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가람

카테고리 없음 2016. 6. 10. 16:38

아가씨의 이름은 청가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오랫동안 마을을 지배해왔던 어느 유서 깊고 대단한 가문의-옛날부터 대대로 높은 벼슬자리에 올라 이름 깨나 있는 집안으로, 현재 마을 일대의 전답과 산림 대부분이 가문의 것일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지요-마지막 일원으로, 그녀의 어머니가 죽은 후 슬픔에 빠진 아버지가 새로이 장가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댁 무남독녀 외동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곧 둔덕 위에 자리 잡고 대대로 마을을 굽어보던 대저택과 그들 가문의 완전한 몰락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모여들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으로 인해 온 마을이 떠들썩해졌습니다. 노인. 중년, 젊은이들. 그리고 어린아이까지 남녀노소 할 것 없는 사람들이 장례식을 마치 오랜만의 축제인 양 기다리며 덩쿨에 감긴 그 집 높은 담장 주변을 기웃거리고는 하였습니다. 그 가문의 찬란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이들은 그것이 마치 그들의 것이었던 것처럼 여겼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며 한탄했습니다. 젊은 남자들은 그림처럼 예뻤던 젊은 아가씨의 죽음을 슬퍼했고, 마을 처녀들 또한 그 죽음을 입에 담았지요.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그 젊은 아가씨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했던가 하면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오랫동안 감히 넘볼 수조차 없었던 담장 너머의 세상이 궁금했던 것이지요. 저택을 둘러싼 소문은 오랫동안 무성했습니다. 오래 전, 그녀의 아버지가 죽고 난 뒤 아름다운 아가씨가 집 대문을 걸어잠근 바로 그 때부터요. 사람들은 스스로의 막연한 시기와 질투에서 비롯된 그 소문들을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설마 그럴 리 있겠냐고 스스로 허황되었음을 알면서도 그것이 사실이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최근 아가씨와 추문이 돌았던 젊은 남자 의사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댁 아가씨와 어떤 관계인지 모르나 의사는 저택과 연줄이 닿아있었고, 또 다른 도시의 꽤 큰 가문의 도련님이었습니다. 그 가문은 대대로 아가씨 가문과 연줄이 있던 집안이고, 아버지가 죽은 후 가문의 저택과 전답 모두를 그 가문 어른들이 대신 관리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허울 좋은 이야기일뿐 실상 힘없는 어린 여자아이 앞으로 딸린 재산에 눈이 멀어 그것을 빼았나 간 것이었죠. 남자는 청가람 아가씨와 결혼해서 그 재산을 합법적으로 자기 가문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내려온 사기꾼이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니 아가씨가 죽자 한 때 마을 사람들은 아가씨의 주치의로서 유일하게 그 저택을 들락거리던 외부인이였고 한 때는 죽은 아가씨와 혼인을 할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돌던 남자에 대해 사람들은 그가 필시 무언가를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가씨의 유언장이라고 공표된 그것에도 모든 재산을 주은찬 그 사내에게 주겠노라 적혀있었고 실제로 그가 재산을 현물로 바꾸기 시작한든 소문이 장물아비들 사이에서 들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의심은 커져갔습니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이 남자가 큰 도둑질을 하게 되는 지 흥미롭게 기다리는 듯 했습니다.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남자를 닥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번번히 그들의 기대를 빗나갔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죽은 아가씨에 대해 물을 때면 친절한 얼굴로 웃으며 자기는 아는 게 없노라고 더이상 무례하게 캐묻지 말라며 사람들을 쫒아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애매한 태도는 이윽고 의심의 불씨가 되어 또다시 저택에 대한 소문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축제처럼 기다려온 죽은 아가씨의 장례식 날, 사람들은 소문의 진상을 직접 확인하고자 모여들었지요. 개중에는 오랫동안 이 지역 유지였던 가문에 대한 이유모를 향수와 충성심을 불태우며 후안무치한 남자와 그 가족들이 어떤 뻔뻔한 짓을 하는지 지켜보겠노라 성을 내는 이들도 있었고, 가십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또한 그 대단한 집의 문턱을 한번 넘어 보고자 했던 순박한 방문객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척이라고는 한명도 없는 그녀의 장례식은 참으로 쓸쓸했지요. 그 젊은 의사만이 그나마 조용히 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벌써부터 남자의 가문 사람들이 몰려와 재산을 두고 목소리를 높이는 광경도 볼 수 있었습니다. 낯선 사람들에 의해 서둘러 형식뿐인 장례가 마무리되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아가씨를 불쌍해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이 끝날 무렵 분위기가 이상해졌습니다. 사람들이 헌화를 끝내고 관뚜껑에 못질을 할 무렵에, 어디선가 나타난 아가씨와 꼭 닮은 소년 때문이었습니다. 유령처럼 나타난 소년을 보고 처음엔 아가씨로 착각한 사람들이 겹을 집어먹고 장내가 소란스러워졌습니다. 거들먹거리던 남자의 가족들도 당황한 눈치였지요. 소년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사람들 가운데로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소년의 걸음걸이를 지켜보며 호기심을 불태우며 조용해졌습니다. 누구인지 모를 이 소년의 얼굴도, 신경질적이고 꼿꼿하고 자태가 참으로 죽은 아가씨와는 물론 이전에 죽은 그녀의 아버지와도 많이 닮아있었가때문입니다. 모두가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 하는 가운데 조용히 있던 남자가 다가와 소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다정하고 상냥한 얼굴로 소년의 어깨를 쥐고 친근함을 표했습니다. 그리고 소년이 죽은 아가씨의 먼 친척이라는 이야기를 했지요. 그 순간 사람들이 뒤집어졌습니다. 웅성거림이 끊이질 않았죠. 그러다 째지는 비명소리가 들렸습니다. 남자 뒤에 있던 그들의 가족이 이건 말도 안된다며 소리쳤습니다. 탐욕에 눈이 뒤집힌 이들이 작은 소년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했습니다. 소년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아니. 할필요가 없었지요. 소년을 향한 상스러운 욕을 남자가 나서서 잠재워주었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소년이야말로 이 가문의 일원으로서 아가씨가 남긴 가문의 모든 유산에 적법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앞장서서 자기 가문으로 재산을 빼돌린다고 믿던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어찌되었든 소년은 이 위대한 가문의 일원임이 너무나도 틀림없어 보였고, 사기꾼인 줄 알았던 남자가 소년의 곁에서 다정한 보호자가 되어 그를 비호하고 나섰으니까요. 결국 남자의 가족들은 물러나야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소년을 향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며 탐욕스럽게 재산에 눈독을 들이던 그들의 모습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그들의 이야기는 아주 오랫동안 이 지역 사람들에 의해 두고두고 놀림거리로 회자되었습니다. 그리고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출신만은 확실한 그 소년이 도련님이 되어 모든 권리와 의무를 되찾으면서 가문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거기엔 남자의 공이 컸지요. 사람들은 여전히 남자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어찌됐든 이 집안의 땅을 빌어 먹고 살던 이들은 남자의 양심있는 행동으로 말미암아 꼴사납게 거들먹거리돈 경성 부자들이 이 가문을 채가지 않아 다행이라며 안도했습니다. 사람들은 아가씨를, 그리고 그 가문을 동경하고 그것의 오랜 영광이 마치 자신들의 것인 양 여겼던 것처럼 그 도련님을 호의로 환대했습니다.

소년. 도련님은 얼마 있지 않아 동경으로 유학을 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어느 화창한 여름, 무더위가 찾아오기 직전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역사에서 말단으로 일하던 청소 직원이 도련님이 큰 가방을 들고 떠나는 걸 보았다고 했습니다. 곁에는 빨간머리 남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일등칸에 탔고 같은 칸에 탄 누가 행선지를 묻자 동경으로 갈거라고 이야기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건 기차는 부산행 상행선이 아니라 경의선 방향의 하행선이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날 이후 도련님은 남자와 함께 저택을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소식은 들을 수도 없었지요. 그리고 그 큰 저택은 점점 사람의 손길을 받지 못한 채 과거의 영광스러운 역사와 함께 조금씩 시간과 함께 바스라져 그 누구도 찾지않는 쓸쓸한 폐허로 남아 자리를 지키고 딨답니다.


에필로그

Posted by 세한(歲寒)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