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우백건

카테고리 없음 2016. 6. 10. 15:46

잊혀진 계절에는 달이뜬다.



나는 계속 네 꿈을 꿔.

꿈은 언제나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시작돼. 우리가 같이 저녁을 먹고, 주은찬 몰래 네 방에서 이불을 깔고 누워 있으면 너는 아무 말 없이 내 손만 잡고 있고 나는 네 품에 기대서 한복 옷자락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부드럽게 밀려오는 졸음에 취하던 바로 그 시간이야. 그래. 겨울. 바로 그날 말이야. 겨울이라 바깥엔 눈이 내려. 겨울밤은 참 차갑고 춥지. 사정을 봐 주는 법이 없어서 문을 꼭 닫아놔도 낡은 찻집 바깥에서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소리가 문틈을 찢고 들어와. 그래서 추운 걸 싫어하는 나는 언제나처럼 널 안고 같이 이불을 덮고 따뜻한 바닥에 배를 깔고 나른한 기분으로 누워있어. 그대로 우린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다 또 스마트폰을 뒤적이며 게임에 빠져 키득거리며 웃지. 아주 평화롭지? 그렇지만 그 날은. 그 꿈에선 잘 시간이 되면 내 옆에 누워있는 네가 조용히 중얼거리는 거야.

잊혀 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나는 꿈에서 계속 그런 질문을 받아. 하지만 처음엔 그 말을 듣지 못해. 아마 그때도 똑같이 나는 제대로 듣지 못했을거야. 네 목소리가 워낙 작기도 작았거니와, 혼잣말을 하는 듯해서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말을 듣지 못한 나는 꾸벅꾸벅 졸면서 내 할 일만을 하고 있지. 네가 다시 한 번 내게 물어와. 그러면 나는 이상하게 낯선 기분이 들어서 일어나 너를 쳐다봐.

일어나서 너를 보며 무슨 소리냐고 묻지. 너는 조용히 이불 위로 두 손을 단정하게 포개고 베개를 베고 누워 있어. 아주 얌전히. 네가 늘 잠드는 바로 그 자세 그대로. 드리고 또렷하게 뜨고 있는 까만 눈으로 조용히 나를 봐. 그리고 대답해 달라고 하지. 너는 언제나 그 눈을 통해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말해주지만 그때 네 눈은 언제나 너무나도 불안하고, 내가 미처 알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해. 왠지 네가 울것 같다고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러다보니 나는 조금 불안해져. 눈앞에 네가 선명하게 있는데도 너는 이상하게 흐릿하고, 너의 목소리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같아. 아니 그것보다 훨씬 멀어. 넌 꼭 유령이나 연기처럼 아주 희미하게 느껴져. 내 옆에 누워 있는 네가 사라질것만 같다는 걱정을 하지.

그래서 왜 그런지 고민하기 시작해.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 하루를 곰곰히 되짚어보는거야. 사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짓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러다가 문득, 평소 같지 않던 오늘 네 행동들이 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떠올라. 너는 아침 일찍 일어나 하던 수련도 하지 않고 무작정 내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왔지. 날 끌어안고선 학교에 가지 말라며 이상한 투정도 부렸어. 결국 같이 잠들어버려서 청룡한테 잔소리를 들었고 결국 난 아침에 학교를 안 갔어. 하루 종일 너랑 있었지. 생각해보니 그때도 넌 좀 이상했어. 평소처럼 멍청한 소리나 얄미운 말은 하나도 하질 않았거든. 기억은 잘 안나지만. 어쩌면 네가 나한테 뭔가 이야기 하고 싶었던걸지도 모르는데.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걸. 그리고 내가 멍걸이 데리고 너한테 장난 친 거 기억해? 근데 개라면 질색하고 눈길도 안 주던 네가 멍걸이를 안고 쓰다듬었단 말이야. 심심해서 같이 수련하는데도 자꾸 실수 하고, 멈칫거리면서 먼 곳만 바라보고. 나랑 대련할땐 때리지도 못하더라. 결국 내가 재미 없다고 관둬버렸지만. 그리고 너. 지겹도록 챙겨 보던 우리 누나 드라마도 안 보고 저녁 먹기 전에 산책이나 하자면서 동네 한바퀴를 다 돌았지. 날이 무지 춥고 바람도 많이 불고 했는데도 말이야. 걷는 동안 네가 내 손을 계속 잡고 있어. 평소에 그런 간지러운 짓은 하지 않는 게 우리 사이인데 말이야. 까무잡잡한 네 손은 나 못지 않게 크고, 뜨겁고. 게다가 하도 꽉 잡아서 땀으로 미끌거렸어. 생각해보니까 너는 계속 뭔가 말 할고 했던거 같아. 결국 하지 않았지. 대신 골목 앞에서 나한테 키스 했어. 아주 짧게. 이건 꿈에서도 자꾸 생각나더라. 좋았나봐. 아무튼. 이것저것 생각 해보니 하루종일 네 행동이 이상했다는 걸 깨달아. 그러니 네가 했던 이상한 질문과, 이상하게 흐릿하고 멀게 느껴지는 네 모습과 그것들이 겹쳐져서 나는 당장이라도 네가 사라질 것만같다는 불안을 느끼는거야.

도대체 그딴 걸 왜물어봐?

그래서 불안한 나머지 난 조금 화를 내면서 물어봐. 너는 말없이 날 바라보지. 여전히 네 눈은 새카매. 너무 까매서 내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 너는 나를 바라보다, 천장 위로 고개를 돌려.그리고 이렇게 말해.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줄까요.

그건 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야. 너는 그냥 네가 할 말을 계속하지. 그렇게 끝도 전혀 올라가지 않은 단조로운 어투의 물음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해. 물론 꿈속에서. 아마도 그 당시엔 그것보단 조금 짜증나고 답답했을 뿐일거야. 초조해진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네 어깨를 잡아.

갑자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데 그래? 무슨일인지 말을 하란 말이야. 그때 새카맣고 깊은 네 눈동자가 그런 나를 바라봐. 반질반질한 네 눈동자엔 다급해하는 내 모습만이 비쳐. 나는 너랑 눈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네 시선은 미묘하게 빗겨나가 좀처럼 맞닿지를 않아

그러면 나는 갑자기 아아, 이건 이별이구나 하고, 슬픈 기분을 느껴. 너는 여전히 내 옆에 누워 있었지만 그런 확신을 하는거야. 엇갈리는 시선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우리 사이에 완고하게 둘러쳐진 벽의 존재를 느껴. 네가 나한테 벽을 치큰 거지. 그게 참 쓸쓸해.

그렇게 꿈이 진행이 되면 그 시점에서 내가 꼭 떠올리는 기억이 하나 있어. 아주 오래 전, 너랑 같은 방을 쓰는 주은찬이 내게 말해주었던 일이지. 주은찬은 네가 가끔 집에 간다고 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한참동안 찻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 앞에 서있는 걸 봤다고했어. 머뭇머뭇 거리던 너를 자기가 한 번 안으로 데려 온 적이 있었대. 그리고 그런 날이면 잘 시간이 훌쩍 넘었는데도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마루에 앉아 있노라고. 나는 그 이야기가 조금 신경 쓰였지만 너한테 물어보지는 않았어. 가끔 그런 밤에 네가 내 방문 앞에 서성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은 적도 있지만 한번도 나와 본 적은 없어. 알다시피 우리 사이가 그렇게 다정하고 간지러운 건 아니었잖아? 나는 그게 네 문제라고 생각했어.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고. 우리는 그럴만한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가끔 보이는 너의 어둡고 지친 모습은 너네 집안 문제라고 짐작했을 뿐이고. 우리 같은 입장에 있는 아이들이 으레 집안과 겪는 그럼 문제들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는 누워있는 네 앞에서 그렇게 후회를 해. 한 번이라도 내가 너에게 너를 괴롭게 하는 것들에 대해 물었더라면. 네가 지쳐 돌아온 그날 밤 먼저 널 부르고, 네 손을 잡고. 너를 안아 줄 수 있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수 만 가지 가정과 상상이 밀려들어. 변명은 그만 할게. 그냥 누군가를 위로한다는 게 나는 낯설고 부담스러웠을 뿐이야.

그렇게 행복하게 시작하던 평화로운 내 꿈은 모든 걸 내려놓고 이별을 결심하는 네 앞에서 산산히 부서져.

내가 기억해줄게. 거북이같이 오래 걸리면 좀 짜증나긴 하겠지만. 어쨌든.

그리고 붙잡을 자격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말해. 정작 당시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걸 알아. 나는 니가 답답해서 그냥 짜증을 냈고, 너는 내게 잘자라고 했어. 그렇지만 꿈에선 너한테 꼭 그말을 해야할거 같아서 나는 네 꿈을 꿀때마다 너한테 그렇게 말해. 기억 하고 있을게. 잊지 않을 게. 내가 기다리고 있을 게. 너한테 꼭 그말을 해야할거 같거든. 그렇게 내가 약속을 하면 조금 안심이 돼. 네가 웃거든. 그렇지만 네 얼굴을 아까보다 훨씬 슬프고 쓸쓸해. 나는 그렇게 꿈에서 매번 네가 이미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곳에 있음을 깨달아. 너는 그냥 내 손을 잡는다. 같이 자요. 그렇게 말하지. 나는 네 손을 깍지 껴 잡아. 너는 일찍 눈을 감아. 나는 계속 눈을 뜨고 네 얼굴을 하나하나 내 눈에 새겨 넣으려고 해. 널 기억하는 연습을 하는 거야. 까만 머리카락, 단정한 눈매와 속눈썹, 시원하게 뻗은 콧날과 다물어진 입술. 어느 것 하나 놓치기 싫어 샅샅이 살피는데 그러다 갑자기 네 목소리가 기억이 안나. 차마 널 깨울수는 없어서 네 목소리가 어땠는지 생각하는동안 아까운 시간은 계속 흐르고, 하늘에 뜬 달이 기울고 달에 비친 내 그림자가 점점 짧아져 가. 나는 불안해져. 내가 널 기다리는 동안 네 목소리를 잊어버려 네가 나를 불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아닐까?


백호공자.


그 때 어김없이 네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가 잠들어버린 줄 알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란다. 너를 바라보면 깊이 잠든 네가 어느새 네가 눈을 뜨고 그 까만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네 목소리가 기억이 난다. 너는 이 밤, 드디어 처음으로 나와 눈을 맞춘다. 어긋나가지 않고 마주치는 시선이 기뻐서 나는 처음으로 네 이름 두 글자를 불러.


정말 나를 기억해 줄 건가요?


네가 묻고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기억하고 있을게. 절대 잊지 않을게. 계속 그렇게 약속한다.

나의 달. 그렇다면 기다려주세요. 시간이 얼마나 흐르더라도 돌고 돌아 곁으로 돌아올테니.

그러면서 네가 내게 키스해. 꿈은 너와 함깨 조각조각 흩어져 공간이 갈라지고 네가 멀어져. 검은 눈동자에 가득 비치던 내 모습은 흐려지고 너도 흐려지지. 물살이 일어 조각배가 흐트러지듯 눈앞이 잠시 일렁이다, 검은 파도가 밀려와 모든 것을 집어 삼켜. 나는 눈을 떠. 다시 눈을 뜨면 익숙한 내 방 천장이 보여.


그런 꿈이다.

약속을 했기때문에 나는 너를 기다려. 하지만 꿈속에선 선명히 기억이 나는 얼굴도, 목소리도, 이름도 전부 다 꿈에서 깨어나면 기억이 안나. 그런데도 너를 기다리고, ‘너’를 내가 잊지않고 기다리겠다 약속하는 그런 꿈을 매일 꿔. 그런 꿈이야.

Posted by 세한(歲寒)
,