받았다. 그 애는 나를 본다. 그러나 그 아이는 늘  나에게 그 아쉬운 시선만을 남기고 떠나갔다. 매번 야속한 뒷모습을 보는 내 마음은 얼마나 비참하고 당혹스러웠는지 모른다. 


 나는 점점 기이하게 뒤틀리는 나 자신을 느낀다. 나는 이제 내 충동의 본질을 스스로 알 수가 없다. 얇은 옷을 걸친 몸과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다리를 보고 있으면 막연한 첫사랑을 느끼고 설레이다가, 어리지만 분명 남자아이의 것인 등허리를 보고 있으면 그 애가 마치 내 품속의 애인같아 사랑스럽고 황홀하고 아찔해 끌어안고 키스를 하고 싶어졌고, 그러다 끝내 그것이 내가 아닌 어느 누군가의 팔에 둘러져 있는 것을 보면, 수십 수백 번 천박한 모습을 상상하고 그 애를 매도하며 채 성숙하지 않은 그 애가 두번 다시 소생할 가능성조차 없게 영영 내 손으로 꺾어 쥐고 흔들고 싶다고 생각하며 애를 태우기도 했다.


이제 그 애는 하루 종일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내게 작용하여 내 전부를 옭아매고 있었다. 나는 완전히 그 애에게 홀렸다. 사로잡혔다. 미쳤다. 나는 때때로 마치 내가 예전부터 그 애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는 기분을 느낀다. 심지어 내가 그 아이와 유일하게 각별한 사이라는 착각이 든다. 그리하여 애틋함에 시달리며 목이 말라 갈망한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 그 애를 보기 위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매일 카페를 찾는 것이다. 나는 종일 창가 자리에 앉아 내가 그 애의 애인인 양 그 애를 기다린다. 기다림은 괴롭다. 그리고 해질녘, 내 괴로움을 끝내줄 시간이 오면 그 애가, 나의 소년이, 투명한 발목을 휘저으며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참을 수 없는 환희에 부풀어 그것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한다. 그러나 다시금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해를 따라 서서히 잠겨가는 그림자를 볼 때면 또다시 목이 말라 갈망하며 슬픔에 잠겨 밤새도록 울고야 만다.



*



오늘도 나는 여느 때처럼 그 애를 기다린다. 기다리다보니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해질녘이 아닌 오후에 그 애가 나타났다. 그 아이는 물가를 거니는 대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제법 오랫동안 조용히 바라본다. 나는 시선을 느꼈지만, 모르는 척 했다. 상대를 정확히 겨냥하여 꿰뚫는 호기심 어린 눈빛에 사냥을 당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애 앞에서, 내가 바라던 그 애의 눈길과 관심 앞에서 나는 무심코 겁이났다. 목이 움츠러든다. 짧은 셔츠깃 위로 식은땀이 맺힌다. 그 위로 더운 바람이 불었다.


 그 아인 계속 그 자리에서 나를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해가 낮은 자리에서 발갛게 타오르기 시작했을 무렵에, 나는 목이 말라 다급히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그런데 웨이터가 맥주를 가져다주고, 내가 팁을 건네고, 영수증을 확인하는 동안 그 아이가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사뿐거린다기보단 성큼성큼 느긋하고 여유로운 발걸음이 나를 향한다. 걸음에 맞춰 심장이 뛴다. 곱게 갈린 조개와 모래 더미 위를 가로지르는 흰 다리가 이따금씩 백사장의 모래 틈 사이에 고인 웅덩이에 빠져 얄팍한 물비늘이 튄다. 그 때마다 우아하게 뻗은 그의 종아리가 함께 반짝였다. 나는 숨이 찼다. 그것은 누구라도 하는 짓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 아이를 쳐다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위험하고 아름다웠으니까. 


그러나 나는 유일한 구경꾼이었다. 그것을 다른 누군가가 보았다면 무척 화가 났을 테지만, 해변엔 사람이 없었다. 멀리 아지랑이처럼 하얀 두 다리가 눈 앞에서 흔들린다. 겨울에 뜨는 낮달처럼 그것은 현실감이 없다. 그래서 나는 넋을 놓고 그 애의 두 다리를 핥았다. 그리고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 그러니까, 그 애가 바로 내 코앞까지 다가와 불쑥 고개를 내밀어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더운 살냄새를 맡으며 이곳 카페에 유리창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그렇다. 여긴 동물원이 아니었다.


"아까부터 왜 자꾸 쳐다 봐?"


목소리는 생각 이상으로 어렸고, 그것은 부드럽게 귓가를 구르다 톡 터져 허공을 배회한다. 비눗방울 같다. 생각했던 것보다, 직접 대면하는 순간은 그리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애가 내게 다가오던 때가 떨렸다. 나는 벌써 막연하게 여겨지던 그 아이가 수월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그 애가 이 남쪽 휴양지에서 볼 수 있는 흔해빠진 아이들처럼 굴지는 아니었다. 아이는 내게서 빼았은 잔을 홀짝이며 매끄럽게 뻗은 속눈썹을 나를 향해 당돌하게 깜빡였다. 그 순간 나는 어디선가 분명 이 애의 목소리 같은 것이 천진하게 웃는 것을 듣는다. 실제로는 여물어 농익은 체리같은 입술에 웃음이 비집고 나올 틈은 없었다. 나는 다만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가 깔끔히 다물린 채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냥 예뻐서."


그냥 있으면 패를 내놓을것 같지 않아 나는 먼저 베팅을 시도했다.


"아, 이 아저씨 선수 같은데."

"미안, 근데 너무 예뻐서 쳐다봤어. 그리고 나 아저씨 아니야."


한 번 더 내 몫을 걸었다. 그러자 웃는다. 다물린 껍질이 알맹이를 터트리듯,사방으로 웃음소리가 번졌다. 웃음은 생각보다 값이 쌌다. 그렇다고 어여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름이 뭐야?"

"알아서 뭐하려고."

"불러주고 싶으니까 그렇지."


이름은 조금 더 비쌌다. 아마도 그것이 그 아이가 흥정하는 방식인듯 했다. 사랑인듯, 연인인듯, 꽃인듯. 그 어느 것도 아니면서 그 모든 모습을 내게 하나씩 보여주니 나는 마른 껍질 속에 박힌 알맹이가 무척 탐이났다. 목 마르지 않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새로 칵테일 한 잔을 더 주문하고 웃는다. 백건. 하고 그 애가 이름을 톡 던진다. 이번엔 순진한 아이처럼. 그러나 빨갛게 익은 입술을 보고 있으니 내 방 서랍 안에 놓여있을 비타민제가 문득 생각났다. 그걸 쓸 수 있으면 좋을텐데. 


 동그랗지만 각이지기 시작한 어깨 너머로 해가 기운다. 붉고, 노란 햇살이 하얀 그 아이를 적신다.나는 황홀하게 바라본다. 물론 상냥하고 다정하게 이름을 속삭이는 것을 잊지 않으며.



Posted by 세한(歲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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